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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빛 저주의 공녀님-30화 (30/130)

30화

제르딘은 발레린을 물끄러미 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주로 피가 섞인 고기를 먹습니다.”

“그러면 그동안 저와 함께 드셨던 건 모두 저를 위해서였나요?”

“공녀를 위해서이기보다는 제가 내키지 않았습니다. 이 모든 사실을 공녀에게 말해도 될지 확신이 서지 않아서 그렇게 행동했던 것뿐입니다.”

명쾌한 제르딘의 말에 발레린은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마 발레린이 안도한 점은 이제 제르딘이 자신을 믿어 준다는 점이었다.

“그럼 이제 왕자님은 저를 완전히 믿는다는 말씀이시죠?”

발레린은 한번 다시 확인하고 싶었다. 제르딘은 발레린의 눈동자를 잠시 바라봤다. 그의 하늘빛 눈동자는 무감한 빛을 띠었지만 발레린은 내심 기대를 했다.

발레린이 한참 보자 제르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마자 발레린은 빠르게 대답했다.

“저도 왕자님을 믿어요!”

“저를 믿는다는 건 무슨 뜻입니까?”

“왕자님이 이 왕국의 왕이 되실 것을요!”

제르딘의 하늘빛 눈동자가 미묘하게 번뜩였다. 발레린이 멍하니 제르딘을 보고 있을 때 그가 말했다.

“제가 잡종 피라도 말입니까?”

“잡종 피라니요! 왕자님은 누구보다 고결한 왕족이신데요!”

“왕족이라도 내 편이 없으면 묻히고, 황금 마검으로 왕위를 입증할 수 없으면 허수아비에 불과합니다.”

“그럼 황금 마검을 찾지 않으면 정말 왕이 될 수 없나요?”

“지금으로선 그렇습니다. 피 검사를 하면 저는 이 자리에서 내려와야 하니까요.”

“하지만 왕자님은 지금 어느 누구보다 매시드 왕국의 왕에 잘 어울리는 분이잖아요.”

“…….”

“왕자님 같은 분은 한 번도 본 적 없어요. 그나마 동화책에서 보긴 했지만 살아 움직이는 지금의 왕자님보다 못하고…….”

“그렇게 동화책을 믿습니까? 동화책에는 현실도 없을 텐데.”

“그래도 희망이 있으니까요. 탑 안에 있을 때 어머니의 말 다음으로 동화책을 좋아했어요. 동화책에는 늘 잘 될 거라는 희망이 있었거든요.”

그때 그로프가 울었다.

“개꿀개꿀.”

발레린은 미소를 지으며 그로프와 눈을 맞췄다.

“저는 늘 주인님의 말에 동감합니다. 희망이야말로 주인님을 지켜 준 것 아닙니까?”

발레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제르딘을 보며 말을 이었다.

“그로프 말대로 저는 희망이 없었으면 탑 안에서 15년 동안 기다리지도 못했을 거예요. 그저 잘 될 거라는 희망을 가지고 기다렸던 거죠.”

“하지만 마냥 좋은 미래를 기다렸다가 뒤통수를 맞을 수 있지 않습니까?”

“…….”

“그것도 준비를 철저히 했는데 말입니다.”

제르딘의 말은 꽤 낮았다. 쳐다보는 눈빛도 단단한 의지가 보이는 눈빛이었지만 묘하게 삐뚤어져 보였다. 발레린은 잠시 생각하다가 차분히 말했다.

“하지만 멀리서 보면 제대로 가는 길이라고 생각해요. 그렇게 뒤통수를 맞아도 그 계기로 더 철저히 앞으로 갈 수도 있는 거죠.”

제르딘은 헛웃음을 지었다. 발레린은 그 웃음이 거슬렸지만 그래도 말을 이었다.

“역사책에선 늘 그런 식이었거든요. 한순간 잘못된 방향으로 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래도 지나고 보면 오히려 바로서는 계기가 되기도 하니까요.”

발레린은 힐끗 제르딘을 쳐다봤다. 그는 와인 잔을 보고 있었다. 여느 때보다 침착해 보이면서도 모든 삶에 환멸을 느끼는 것처럼 무료해 보이기도 했다.

발레린은 늘 머릿속으로 생각하던 말을 꺼냈다.

“저는 왕자님이 누구보다 제대로 된 길을 가신다고 생각해요. 누군가는 늑대 수인의 피가 섞였다고 해서 좋게 보지 않을 거지만 그래도 저는 이 매시드 왕국이 가장 필요로 하는 사람은 왕자님이라고 믿어요.”

“저를 단순히 좋아해서 그렇게 말하는 것 아닙니까?”

“아니요! 그건 아니에요.”

제르딘은 발레린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발레린은 뒤늦게 말을 덧붙였다.

“물론 그런 부분도 있긴 하지만 그래도 여태껏 제가 봐 온 왕자님은 배도스 공작보다는 나은 사람이에요. 만약 배도스 공작 같은 사람이 왕이 된다면 이 왕국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망할 거예요.”

제르딘은 대답하지 않고 발레린을 보기만 했다. 묘하게 그의 시선은 화가 난 듯하면서도 차분했다. 발레린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을 이었다.

“배도스 공작은 늘 사람을 죽이잖아요. 하지만 왕자님은 그러진 않잖아요. 마음에 들지 않아도 늘 논리 정연하게 상황을 정리하시고 오히려 앞으로 나아가시죠.”

“…….”

“그리고 누구보다 사람을 생각하시잖아요. 왕자님께서는 저를 생각해서 결혼 후에는 한방을 쓰는 것도 고려하셨고요. 예전에는 저에게 이렇게까지 관심을 기울여 주고 생각해 준 사람이 없었어요. 모두 제가 독으로 죽기를 원했으니까요.”

그때 그로프가 발레린의 손 위로 툭 올라왔다. 발레린이 시선을 내리자 그로프가 나직이 내뱉었다.

“주인님, 사람은 주인님을 버려도 저는 주인님을 버리지 않을 겁니다. 저는 주인님만 생각하는 디디카 호수의 독 개구리니까요.”

발레린은 싱긋 웃으며 그로프에게 말했다.

“고마워, 그로프.”

그로프는 기쁜 듯 울었다.

“개꿀개꿀.”

제르딘은 발레린을 물끄러미 보다가 말했다.

“공녀는 제가 예상하지 못하는 말만 하는 것 같습니다.”

발레린은 그 말이 칭찬인지 비꼬는 말인지 쉽사리 짐작이 가지 않았다. 그의 얼굴도 말 그대로 무표정했다. 그럼에도 발레린은 기분이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

그때 제르딘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발레린이 고개를 들자 그는 고개를 살짝 숙이곤 말했다.

“그럼 결혼식 때 뵙겠습니다.”

발레린이 대답도 하기 전에 제르딘은 정찬실을 나갔다.

“결혼식 때 뵙겠다는 건…….”

“지금 이후부터는 같이 음식을 먹지 않겠다는 말 아닙니까?”

발레린은 고개를 내려 그로프와 눈을 맞췄다.

“그렇지? 그 말인 거지?”

그로프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런 것 같습니다.”

발레린은 시무룩한 얼굴로 아직 많이 남은 음식을 보았다. 전에도 제르딘이 이렇게 간 적이 있었다.

제르딘은 가까운 것 같으면서도 먼 존재 같았다. 어느 순간에는 그가 한없이 가까워 보이다가도 어떨 땐 그가 한없이 멀어 보였다. 지금은 그가 너무도 멀어 보였다.

결혼식 준비는 착착 진행되었다. 발레린은 이것저것 선택을 하는 것임에도 매우 바빴다. 어떤 날은 발레린의 넓은 방에 꽃이 한가득 들어와서 선택하는 날도 있었다. 식장의 장식을 위해 주로 쓸 꽃을 선택하는 자리였다.

그날도 루네스는 수첩을 든 채 물었다.

“공녀님, 무슨 꽃을 선택하시겠어요?”

발레린은 그중에서 노란 장미와 노란 튤립을 선택했다. 노란 장미는 초록빛 잎과 노란 꽃이 무척이나 잘 어울려서 눈에 확 들어왔다. 거기다 노란 튤립은 발레린의 숨결에도 시들지 않는 꽃이었다.

발레린은 침대 협탁에 있는 노란 튤립을 보았다. 노란 튤립은 아직도 생생히 살아 있었다.

발레린이 더 선택하지 않자 루네스는 놀라며 물었다.

“보랏빛 나팔꽃은 선택하지 않으시고요?”

“나팔꽃은 아무래도 내가 입을 드레스와 겹칠 것 같아서. 그리고 노란 튤립을 좋아하기도 하고. 최근에는 이곳에서 보이는 노란 장미가 눈에 들어와서 노란 장미도 선택한 거야.”

발레린이 주절주절 말하자 루네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수첩에 적어 갔다. 발레린은 루네스가 적는 수첩을 살짝 엿보았다. 수첩 안에는 깨알 같은 글씨가 가득했는데 대다수 발레린이 한 말이 적혀 있었다.

생각보다 루네스는 일을 철저히 하고 있었다. 새삼 발레린은 루네스가 일을 잘해서 이곳에 뽑혔다는 말이 거짓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로프도 루네스가 열심히 수첩에 적는 것을 보며 나직이 속삭였다.

“어떻게 보면 공녀님보다 결혼식에 더 진심인 것 같습니다.”

발레린도 작게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심지어 발레린은 그저 선택만 하는 것임에도 너무 바쁜데 루네스는 이 모든 것을 다 하나씩 보고 추려서 가져온다는 것이 놀라울 정도였다.

문득 발레린은 루네스가 너무 고생을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루네스, 넌 요즘 잠은 자니?”

루네스는 수첩을 쓰다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네?”

“요즘 너무 열심히 일을 하는 것 같아서.”

“아니에요! 원래 제가 하는 일이에요. 그리고 제가 이런 일을 좋아하기도 하고요. 만약 공녀님이 아니었다면 전 이렇게 살아서 일도 하지 못했겠죠.”

루네스는 활짝 웃었다. 그러고 보면 루네스는 일을 하는 것이 무척이나 즐거워 보였다. 항상 그녀의 얼굴은 발레린과 비슷하게 웃는 얼굴이었다.

루네스는 여전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혹시 더 필요하신 것은 없으세요?”

발레린은 고개를 내저었다. 루네스는 주변에 있는 하인에게 지시해서 방에 들어온 꽃을 모두 내보내라고 했다. 발레린은 바쁘게 움직이는 하인을 보며 문득 생각에 잠겼다.

‘그러고 보면 요즘 배도스 공작이 조용한 것 같은데.’

심지어 왕궁에 독살도 없었다. 거기다 제르딘은 이제 발레린에게 독을 감별하도록 시키지도 않았다. 물론 위험한 일이 더는 왕궁에 없어야 했지만 그래도 발레린은 살짝 불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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