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초록빛 저주의 공녀님-32화 (32/130)

32화

“네, 그런데 이번에는 왕자님께서 조금 축소하셨어요. 되도록 축하 인사를 건네는 귀족들도 개인적으로 받으시고 피로연에서는 몇몇의 귀족들만 대표로 축사를 전한다고 해요.”

발레린은 약간은 아쉬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틀이라는 긴 시간이라도 제르딘의 옆에 있으면 지루하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발레린의 표정이 아까보다 약간 굳어 있자 루네스가 눈치 빠르게 물었다.

“혹시 마음에 안 드시는 점 있으세요?”

“아니, 왕자님이 그렇게 하신다는 건 다 이유가 있겠지.”

“그렇긴 해요. 그나마 줄어들긴 했지만 독살 사건을 염려하셨나 봐요. 괜히 오래 해 봤자 위험할 일이 생길 가능성도 높아지니 최대한 간소하고 빠르게 진행하는 게 맞을 것 같기도 해요.”

발레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듣고 보니 그럴듯했다. 옆에 있던 그로프도 발레린에게 속삭였다.

“오히려 주인님의 결혼식에 안 좋은 말이 나와 봤자 좋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러니 무슨 일이 생기기 전에 빠르게 결혼식을 마무리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합니다.”

발레린은 그로프의 말에 동의하며 미소를 지었다. 루네스는 다시 수첩을 뒤적거렸다. 마침 할 말을 찾았는지 루네스가 활기차게 말했다.

“마지막으로 배도스 공작은 아직 별 움직임은 없는 것 같아요. 심지어 원로원 귀족들은 오히려 공녀님의 결혼식을 은근히 축하하는 분위기였어요.”

“축하한다고?”

“제 생각에는 세드릭스 부인께서 많이 힘을 쓰신 것 같아요. 원로원 귀족 중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는 분이 세드릭스 공작이거든요.”

발레린은 새삼 세드릭스 부인이 한 말이 떠올렸다. 소문에 대해선 그다지 걱정하지 말라 하며 했던 말이었다.

“세드릭스 부인께서 나를 좋게 봐주신 것 같아.”

루네스는 놀란 얼굴로 발레린을 쳐다봤다. 발레린은 빙긋 웃으며 말했다.

“내가 여태껏 어떻게 살았는지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까 부인께선 나를 꽤 잘 봐주신 것 같았거든.”

“의외네요. 세드릭스 부인은 원래 소문에 엄청 민감하신 분이거든요. 그래서 저는 세드릭스 부인이 공녀님을 그다지 좋게 볼 것 같지는 않았는데…… 그나마 다행이에요.”

루네스는 차분히 말을 끝냈지만 눈빛만은 반짝반짝 빛났다. 발레린이 미소를 지으며 보자 루네스가 서둘러 말했다.

“그나저나 정말 대단하세요. 세드릭스 부인의 마음을 돌리기가 엄청 힘들다고 들었거든요. 그분께선 워낙 사교계의 거물이라서요.”

“그래도 그분은 나름대로 인정이 있는 분이셨어. 내가 살았던 삶에 대해서 많이 생각해 주시기도 했고.”

세드릭스 부인을 만나서 즐거웠던 이유는 여태껏 살아왔던 삶에 대해서 잘 들어 주었기 때문이었다. 안 그래도 그동안 말할 상대가 없었기에 발레린은 자신의 말을 끝까지 들어 주었다는 점에서도 고마웠다.

루네스는 내내 감탄 어린 시선으로 보다가 이내 주변을 둘러봤다. 그녀는 시계를 확인하고는 곧바로 말했다.

“공녀님, 그럼 저는 드레스가 멀쩡히 있는지 확인하고 올게요.”

발레린이 고개를 끄덕이자 루네스는 빠르게 방을 나갔다. 열어 놓은 창문 사이로 부드러운 바람이 들어왔다. 발레린은 상쾌한 기분으로 바람을 들이마셨다.

몇 분 뒤, 하인들이 우르르 발레린의 방으로 들어왔다. 발레린은 하인들에게 둘러싸여 드레스를 입고 머리를 단장했다.

여러 하인들이 방독면을 썼지만 발레린은 말을 꺼내지 않고 입을 꾹 다물었다. 옆에서 그로프가 개꿀개꿀 울면 간간이 미소를 지었으나 입은 절대 열지 않았다.

입을 잘못 열었다간 독기가 뿜어져 나갈 테고, 하인들은 방독면을 썼더라도 놀라는 게 당연할 것이다.

지금도 하인 한 명은 발레린의 볼을 톡톡 두드리며 단장하면서도 손을 벌벌 떨고 있었다.

06. 설레는 결혼

발레린이 살짝 올려다보자 하인은 놀란 얼굴로 손을 멈칫했다. 그러면서 하인의 손이 발레린의 볼을 툭 눌렀다.

“죄, 죄송합니다.”

하인은 빠르게 물러나며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손은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발레린은 차마 말은 하지 못했지만 미소를 지었다. 하인이 살짝 시선을 올렸다. 눈이 마주치자 하인은 깜짝 놀라며 눈을 깜빡거렸다.

그때 루네스가 끼어들었다. 그녀는 하인에게 지시했다.

“너는 다른 방에서 드레스를 정리해.”

지시받은 하인은 황급히 고개를 숙인 뒤 방을 나갔다. 루네스는 발레린에게 고개를 숙였다.

“공녀님, 죄송합니다. 제가 최대한 공녀님을 무서워하지 않는 사람으로 추려서 왔는데…….”

발레린은 말을 하지 못해 답답한 나머지 방독면을 썼다.

하인들이 놀라며 뒤로 살짝 물러났지만 발레린은 개의치 않고 말했다.

“괜찮아. 내 독기 때문에 무서워하는 게 당연해.”

발레린은 주변을 둘러봤다. 하인들은 고개를 숙이고 있었지만 은근히 겁에 질린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발레린은 그들에게 부드럽게 말했다.

“난 입만 열지 않으면 괜찮으니까 그렇게 무서워할 필요 없어. 거기다 방독면을 쓰면 독기는 통하지 않으니까 안심해도 되고.”

하인들은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였다. 발레린은 남들이 자신을 무서워할 때마다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하지만 만날 때마다 방독면을 쓰는 사람들을 보며 자신 때문에 사람들이 불편해하는 것 같아 마음이 좋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발레린은 미소를 지었다. 상황은 어쩔 수 없었다. 저주의 이유도 모르니 풀 방도도 없었고 풀리지 않는 의문을 가지고 우울하게 있어 봤자 기분만 더 가라앉을 뿐이었다.

발레린은 금방 기분을 풀고는 방독면을 벗었다.

하인들은 다시 발레린의 얼굴을 단장하기 시작했다. 발레린은 거울을 쳐다봤다. 입꼬리를 올리고 있는 얼굴과 함께 여러 사람이 방독면을 쓴 채 발레린의 얼굴을 바쁘게 단장하는 모습이 보였다.

발레린은 문득 자신이 말을 해도 사람이 죽지 않는 장면을 떠올렸다. 그렇게 된다면 하인들은 굳이 방독면을 낀 채 발레린을 맞이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내 입김 때문에 사람이 죽지 않는다면 좋을 텐데.’

완전히 저주를 풀 수 없다면 그 저주라도 풀리면 좋을 것 같았다. 발레린은 그래도 희망을 간직한 채 미소를 지었다. 희망을 잃지 않고 인내심을 가진다면 탑을 탈출한 것처럼 그 일이 이루어질지도 모른다.

발레린은 마음속으로 그날이 오기를 간절히 빌었다.

그렇게 발레린이 마음속으로 희망을 간직할 때 하인들이 서서히 물러났다. 루네스가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공녀님, 다 되었습니다.”

마침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하인이 급하게 문을 열자 보좌관이 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발레린에게 인사를 한 뒤 바쁘게 말했다.

“공녀님, 지금 왕자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벌써요?”

“대신전의 대신관을 함께 만나야 해서요.”

“저도 이제 곧 나가면 돼요.”

보좌관은 기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그럼 저는 먼저 내려가 있겠습니다.”

발레린은 그로프를 어깨에 올린 뒤 루네스와 함께 방을 나섰다. 루네스는 옆에서 종알종알 말했다.

“왕자님도 곁에 계실 테니 공녀님은 그다지 말씀을 많이 하지 않으셔도 될 거예요. 그리고 대신관님은 꽤 까다로운 분이라 웬만하면 말을 섞지 않는 게 좋을 것 같기도 하고요.”

“그만큼 까다로운 분이야?”

“제가 여기저기 소문을 조사해 봤는데요, 주변 신관들도 대신관을 만나는 것을 가장 싫어할 정도로 성격이 안 좋으신 분 같았어요.”

발레린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옆에서 루네스가 아무리 말해도 발레린은 그다지 불안하지 않았다. 그러고 보면 오늘은 결혼식이었다.

발레린은 계단을 내려가면서 기분이 점점 하늘을 치솟는 듯했다. 그래서 웬만하면 기분이 가라앉지도 않았다.

발레린이 중앙 홀로 들어서자 제르딘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까만 정복을 입고 있었는데 누구보다 눈에 띄었다. 특히 제복에 주렁주렁 달려 있는 황금빛 브로치는 절로 위엄이 느껴졌고 몸에 딱 맞는 제복이기에 그의 몸매가 한층 더 드러나 보였다.

그는 은근히 뼈대가 있었기에 넓은 어깨가 더 강조되었고 큰 키가 더욱 돋보였다. 거기다 그의 외모는 말할 것도 없었다.

가볍게 쓸어 넘긴 금발은 함부로 다가갈 수 없는 차가움과 함께 깔끔함이 느껴졌다. 그의 얼굴은 피곤한 기색이 전혀 묻어 있지 않은 데다 단정하고 조화로웠다.

특히 짙은 눈썹 아래 시원스레 뻗은 눈매에 하늘빛 눈동자는 그의 외모를 더욱 고고한 분위기로 만들어 주었다. 거기다 입꼬리가 돋보이는 입술은 은근히 붉은 기가 있어서 눈에 띄었다.

발레린의 얼굴은 저도 모르는 사이 활짝 펴졌다. 제르딘도 발레린을 보았는지 그녀에게 다가왔다. 발레린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예법에 맞게 인사를 했다.

제르딘은 물끄러미 발레린을 보다가 말했다.

“대신관이 아주 좋아할 것 같습니다.”

“대신관님이요?”

“그분은 공녀와 같이 예의에 매우 엄격한 분이거든요.”

발레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왕자와 함께 궁을 나섰다. 궁 밖에는 여러 기사와 함께 커다란 마차가 서 있었다. 발레린이 입을 다물지 못한 채 보고 있자 제르딘이 발레린의 팔을 살짝 잡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