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역사책을 보면 대개 배도스 공작 같은 사람은 쉽게 뜻을 굽히는 사람이 아니었다.
발레린이 멀뚱히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루네스가 다가왔다.
“그럼 공녀님, 저는 나가 보겠습니다.”
“잠깐만, 루네스.”
루네스가 막 돌아봤다.
“할 말이 있어서.”
그 말이 끝나자마자 루네스는 황급히 발레린에게 다가왔다.
“혹시 배도스 공작에 대해서 알아?”
“배도스 공작님이요?”
“응, 예전에 그분이 나와 왕자님과의 결혼을 꽤 반대했었거든. 그래서 지금은 어떤지 궁금해서.”
발레린은 루네스를 어느 정도 믿지만 배도스 공작에 대한 것은 쉽사리 믿을 수 없었다. 그로프에겐 지켜본다고 했지만 역사책에서 본 왕궁은 철저히 권력이 강한 사람들 편으로 움직였다.
지금 제르딘과 비슷하게 권력을 쥔 사람은 배도스 공작이었다.
루네스는 잠시 주변을 둘러봤다. 이미 다른 하인은 꽃을 모두 치워서 나간 뒤였다. 그녀는 사람이 더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발레린에게 나직이 속삭였다.
“배도스 공작님은 지금 딱히 일을 꾸미고 있지 않으세요.”
“일을 꾸미고 있지 않다고?”
“네, 제가 헤르틴 하녀장에게 당한 후로 생각해 봤는데 왠지 모르게 그 배후에 누군가 있는 것 같더라고요. 심지어 헤르틴 하녀장은 독살로 죽었다면서요?”
발레린이 고개를 끄덕이자 루네스는 빠르게 말을 이었다.
“안 그래도 독살이 득실대는 왕궁에서 저까지 독살로 죽을 뻔했으니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겠더라고요.”
루네스의 눈빛은 여느 때보다 반짝였다. 발레린이 집중하며 듣고 있자 루네스가 말했다.
“그래서 가만히 생각해 봤는데 왠지 제가 죽을 뻔했던 배후에는 배도스 공작이 있는 것 같았어요.”
“그걸 어떻게 확신해?”
“저는 이미 공녀님의 전용 하녀로 지목되었고 저를 죽이려는 사람은 결국 공녀님을 위협하는 인물일 테니 최종적으로는 왕자님을 싫어하시는 분 아니겠어요?”
발레린은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르프도 루네스의 말이 흥미로운지 개꿀개꿀하며 울면서 루네스를 쳐다봤다.
루네스는 빠르게 말을 이었다.
“그리고 심지어 왕궁에는 왕자님께서 너무 나약하신 나머지 공녀님을 끌어들였고 결국 공녀님이 이 왕궁을 차지하려는 속셈이라는 소문까지 있어서 더 화가 나요. 저는 누구보다 공녀님이 왕자님을 생각하신다고 느끼거든요.”
“내 진심을 알아줘서 고마워, 루네스.”
“뭘요, 저는 제가 살면서 공녀님 같은 사람은 보지 못했어요. 심지어 제가 그렇게 누워 있으면 불길하다고 지나칠 만한데 저를 살려 주셨으니까요.”
발레린이 빙긋 웃자 루네스는 발레린의 손을 덥석 잡았다.
“그러니까 제가 공녀님을 지켜 드릴게요! 어쨌든 저는 공녀님 덕분에 산 생명이니까요.”
“고마워, 루네스.”
발레린은 진심으로 감동했다. 누군가 자신을 이렇게까지 지켜 준다고 하니 벅찬 마음마저 들었다. 그때 그로프가 말했다.
“저도 주인님을 끝까지 지키겠습니다.”
발레린은 행복한 마음으로 그로프를 바라봤다. 그로프는 발레린의 곁으로 와서 몸을 살짝 기댔다.
“어쨌든 요즘 저도 배도스 공작님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어요. 이상하게 원로원 귀족들은 공녀님에 대해서 별말은 하지 않더라고요.”
“별말을 하지 않는다고?”
“네, 그러고 보니 세드릭스 부인이 이곳에 왔다 간 이후로 원로원 귀족들이 공녀님에 대해서 말하는 건 한 번도 들은 적 없어요. 원래 같으면 공녀님에 대한 안 좋은 말을 복도에서 지나다니다가 한마디씩 했거든요.”
발레린은 안 좋은 말이라는 소리에 그다지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어렸을 때부터 이미 단련된 것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루네스는 미안한지 발레린에게 조심스레 말했다.
“공녀님, 그동안 소문에 대해서 말씀드리지 않았던 것은 죄송해요. 어쨌든 안 좋은 소문이기도 하고 괜히 말씀드려 봤자 공녀님 속만 탈 것 같아서요.”
“괜찮아. 어차피 난 안 좋은 말을 들어도 별스럽지도 않은걸.”
만약 제르딘이 그런 말을 했다면 하루 종일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겠지만 남들이야 그런 말을 하든지 말든지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루네스는 여전히 조심스러운 태도로 물었다.
“정말 괜찮으세요?”
발레린은 밝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괜찮아!”
루네스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고는 미소를 지었다.
“다행이에요. 안 그래도 마음이 쓰이긴 했거든요. 공녀님 주변에 소문이 돌고 있긴 했지만 그걸 다 말할 수는 없고, 말을 하지 않기에는 공녀님도 아셔야 할 것 같기도 해서요.”
“난 정말 아무렇지 않으니 앞으론 안 좋은 소문이라도 다 말해 줘.”
“괜찮으시겠어요?”
“응, 예전부터 나에 대해 안 좋은 말을 들었으니 이젠 면역이 되었어. 그리고 오히려 안 좋은 소문이 더 재미있지 않아?”
루네스는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재미요?”
“좋은 소문보다는 더 자극적이잖아.”
발레린은 빙긋 웃었다. 탑 안에서 살 때는 그런 소문조차 듣지 못했다. 하지만 나쁜 소문이라는 것은 나름대로 은근하게 머릿속을 자극하는 맛이 있었다.
루네스는 잠시 놀라긴 했으나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긴 해요. 그래서 그런 소문이 더 오래 떠도는 것 같아요. 어쨌든 자극적이긴 하니까요.”
발레린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루네스가 빠르게 말했다.
“하지만 공녀님, 제가 최대한 공녀님에게 좋은 소문만 나도록 보필할게요!”
루네스의 눈빛은 너무나 적극적이었다. 발레린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루네스는 그렇게 방을 한 번 더 둘러본 뒤 물었다.
“더 필요한 건 없으시죠?”
발레린이 고개를 끄덕이자 루네스가 친절히 말했다.
“그럼 저는 나가 볼게요. 그리고 배도스 공작님에 대한 소문이나 무슨 일이 있으면 곧바로 알려 드릴게요!”
“고마워, 루네스.”
“뭘요, 공녀님을 보필하는 사람으로서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인걸요!”
루네스는 활짝 웃으며 인사를 한 뒤 방을 나갔다. 곧 문이 닫히고 조용한 분위기가 흘렀다. 그로프는 묵묵한 공기 속에서 나직이 말했다.
“루네스는 믿을 만한 사람인 것 같습니다.”
발레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 생각도 그래. 이곳에서 일을 잘해서 내 전용 하녀로 뽑힌 건 거짓말은 아닌 것 같아.”
그로프도 동의하듯 울었다.
“개꿀개꿀.”
발레린은 누가 깨우지 않았는데도 눈을 번쩍 떴다. 곧바로 날짜를 확인했다. 5월 13일. 다름 아닌 결혼식 날짜였다. 그동안 발레린은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온갖 선택을 했었다. 대신전을 장식하는 천에서부터 꽃, 음식 그리고 드레스까지.
그 모든 선택의 결과가 오늘이었다. 발레린은 눈을 비빈 뒤 시간을 확인했다. 새벽 5시였다. 생각보다 이른 기상이었지만 발레린은 개의치 않고 침대에서 펄쩍 뛰어내렸다.
그리고 늘 하던 것처럼 먼저 창문을 열고 운동을 시작했다. 그로프도 마침 일어났는지 눈을 떠서 발레린을 구경했다.
“그로프! 오늘 드디어 왕자님과 결혼하는 날이야!”
“개꿀개꿀.”
발레린은 빙긋 웃고는 저 멀리 창문 너머를 바라보았다. 맑은 날씨였다. 발레린은 해가 떠오르는 먼 산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날씨도 좋아서 오늘 결혼식은 완벽할 것 같아.”
“주인님께 가장 소중한 날이니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할 겁니다.”
“그렇겠지?”
“물론입니다.”
발레린은 활기차게 운동을 하다가 이내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만약 어머니가 지금 살아 계셨다면 좋았을 텐데.”
“하늘 위에서 잘 보고 계실 겁니다.”
발레린은 빠르게 창문가에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푸른 하늘 위는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발레린은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래도 해인저 모녀의 최종 재판일이 결혼식 후이고 가장 혹독한 벌을 준다고 하니 걱정은 없어. 어머니가 이 모습을 보지 못하는 게 아쉽긴 하지만.”
그래도 발레린은 활짝 웃으며 하늘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평소 아침과 달리 이르게 울리는 소리였다.
발레린은 창문가에 돌아서서 말했다.
“들어와.”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루네스였다. 루네스는 발레린을 보자마자 깜짝 놀랐다.
“벌써 일어나셨네요!”
“오늘은 특별한 날이잖아.”
발레린이 빙긋 웃자 루네스도 미소를 지었다.
“그렇긴 해요. 그래서 제가 오늘 유독 서두른 거기도 하고요. 그나저나 오늘 공녀님 많이 바쁘실 거예요.”
루네스는 수첩부터 꺼내 들었다. 그녀는 발레린에게 가까이 와서 수첩에 적힌 내용을 읽었다.
“본식은 오후 1시부터 시작이고요, 그전에 왕자님과 함께 대신전에서 대신관을 만나셔서 먼저 인사드려야 해요. 그리고 본식을 마친 뒤에는 피로연이 있는데 왕자님의 궁 정원에서 열려요.”
발레린은 밝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루네스의 말을 들었다. 루네스는 잠시 숨을 쉰 뒤 말을 이었다.
“피로연에서는 원로원 귀족부터 시작해서 여러 명망 있는 가문의 귀족들이 많이 참석할 거예요. 그리고 다들 한 마디씩 할 텐데 꽤 지루한 시간이 되실 것 같기도 해요. 제가 전에 역대 왕의 결혼식을 찾아봤는데 축사도 엄청 길고 피로연 시간도 엄청 길더라고요.”
“몇 시간인데?”
“이틀이에요.”
“이틀?”
발레린의 눈이 저절로 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