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발레린은 놀라며 눈을 동그랗게 떴지만 제르딘은 그저 발레린을 쳐다보기만 했다. 그의 눈빛은 꽤 자연스러웠다.
‘설마 내가 창문을 보고 있을 때 계속 지켜봤던 건가.’
발레린의 심장이 점차 뜀박질을 시작할 때였다. 제르딘이 고개를 살짝 기울인 채 물었다.
“가끔 궁금합니다.”
“뭐가요?”
“어떻게 공녀는 그렇게 마냥 즐거워할 수 있는지.”
“어차피 우울해해 봤자 바뀌는 것도 없는걸요. 어머니가 말씀하셨어요. 울어 봤자 네 편은 없겠지만 웃는다면 온 세상이 너를 밝게 볼 거라고요.”
발레린은 활짝 웃었다. 탑 안에서 우울한 생각이 들 때마다 발레린은 어머니의 말을 떠올리거나 여러 책을 읽으며 감정을 잊었다.
제르딘은 대답하지 않고 발레린을 쳐다보기만 했다. 그 시선에 발레린은 괜히 부끄러워져 시선을 살짝 내렸다. 그때 마차가 서서히 멈춰 섰다.
제르딘이 먼저 마차에서 내렸다. 발레린은 제르딘의 손을 잡은 채 마차에서 내렸다. 잠깐이었지만 마주 닿은 손은 무척이나 따뜻했다.
발레린은 마차에서 내려서자마자 주변을 둘러봤다. 대신전은 꽤 거대하고 위엄이 있었다. 주변에는 신관들이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중에서 가장 늙은 신관이 제르딘에게 다가왔다.
“대신관님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제르딘은 마차 안에서와 다르게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그는 옆에 있는 신관에게 고개를 살짝 돌리며 눈길만 내렸다.
“오늘도 기관지가 좋지 않아서 나오지 않은 건가?”
신관은 고개를 숙였다.
“용서해 주십시오. 대신관님께선 그다지 건강이 좋지 않으셔서…….”
제르딘은 신관의 말을 듣지 않고 먼저 움직였다. 발레린은 제르딘을 따라서 걸었다. 발레린의 걸음이 살짝 늦어지자 제르딘은 멈춰 섰다. 뒤에서 따라오던 신관과 그의 보좌관이 대번에 멈췄다.
제르딘은 아예 발레린에게 먼저 다가와 자신의 팔을 살짝 내렸다.
“제 팔을 잡으세요.”
“네?”
“이제 결혼할 사이이니 나란히 걷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발레린은 조심스럽게 제르딘의 팔을 잡았다. 제르딘은 고개를 들어 곧 앞으로 걸어갔다. 나란히 걷는 것도 심장이 미칠 듯이 뛰는데 제르딘의 팔을 잡으며 함께 걷고 있으니 발레린은 얼굴이 너무나 홧홧해서 더울 지경이었다.
그나마 방독면이 있어서 가려 주었지만 발레린의 얼굴에는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바로 옆에 있는 제르딘의 존재감을 느낄수록 마음속이 벅차오를 지경이었다.
그렇게 발레린이 행복하게 얼굴을 붉히고 있을 때, 제르딘이 멈춰 섰다.
신전을 상징하는 잎 모양의 세공이 무척이나 섬세하게 그려진 문이었다. 발레린이 감탄하며 보는 사이 문이 천천히 열렸다.
제르딘이 움직이자 발레린은 안으로 들어갔다. 안은 무척이나 넓었다. 천장까지 대리석으로 장식되어 있어서 신전의 위엄이 잘 느껴지는 동시에 따뜻함은 없었다.
“오셨습니까?”
나직하게 울리는 소리였다. 발레린이 고개를 돌리자 늙은 사람이 커다란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 옆으로는 흰 옷을 입은 신관들이 시중을 들고 있었다. 제르딘은 마침 하인이 안내한 자리에 앉았다.
발레린이 앉자 대신관이 발레린을 쳐다봤다. 제르딘은 자연스레 발레린을 소개했다.
“저와 곧 결혼할 사르티아 가문의 발레린입니다.”
대신관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사르티아 가문이라. 생각지도 못했던 가문이군요. 저는 배도스 공작이 추천한 마테인 가문과 맺어질 줄 알았더니.”
발레린은 생각지도 못한 사실에 제르딘을 쳐다봤다. 제르딘은 말없이 대신관을 보고 있었다. 제르딘이 시선을 돌리지 않자 대신관이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왕자님의 입장에선 마테인 가문이 더 낫지 않습니까?”
“사르티아 가문도 이 왕국을 위해서 헌신한 가문입니다.”
“그렇긴 하지만…….”
대신관은 발레린의 방독면을 기분 나쁜 눈빛으로 훑었다. 발레린은 밝은 얼굴로 대신관을 쳐다봤다. 이미 저런 시선을 숱하게 겪어서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대신관은 발레린과 눈이 마주치자 눈썹을 찌푸리며 시선을 돌렸다.
“저주를 받은 사람이 왕족과 엮일 줄은 몰랐습니다. 이곳은 무엇보다 신성한 사람만 들어올 수 있는데…….”
그때 제르딘이 말했다.
“저주를 받았다고 하지만 발레린 공녀는 누구보다 훌륭한 능력을 지닌 사람입니다.”
“능력이라고 하셨습니까?”
발레린은 순간 소리를 지를 뻔했다. 제르딘이 어머니처럼 능력이라고 말하다니. 너무나 벅차올라서 발레린은 순간 눈물이 나올 뻔했지만 겨우 참으며 제르딘을 바라봤다.
그때 대신관이 고개를 기울이며 헛웃음을 지었다. 제르딘은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발레린 공녀는 독이 들었는지 안 들었는지 냄새로 확인도 할 수 있을뿐더러 독을 먹어도 죽지 않죠.”
대신관은 굳은 얼굴로 제르딘을 쳐다봤다. 대신관이 입을 열지 않자 제르딘이 말했다.
“대신관님도 아시지 않습니까? 그동안 제 주변에 독으로 죽어 간 자가 많다는 걸요.”
“그렇긴 합니다만 그걸 단순히 능력으로 말하기에는…….”
“그게 능력이 아니라면 대신관님께선 어떤 걸 능력이라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단순히 물을 뿌리는 데 정화라고 이름만 붙이는 것이 능력인지 아니면 독으로도 죽지 않고 독을 구별하는 게 능력인지 말입니다.”
“왕자님, 말씀이 너무 심하지 않습니까? 단순히 물을 뿌리는 것을 정화라고 하다니요.”
“제가 여태껏 봐 온 대신전은 그렇습니다. 이전에 제가 신전에 방문했을 때 성수를 단순히 강에서 떠 와서 사용한다고 하더군요. 어떠한 의식을 치른 뒤에 정화한 물이 아니라.”
“그건…….”
“그동안 왕실에서 신전이 행하던 짓을 눈감아 줬던 것을 아십니까?”
대신관이 눈썹을 찌푸리며 제르딘을 쳐다봤다.
“감히 제게 협박하시는 겁니까?”
“협박은 아니고 사실을 말하는 겁니다. 대신전에서 매년 원로원 귀족과 배도스 공작으로부터 수많은 돈을 후원받고 있다는 걸 압니다. 물론 왕실의 돈도 말입니다.”
주먹을 쥔 대신관의 손이 떨렸다. 발레린은 호기심 넘치는 눈빛으로 대신관을 쳐다봤다. 그의 시선은 오로지 제르딘에게 향했는데 열이 뻗친 듯한 얼굴이었다.
발레린은 제르딘의 말에 그다지 놀라지는 않았다. 역대 역사서를 보면 신전은 왕실과 친한 전적이 없을 정도로 귀족들과 손을 맞잡은 비리의 온상지였다.
여러 귀족들에게 돈을 받는 대신 그들의 만행을 다 지워 준 것이다. 역사서에서만 보던 내용을 막상 이렇게 직접 들으니 발레린은 즐겁기까지 했다.
그때 제르딘이 말했다.
“제가 결혼하면서 왕실에서 지원하는 금액을 줄일까 합니다.”
대신관의 얼굴이 대번에 굳었다. 그는 제르딘을 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왕자님, 그러시면 귀족은 물론 이곳을 후원하는 일반 신자들도 반발이 심할 텐데요?”
제르딘이 미소를 지었다. 그는 대신관을 응시하며 천천히 말했다.
“그동안 왕실에서 신전에 기부한 것만으로도 저는 최선을 다했다고 봅니다. 그리고 신전에 기부하는 돈을 다른 곳에 훌륭하게 쓴다면 일반 신자들은 납득할 겁니다.”
“하지만 갑자기 바꾸면 반발이 심할 겁니다. 역대 왕과 다르게 너무나 파격적인 행보시니까요.”
“지금 저를 걱정하는 겁니까?”
제르딘은 무감하게 물었으나 대신관은 환하게 웃었다.
“걱정이라니요! 단지 왕자님께서 너무나 선조들과 다르셔서 놀라울 뿐입니다.”
“달라야 이전과 같이 무능한 왕이라는 말을 안 듣지 않겠습니까?”
제르딘은 묘한 미소를 지었다. 대신관은 큼큼 헛기침을 하며 눈썹을 찌푸렸다. 그가 시선을 피하는 사이 제르딘이 말을 이었다.
“대신관님께서 그동안 왕실에 충성을 보이지 않은 것은 사실입니다.”
“왕자님!”
“심지어 결혼한다고 직접 찾아왔는데도 어릴 때 제가 처음 이곳을 찾아왔을 때처럼 지병을 핑계로 마중하지 않으셨죠.”
“무슨 말을 하시는 겁니까?”
“대신관님은 제가 여전히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로 보이십니까?”
대신관은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다. 제르딘은 무감하게 쳐다봤지만 대신관은 입술을 움직거리며 주먹을 쥐었다.
“이 위대한 신전을 작작 폄하하십시오. 왕자님께서는…….”
그때 제르딘이 일어났다. 제르딘은 대신관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여태껏 왕실에서는 대신전의 행위를 기록하고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모두 바보는 아닙니다. 대신관이 그러면 그러는 대로 따르는 허수아비는 아니란 말입니다.”
“대체 그게 무슨…….”
“축하한다는 말은 들었다고 치겠습니다.”
제르딘은 고개를 숙이곤 의자를 벗어났다. 한순간 주변이 조용해졌다. 발레린은 이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예상조차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분명한 건 제르딘은 이미 이 방을 나갔다는 것이다. 발레린이 막 일어나려는 찰나였다.
“공녀는 무슨 생각으로 제르딘의 제안을 받아들인 겁니까?”
대신관이 발레린에게 물었다. 그는 아까보다는 감정을 정리한 듯 차분했다. 발레린은 생각하지 않고 말했다.
“왕자님을 보고 첫눈에 반해서요!”
대신관은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제정신입니까?”
“네, 여태껏 탑에서 살면서 왕자님 같은 분은 한 번도 보지 못한걸요. 제 천년의 이상형이에요.”
발레린은 활짝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