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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빛 저주의 공녀님-36화 (36/130)

36화

“그나저나 왕자님이 많이 기다리고 계시겠죠?”

발레린이 묻자 보좌관은 그제야 손을 내저었다.

“아닙니다. 어차피 조금 이따가 이곳에서 결혼식이 열리니 준비를 하고 계십니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때 루네스가 발레린에게 다가왔다.

“공녀님, 저희도 얼른 가야 돼요. 이제 결혼식이 열릴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요!”

발레린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루네스를 따라 나섰다. 이미 신전 안에서는 결혼식 준비가 한창이었다. 발레린은 설레는 마음으로 미소를 지었다.

어느덧 결혼식이 열리는 시간이 다가왔다. 하녀들은 이제 모두 물러났고 루네스가 발레린의 드레스를 정리해 주었다. 발레린은 다시 한번 확인했다. 방독면은 멀쩡했고 손에 든 노란 장미와 노란 튤립도 싱싱했다. 모두 완벽했다. 마지막으로 발레린은 그로프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로프는 손으로 바로 올라오지 않고 발레린을 멀뚱멀뚱 바라봤다.

“그로프, 왜?”

“제가 주인님과 함께 있어도 됩니까?”

“물론, 같이 있어도 되지.”

“하지만 결혼식은 주인님이 주인공 아닙니까?”

“그렇지만 늘 너와 함께해 왔잖아.”

그로프는 대답 없이 발레린을 보기만 했다. 발레린은 미소를 지으며 몸을 숙여 그로프와 눈을 맞췄다.

“내가 힘들 때마다 네가 옆에 있어 주기도 했고.”

발레린은 손을 내밀었다. 그로프의 눈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발레린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걱정스레 살폈다.

“그로프, 괜찮아?”

그로프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괜찮습니다. 단지 주인님께 이렇게 인정을 받으니 은혜가 깊을 따름입니다.”

그로프는 여전히 눈물을 뚝뚝 흘렸다. 발레린은 손가락으로 그로프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그때 흰 손수건이 발레린의 눈에 들어왔다. 발레린이 고개를 들자 루네스가 조심스레 말했다.

“아무래도 손으로 닦으면 한계가 있을 것 같아서요.”

발레린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고마워.”

“뭘요, 저는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발레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시계를 확인하니 오후 1시가 다 되어 있었다. 발레린은 손수건으로 그로프의 눈물을 부지런히 닦아 주었다. 그로프는 눈을 끔뻑이며 발레린을 쳐다봤다. 발레린은 활짝 웃으며 그로프에게 다시 손을 내밀었다.

“그로프, 이제 가자.”

그로프는 천천히 발레린의 손으로 올라왔다. 발레린은 늘 하던 것처럼 어깨 위에 그로프를 올렸다. 그리고 고개를 살짝 내려 말했다.

“그로프, 혹시나 너를 보고 이상한 말을 하면 그냥 넘겨. 알았지?”

그로프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그런 말은 예전에 자주 들어 봤기에 이젠 아무렇지 않습니다.”

“그래도 마음 상하는 말을 들으면 언제든지 말해.”

“역시 주인님밖에 없습니다.”

그 말을 하면서 그로프는 개꿀개꿀 울었다. 발레린은 빙긋 웃고는 몸을 돌려 방을 나갔다. 기다리고 있던 하인과 루네스가 발레린의 곁으로 왔다.

“공녀님, 이제 식장으로 가시면 돼요. 모든 준비가 끝났대요.”

발레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속은 살아 있는 생선처럼 팔딱팔딱 뛰었다. 드디어 결혼이었다. 그동안 마음속으로 머릿속으로 늘 꿈꿔 왔던 결혼!

‘거기다 왕자님과 함께라니!’

발레린은 벅차오르는 마음에 미소를 지었다. 비록 가장 중요한 사랑이 빠졌지만 발레린은 개의치 않았다. 그저 짝사랑을 하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행복했으니까.

결혼식장은 무척이나 넓은 홀이었다. 대신전에서 가장 중요한 행사가 있을 때 여는 신성한 곳이었는데 발레린의 모든 선택이 들어 있기도 했다. 주변은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대신관이 서 있는 곳까지 붉은 카펫이 깔려 있었고 그 옆으로는 노란 장미와 함께 노란 튤립이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었다.

대귀족들이 앉은 자리는 대리석 의자였다. 기품이 있는 동시에 은근히 화려한 무늬가 돋보여서 주변의 분위기를 고급스럽게 만들어 주었다.

발레린이 멍하니 앞을 보고 있을 때 문득 손에 따뜻한 것이 잡혔다. 발레린이 화들짝 놀라며 보자 멀끔하게 제복을 차려입은 제르딘이 보였다. 발레린은 쉽사리 눈을 떼지 못했다. 각이 잡힌 제복은 왕자의 위엄을 돋보이게 하는 옷이었다. 화려한 휘장은 눈이 부실 정도였고 단정하게 떨어지는 바지는 그의 다리가 확실히 길다는 것을 각인시켜 주었다.

거기다 말끔하게 넘긴 머리에서 깔끔함과 동시에 언뜻 냉정함이 드러났다. 그 괴리감에 발레린은 쉽사리 눈을 떼지 못했다.

분명 아까 그의 모습을 보았는데도 그랬다.

그때 제르딘이 옆으로 가까이 다가와 섰다. 그 순간까지도 발레린은 멍한 눈빛으로 제르딘을 쳐다봤다. 제르딘은 고개를 숙여 나직이 속삭였다.

“괜찮으십니까?”

낮게 떨어지는 목소리가 귓가를 간질였다. 발레린은 숨을 들이켜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제르딘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발레린을 살폈다. 그가 너무나 걱정하는 것 같아 발레린은 빠르게 대답했다.

“네!”

하지만 너무 빨리 말한 나머지 목소리가 너무 컸다. 제르딘은 발레린을 물끄러미 보다가 이내 고개를 돌렸다.

“긴장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어차피 형식적인 일일 테니까요.”

“하지만 이런 일은 처음인걸요. 거기다 왕자님이 이렇게 갖춰 입으신 것을 보니 너무 멋있기도 하고요.”

제르딘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발레린은 차마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방독면 때문에 얼굴이 가려져 있긴 하지만 화끈하게 올라오는 붉은 기가 내심 거슬렸다.

어차피 짝사랑이라고 제르딘도 아는 마당에 드러내도 되지 않나 싶지만 발레린은 왠지 모르게 부끄러웠다.

그때 커다란 종소리가 울렸다. 대신관 뒤에 서 있던 아이들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조화롭게 울렸다. 이미 대신관은 높은 단상 앞에 서 있었다. 그는 고개를 약간 든 채 발레린과 제르딘이 서 있는 곳을 보았다. 귀족들 또한 모두 일어나서 이곳을 보고 있었다.

쏟아지는 시선이 꽤 많았지만 이상하게 발레린은 그런 시선은 부끄럽지 않았다.

‘이상해. 왕자님의 시선만 이렇게 부끄러우니.’

그것도 제르딘이 이렇게 뚫어지게 쳐다볼 때 말이다. 그때 제르딘이 말했다.

“가도 되겠습니까?”

발레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제르딘은 발레린에게 팔을 내밀었다. 발레린은 천천히 제르딘의 팔에 자신의 팔을 걸쳤다. 그리고 제르딘이 한 걸음 내디뎠다. 발레린은 제르딘과 함께 붉은 카펫 위를 걸었다. 뒤이어 오는 아이들이 꽃가루를 뿌렸다.

발레린과 제르딘이 간 걸음 뒤에는 노란 꽃가루가 한가득했다. 귀족들은 모두 박수를 보냈다. 발레린은 이렇게 축하받는 자리가 새로우면서도 행복했다.

어렸을 때만 하더라도 하인부터 시작해서 친척까지 모두 무시하기 바빴다.

‘역시 오래 살고 볼 일이야.’

새삼 발레린은 희망을 가지고 기다리는 것이 얼마나 값진 일인지 깨달았다. 물론 그 전에 그 희망을 위해서 열심히 살았지만 말이다.

그때 제르딘이 멈춰 섰다. 발레린은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대신관 앞이었다. 대신관이 발레린에게 고개를 숙였다. 발레린도 인사하자 대신관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매시드 왕국은 예로부터 신의 영향력 아래에서 번영해 왔습니다. 그리고 오늘, 매시드 왕국의 가장 큰 경사인 왕자의 결혼식이 거행됨에 따라…….”

대신관의 말은 꽤 길었다. 발레린은 기분이 너무 좋은 나머지 결혼이라는 단어만 귀에 들어올 뿐 다른 말은 집중되지 않았다. 발레린은 마냥 미소를 지은 채 앞을 바라봤다.

그렇게 발레린이 멍하니 결혼만 생각하는 사이 제르딘이 발레린의 팔을 살짝 잡았다. 발레린이 놀라서 고개를 드니 제르딘은 몸을 돌려 발레린을 마주 보고 있었다. 발레린은 재빨리 제르딘과 같이 마주 보도록 몸을 돌렸다.

그러자 제르딘이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제르딘은 잠시 눈썹을 찌푸렸다가 발레린에게 말했다.

“원래 결혼식에서 하는 절차이니 놀랄 필요 없습니다.”

발레린이 대답하기도 전에 제르딘은 발레린의 방독면을 벗겼다. 순간 주변에 있던 귀족들이 놀라며 입을 막았다. 발레린은 차마 말은 하지 못하고 제르딘을 바라봤다. 그때 제르딘이 고개를 숙여 발레린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부드러운 입술이 마주 닿았다. 따뜻했다. 순간 발레린은 아무 생각도 나지 않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단지 눈앞의 제르딘만 보일 뿐이었다. 그때 그로프가 울었다.

“개꿀개꿀.”

그제야 발레린은 눈을 깜빡이며 주변을 둘러봤다. 귀족들도 놀란 것은 마찬가지였다. 모두들 넋이 나간 채로 이곳을 보았다. 대신관도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제르딘을 바라봤다.

발레린은 재빨리 제르딘이 들고 있는 방독면을 썼다. 그래도 발레린은 심장이 안정되지 않았다.

반면 제르딘은 놀란 기색도 없이 발레린을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발레린이 아무 말이 없자 그가 말했다.

“그렇게 놀라게 할 생각은 아니었습니다. 어차피 결혼식 절차이고 옛날부터 이어 오던 전통이니까요.”

제르딘의 말은 차분했지만 발레린은 차마 대답하지 못했다. 그저 숨만 내쉬고 있을 때 제르딘이 몸을 돌려 대신관을 쳐다봤다.

“저는 멀쩡하니 결혼식을 진행하시죠.”

대신관은 멍하니 있다가 이내 눈을 깜빡이며 기침을 했다. 그는 정신없이 단상을 뒤적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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