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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빛 저주의 공녀님-33화 (33/130)

33화

발레린은 움찔거리며 제르딘을 쳐다봤다. 제르딘은 멈칫하며 손을 뗐다.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발레린이 빠르게 말했지만 제르딘은 내색하지 않으며 차분히 말했다.

“마차에 타시죠.”

발레린은 기쁜 얼굴로 마차 안으로 들어갔다. 마차 안도 무척이나 화려하고 거대했다. 마침 제르딘이 타자 마차가 천천히 출발했다. 발레린은 여전히 주변을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이렇게 커다란 마차는 처음 타 봐요.”

그로프도 어깨 위에서 말했다.

“저도 이렇게까지 화려한 마차는 여태껏 보지 못했습니다.”

“책에서도 이렇게까지 화려하게 마차를 그리지 않았었는데…….”

여태껏 발레린이 읽은 책에서 이런 느낌의 마차는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발레린이 내내 고개를 올리며 감탄하는 사이 낮은 목소리가 울렸다.

“앞으로 많이 타게 될 겁니다.”

발레린은 기쁜 얼굴로 제르딘을 쳐다봤다. 제르딘은 그다지 기쁜 것 같지는 않았다. 그의 얼굴에는 표정이 없었다.

‘왕자님은 이런 마차를 많이 타 봐서 감흥이 없는 건가.’

발레린이 골똘히 생각하는 사이 그로프가 말했다.

“그런데 주인님, 제가 대신전에 가도 괜찮겠습니까?”

발레린은 그로프에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왜?”

“아까 주인님의 하녀가 말하기를 대신관은 무척이나 까다로운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발레린은 잠시 생각하다가 제르딘에게 물었다.

“왕자님, 그로프도 같이 가도 괜찮을까요?”

“대신관은 그다지 신경 쓰지 않을 겁니다. 어차피 그분의 눈에는 사람 외의 생물은 보이지 않을 테니까요.”

“사람밖에 보이지 않는다는 말씀인가요?”

“대신관에겐 그렇습니다. 사람도 그분의 눈에는 특히 돈이 많은 사람밖에 보이지 않죠.”

제르딘은 질린 듯 말했다. 왕실과 신전이 친하지 않다는 것은 역사책에서 구구절절 봤던 내용이라 발레린은 그다지 놀랍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대신관이 그런 사람인지는 예상치 못해서 발레린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발레린이 멀뚱멀뚱 제르딘을 보고 있자 그가 말했다.

“저도 굳이 신전에서 결혼식을 하고 싶지 않지만 옛날부터 왕실에서 이어 오던 예법이라 할 수 없습니다.”

제르딘은 무척이나 귀찮아 보였다. 그의 얼굴에는 권태와 짜증이 묻어 있었다.

“그래도 저는 이렇게 왕자님과 함께 마차에 타는 건 좋은걸요.”

발레린이 밝게 말하자 제르딘은 그녀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러고 보니 공녀와 함께 마차를 타는 건 두 번째군요.”

“기억하고 계시네요!”

“원래 저는 마차를 다른 사람과 같이 타지 않습니다.”

“왜요?”

“굳이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 않고, 늘 혼자가 편했습니다.”

“그럼 제가 이야기를 해도 괜찮은가요? 만약 너무 귀찮으시면 가만히 있을게요.”

“아닙니다.”

제르딘은 간단히 말했다. 그의 하늘빛 눈동자는 여느 때보다 단호했다. 발레린은 제르딘의 구체적인 심중을 알지 못해서 계속 제르딘을 쳐다봤다.

문득 제르딘과 첫 번째로 결혼할 뻔했던 사람이 궁금했다. 세드릭스 부인은 제르딘이 그다지 감정이 없었다고 했지만 발레린은 제르딘의 모든 것이 궁금했다.

“왕자님.”

창문을 보던 제르딘이 시선을 돌렸다. 발레린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궁금한 게 있는데 물어봐도 되나요?”

제르딘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적인 일이라서 불편하실 수도 있는데…….”

제르딘은 발레린을 표정 없이 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전에 제가 약혼했던 사람 때문입니까?”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주변에 났던 소문 중에서 공녀가 제일 궁금할 게 그거 아닙니까?”

발레린의 얼굴이 대번에 붉어졌다. 그나마 방독면으로 가려져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로프가 옆에서 개꿀개꿀 울었다. 발레린은 고개를 숙이려다 제르딘을 보며 물었다.

“그래서 그분은 어떤 분이셨나요?”

“왕궁과 잘 어울리는 분이었습니다. 말도 많지 않으면서 기품이 있고 조용한 사람이었습니다.”

“저와 반대되는 사람이네요.”

“하지만 그분은 독살되셨습니다.”

독살이라는 말에 발레린은 대번에 고개를 들었다.

“제가 듣기론 몸이 안 좋으셨다고 했는데…….”

“소문으론 그렇게 떠돌고 있을 겁니다. 하지만 진실은 독살입니다. 그 가문에서 도저히 독살로 인정하려 하지 않아 일부러 그렇게 소문이 퍼진 거기도 합니다.”

발레린은 차마 말이 나오지 않았다. 제르딘은 발레린을 보며 말을 이었다.

“그러고 보면 저와 엮인 사람들은 모두 독살로 죽었습니다.”

“…….”

“저와 가까이 있던 사람은 물론 제 편을 들어 준 사람들 모두.”

발레린은 마음이 좋지 않았다. 제르딘의 표정은 변화가 거의 없었지만 그의 말소리는 어딘가 공허함이 느껴지기도 했다.

발레린은 제르딘이 신경 쓰였다. 분명 배도스 공작의 짓이 틀림없었다. 여태껏 왕궁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리면 배도스 공작은 제르딘을 어떻게든 밟으려고 하는 것이 눈에 보였다.

제르딘이 직접 배도스 공작에 대해 이야기를 한 것만 해도 그렇다.

발레린은 지레짐작하며 물었다.

“설마 어렸을 때부터 배도스 공작이 그런 건가요?”

제르딘은 발레린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이전부터 그가 자주 그렇게 봐 오긴 했지만 발레린은 왠지 모르게 요즘은 특히 부끄러웠다. 심장이 전보다 콩닥콩닥 뛰기도 하고 그의 잘생긴 얼굴이 보고 있다고 생각하니 괜히 신경이 쓰이기도 했다.

그러나 한참을 기다려도 제르딘은 말이 없었다. 발레린은 괜히 불안해졌다. 다시 제르딘이 사적인 말을 거부하며 선을 그을 것 같아서였다.

그나마 아까는 제르딘이 직접 말을 하긴 했으나 발레린은 제르딘의 속마음을 쉽사리 짐작하지 못했다. 그는 늘 가까운 듯하면서도 멀리 있는 것처럼 느껴졌으니까.

발레린은 제르딘을 힐끗 엿보았다. 순간 눈이 마주쳤다. 발레린이 눈을 동그랗게 뜨자 그제야 제르딘이 입을 열었다.

“공녀, 방금 제게 한 질문이 뭐였습니까?”

발레린은 당황스러웠다. 한 번도 제르딘은 그녀의 질문을 잊은 적이 없었다.

‘대체 무슨 생각을 했을까.’

발레린은 제르딘이 내심 저를 보고 있었으니 자신을 생각했으면 했지만 제르딘에게 그다지 좋은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어쨌든 발레린은 제르딘이 물으니 빠르게 대답했다.

“어렸을 때부터 배도스 공작이 왕자님의 주변을 못살게 굴었는지 궁금해서요.”

제르딘은 잠시 가만히 있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머니가 많이 아프시기 시작할 때부터 제 옆에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떠나갔습니다.”

발레린은 그나마 제르딘이 대답을 해 주어서 다행이었다. 내심 다시 사적인 말을 한다고 선을 긋나 싶었지만 그는 그럴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어렸을 때 왕자님은 어떻게 견뎠을까.’

제르딘의 말을 들으니 발레린은 그에게 더 마음이 갔다. 오히려 이전보다 애정이 더 깊어지는 듯했다.

발레린이 차마 대답을 하지 못하고 바라보고 있자 제르딘이 말을 이었다.

“처음에는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떠나가니 슬펐습니다. 하지만 점점 그런 일이 잦아지다 보니 눈물이 나오지 않게 되었죠.”

“…….”

“오히려 가까이 있는 사람에겐 마음을 주지 말아야겠다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어차피 내 옆에 있다간 다들 죽을 테니 마음을 줘 봤자 슬픔만 깊어질 테니까요. 거기다 사랑에 무너져서 목숨까지 잃은 어머니를 보아 왔으니 더더욱 마음을 다스려야 했죠.”

발레린은 자신이 커 온 궁전을 질린 듯 보던 제르딘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면 발레린은 여태껏 지내온 탑이 지겹지는 않았다. 나름대로 그 삶 속에서 즐거운 기억도 꽤 많았기 때문이다.

발레린이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낮은 목소리가 울렸다.

“그래서 제가 공녀에게 기대하는 게 있습니다.”

뜻밖의 말에 발레린이 놀라며 물었다.

“기대요?”

제르딘이 고개를 끄덕였다.

“공녀는 제 옆에 있어도 쉽게 죽을 것 같지는 않거든요.”

발레린은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그로프도 어깨 위에서 개꿀개꿀 울었다. 제르딘은 그로프를 잠시 보다가 발레린을 응시했다. 그 시선은 은근히 짙었다.

“부디 배도스 공작이 몰락할 때까지 이 관계가 무너지지 않았으면 합니다.”

“물론이에요!”

발레린은 밝게 웃으며 제르딘을 보았다. 제르딘은 한참 동안 발레린의 얼굴을 쳐다봤다. 그의 시선은 특히 방독면에 있었다. 발레린은 혹시나 방독면이 삐뚤어졌나 싶어서 이리저리 만져 보았다.

그때 제르딘의 목소리가 울렸다.

“방독면은 답답하지 않으십니까?”

“답답하긴 해도 어쩔 수 없는걸요.”

“소란이 일겠지만 방독면을 벗을 방법은 있을 겁니다.”

“방법이요?”

제르딘은 고개를 끄덕였다. 발레린은 그가 더 말을 할 줄 알았지만 그는 대신전에 도착할 때까지 입을 열지 않았다.

발레린은 궁금하긴 했지만 더 캐묻지 않았다. 제르딘의 표정은 꽤 복잡해 보였다. 은근히 피곤해 보이기도 했고. 괜히 그를 귀찮게 하고 싶지 않아 그로프와 함께 창문 밖을 구경했다.

대신전은 외진 곳에 위치해 있어서 주변을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발레린은 기뻤다. 그러고 보면 탑 안에 갇힌 뒤 15년 만에 수도를 벗어나는 것이었다.

발레린은 한참 밖을 구경하다가 문득 고개를 돌렸다. 하늘빛 눈동자와 마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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