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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빛 저주의 공녀님-35화 (35/130)

35화

대신관의 표정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무언가 이해를 하지 못하는 듯하면서도 잔뜩 가라앉은 시선으로 기분 나쁘게 훑었다. 그사이 발레린은 웃음을 잃지 않고 대신관을 응시했다.

이윽고 대신관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사르티아 가문은 마테인 가문보다는 아니지만 그나마 명성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발레린 공녀는 이름…….”

“제 이름은 발레린 사르티아입니다.”

“이름을 물은 게 아닙니다.”

“그럼 뭘 물으신 건가요?”

발레린이 호기심 있게 묻자 대신관이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공녀가 생각보다 가문의 이름값을 하지 못한다고 말한 겁니다. 저주에 걸린 것도 모자라 이렇게 생각이 종잇장보다 얇으시니.”

대신관은 한심한 눈빛으로 혀를 찼다. 발레린은 대신관이 괜히 왕자를 욕보이는 말을 한 것 같아 재빨리 말했다.

“하지만 왕자님은 어느 누구보다 잘생기고 훌륭하신 분인걸요.”

대신관은 차마 말을 하지 못하고 어이없는 얼굴로 바라봤다. 발레린은 이 틈에라도 제르딘의 좋은 면모를 말할 셈으로 입을 열었다.

“지금까지 제가 왕궁에 있으면서 왕자님같이 똑똑한 분을 보지 못했어요. 그리고 왕자님은 누구보다 친절하시면서도 적절하게 거리를 두는 분이시고 또…….”

“그만하십시오. 제가 왕자님의 자랑을 들으려고 이곳에 앉아 있는 건 아닙니다.”

“그렇지만 제가 왕자님에게 한눈에 빠졌다고 하니 생각의 깊이가 종잇장이라고 말씀하셔서, 나름대로 일리가 있는 이유를 말한 것뿐인걸요.”

“일리 있는 이유라니요. 그저 잘생기고 똑똑하고 친절하면 사람들이 모두 좋아하기라도 한다는 겁니까?”

“좋아하지 않을 이유가 뭔가요. 다들 그런 면모를 보고 반하는걸요.”

발레린은 활짝 웃었다. 대신관은 눈썹을 찌푸리며 숨을 내쉬었다. 발레린은 마침 책에서 본 신관의 역사가 생각나 쉬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리고 대신전에서도 그런 이유로 사람에게 반해서 신관 최초로 결혼한 분도 있지 않나요?”

대신관의 얼굴이 굳었다.

“그건…….”

“이름이 아마 텔르트르 알렉트로스였을 거예요. 신망을 많이 받던 대신관이었지만 대신전에 기도하러 온 귀족을 보고 한눈에 반했었죠. 그분도 얼굴과 친절함, 명석함을 보고는 반했다고 책에서 봤어요.”

대신관은 그저 굳은 얼굴로 발레린을 쳐다봤다. 발레린은 싱긋 웃으며 대신관을 보다가 주변을 둘러봤다. 실제로 본 대신관의 방은 꽤 넓고 웅장했다.

“그나저나 책에서만 보다가 이렇게 실제로 보니 정말 다르긴 하네요.”

“…….”

대신관은 대답이 없었지만 발레린은 방의 벽장식을 유심히 바라봤다. 양각으로 표현한 잎 모양의 세공은 정밀하기 그지없었다.

“저 세공이 오백 년 된 장인의 세공이라는 작품이죠?”

대신관이 고개를 돌려서 확인했다. 그는 내키지 않았지만 진실이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훌륭하긴 해요. 그러고 보면 이렇게 훌륭한 작품이 보존될 수 있었던 것도 저희 사르티아 가문과 연관이 있지 않나요?”

“무슨 말씀입니까? 사르티아 가문은 대신전과 아무 연관이…….”

“아니에요. 제가 10번이나 완독한 『가장 유서 깊은 가문』에서는 사르티아 가문 사람이 130년 전에 이 신전을 착실하게 지켜서 이곳이 파괴되지 않았다고 나와 있어요. 안 그래도 저 양각 장식에 가문 이름이 작게 새겨져 있을 거예요.”

발레린이 가리키자 대신관은 하인에게 고갯짓을 했다.

“확인해 봐라.”

하인은 재빨리 벽장식 근처로 뛰어갔다. 하인이 이리저리 벽장식을 훑어보자 발레린은 도움이 될까 싶어서 외쳤다.

“거기서 조금 아래를 보시면 될 거예요.”

하인은 발레린의 말을 따라서 아래를 확인했다. 하인은 잠시 동안 가만히 있다가 이내 상체를 들었다.

“사르티아 가문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그게 무슨! 내가 여기에 얼마나 오랫동안 있었는데. 그걸 못 봤을 리가 없다!”

대신관은 급기야 일어나서 하인이 서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그는 상체를 숙여 하인이 보던 곳을 봤다. 눈썹을 찌푸리던 대신관이 한순간 표정을 굳혔다.

발레린은 그로프와 눈을 맞추며 미소를 지었다.

“개꿀개꿀.”

갑자기 울린 개구리 소리에 대신관이 상체를 번쩍 세웠다. 그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못마땅한 얼굴로 발레린에게 다가왔다.

“사르티아 가문이 직접적으로 이곳을 지켜 줬을 줄은 몰랐습니다.”

발레린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래도 저기에 쓰여 있기도 하고 『가장 유서 깊은 가문』에도 나와 있으니 다행이에요. 그나저나 정말 모르셨나요?”

발레린은 정말 궁금해서 물었으나 대신관의 얼굴은 대번에 붉게 변했다. 주변에 있던 하인들도 대신관의 얼굴을 살폈다. 그들의 행동은 무척이나 조심스러워 보였다.

발레린은 대신관의 얼굴 표정이 변하는 것이 흥미로워 유심히 쳐다봤다. 대신관은 당황한 듯했지만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도 이전에 읽었던 책이긴 하지만 요즘 다양한 책을 읽고 있어서 기억을 잠시 잊은 듯합니다.”

책이란 말에 발레린의 눈이 반짝거렸다.

“다양한 책이라면 어떤 책을 읽고 계신가요?”

“그냥 책을 읽고 있습니다.”

대신관은 여느 때보다 낮게 말했다. 발레린은 대신관이 어떤 책을 읽는지 궁금해서 끈질기게 물었다.

“어떤 책이요?”

대신관은 순간 눈썹을 찌푸렸으나 이내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신의 대답』이라는 책입니다.”

그 말에 발레린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책은 정말 명작이잖아요! 전 그 책을 13번이나 완독했어요! 제가 읽었던 책은 2쇄본이라 예전 용어도 많이 나와서 익숙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정말 재미있게 읽었어요.”

그 말에 대신관의 얼굴이 확 펴졌다.

“그 책을 13번이나 완독하셨다고요?”

“네! 신과 함께 나눈 대화를 엮은 책이잖아요. 누군가는 그 책을 거짓덩어리라고 주장한다고 서문에 나와 있긴 하지만 저는 그 책이 진실이라고 믿어요!”

발레린의 열성적인 대답에 대신관이 고개를 거세게 끄덕였다.

“맞습니다. 『신의 대답』이야말로 여태껏 나온 책 중에서 가장 공신력이 높은 책이죠. 요즘 신관 중에도 이 책을 읽지 않은 자가 많은데 공녀께서는 참으로 훌륭한 안목을 지니셨군요.”

“감사합니다. 대신관님.”

발레린은 활짝 웃었다. 대신관은 발레린에게 책에 관한 몇 가지를 말하면서 이것저것 의견을 물었다. 발레린은 친절히 대신관에게 대답하며 의견을 말했다. 그러자 대신관은 아까보다 얼굴이 더 환해졌다.

“역시 많이 완독하신 분은 다르군요. 이곳에 있는 신관보다 확실히 낫습니다.”

발레린은 뿌듯한 마음으로 미소를 지었다. 대신관은 발레린을 보다가 이내 차분히 말했다.

“아까 공녀가 종잇장보다 얇은 생각을 가졌다는 건 제가 공녀를 충분히 알지 못해서 한 말입니다. 이 부분은 사과하겠습니다.”

“아니에요. 저를 처음 보셨으니 제 방독면만 보고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어요. 다만 왕자님에 대한 생각은 바꿔 주셨으면 해요. 왕자님은 이 세상에서 가장 멋지신 분이거든요.”

대신관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여태껏 왕자가 제 어머니를 닮아서 심신이 미약한 것 같았는데 생각보다 배우자를 택하는 데 훌륭한 안목을 지닌 것 같습니다.”

옆에 있던 하인들이 놀란 얼굴을 지었다. 그들은 서로 눈치를 보며 대신관을 쳐다봤다. 반면 대신관은 발레린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왕자님과의 결혼을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발레린은 인사를 한 뒤 시계를 확인했다. 대신관과 이것저것 이야기를 하다 보니 시간이 꽤 많이 지나간 것이다. 심지어 아까 제르딘이 이곳을 나갔으니 그가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발레린은 급히 대신관에게 말했다.

“그럼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아무래도 시간이 많이 지나서요.”

“아쉽군요. 만약 여유가 있으시다면 가끔 대신관에 와 주세요. 『신의 대답』에 대해서 완벽히 이해한 사람은 공녀가 처음입니다.”

“네, 시간이 나면 가끔 올게요.”

“그럼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발레린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관은 그래도 아쉬운지 잠시 머뭇대다가 말했다.

“그럼 결혼식 때 다시 뵙겠습니다.”

발레린은 친절히 인사를 하곤 대신관의 방을 나섰다. 방을 나서자마자 제르딘의 보좌관이 다가왔다. 그는 발레린을 이리저리 살피며 걱정스레 물었다.

“공녀님, 괜찮으십니까?”

“뭐가요?”

“대신관님이 무작정 공녀님을 잡고 모진 말을 늘어놓지 않았을지 걱정이 되어서 그렇습니다. 아무래도 대신관님은 왕자님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으시니 공녀님을…….”

“아니에요! 오히려 정말 뜻깊은 대화를 나누었어요.”

그 말에 보좌관은 놀란 얼굴로 물었다.

“뜻깊은 대화요?”

“『신의 대답』에 대해 정말 깊은 대화를 나누었어요. 안 그래도 책을 읽은 뒤에 대화 나눌 사람이 없었는데 나름대로 즐거운 시간이었어요.”

그로프도 옆에서 개꿀개꿀 울며 말했다.

“맞습니다. 확실히 대신관이라서 책에 대한 이해가 다르긴 하더군요.”

발레린은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반면 보좌관은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얼굴로 멀뚱멀뚱 쳐다보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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