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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빛 저주의 공녀님-29화 (29/130)

29화

제르딘은 발레린의 얼굴을 잠시 살폈다.

“혹시 더우십니까?”

“아니요!”

제르딘은 발레린의 얼굴을 한참 바라봤다. 발레린은 너무 부끄러워 고개를 숙였다.

“괜찮으십니까?”

발레린은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하고 말했다.

“네.”

하지만 여전히 제르딘의 시선이 느껴졌다. 발레린은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중얼거렸다.

“그렇게 쳐다보지 마세요.”

“만약 몸이 안 좋으시면 지금 의사를…….”

의사라는 말에 발레린은 곧바로 고개를 들었다.

“아니요! 몸은 괜찮아요.”

“그럼 왜…….”

발레린은 얼굴이 벌개졌지만 말을 이었다.

“부끄러워서요.”

제르딘은 이해하지 못하는 듯 눈썹을 찌푸렸다. 발레린은 머릿속에 있는 상상을 모두 말할 수 없어 입을 닫았다. 그러곤 그로프를 쳐다봤다. 그로프는 막 귀뚜라미를 삼키곤 울었다.

“개꿀개꿀.”

발레린은 미소를 지은 뒤 앞에 있는 오이 샐러드를 먹었다. 발레린이 막 샐러드를 삼키던 참이었다.

“공녀, 미리 알아둘 게 있습니다.”

제르딘의 목소리에 발레린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제르딘은 여전히 차분한 눈빛이었다. 그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결혼식 뒤에는 방을 하나로 쓸 예정입니다.”

“하나요?”

발레린이 놀라며 눈을 빛냈다. 옆에 있던 그로프가 울었다.

“개꿀개꿀.”

여전히 발레린이 입을 다물지 못하자 제르딘은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지금 원로원 귀족도 그렇고 배도스 공작까지 단단히 벼르고 있습니다.”

“단단히 벼르고 있다는 건 안 좋은 거겠죠?”

“말씀드리기 죄송하지만 그들 입장에선 제 심신이 미약해서 공녀에게 이용당하며 최종적으로는 공녀가 이 왕궁을 저주로 더럽힌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건 그들의 생각이고 저는 생각이 다릅니다.”

당연히 발레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참으로 어이없는 소문이었다.

‘왕자님의 심신이 미약하다니.’

발레린은 제르딘이 누구보다 강하다고 생각했다. 그가 여태껏 한 행동은 발레린에겐 책에서도 보지 못한 비상한 행동이었다.

“전 왕자님께서 심신이 미약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발레린이 의지를 다지며 말하자 제르딘이 차분히 대답했다.

“그래서 그런 소문이 도는 게 염려스러워 방을 같이 썼으면 합니다.”

“같은 방이요?”

제르딘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오히려 그 소문을 이용하려고 합니다. 제가 공녀를 싫어하는데도 공녀에게 홀렸다는 말이 떠돌거든요.”

정말이지 말도 안 되는 지독한 소문이었다. 발레린이 쉽사리 말을 꺼내지 못하는 사이 제르딘이 말을 이었다.

“물론 같은 방을 써도 공녀에게 홀렸다는 말은 지워지지 않겠지만 이번 기회에 홀렸다는 소문보다는 제가 자처해서 공녀에게 빠졌다는 소문이 더 퍼지게 만들 겁니다. 오히려 그런 소문이 더 괜찮을 것 같으니까요.”

“…….”

“그리고 소문이라도 공녀를 괴롭히게 두지 않을 겁니다. 제가 공녀를 이곳까지 데려왔으니 그건 제가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하고요.”

발레린은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까지 제르딘이 생각해 주니 발레린은 벅찬 마음뿐이었다. 물론 같은 방을 쓴다는 것 자체가 날아갈 정도로 기분이 좋았다.

발레린이 속으로 환한 웃음을 짓고 있을 때 제르딘이 말했다.

“그리고 같은 방을 쓰기 전에 말할 게 있습니다.”

“뭔가요?”

“독 감별사로 이곳에 왔을 때 계약서는 기억하고 계십니까?”

“네, 모두 기억하고 있어요. 그 첫 번째가 왕궁에서 있었던 일은 바깥으로 새어 나가지 않게 하는 것 아닌가요?”

“잘 기억하고 계시네요.”

“제가 기억력은 꽤 좋거든요. 책을 읽어도 금방 잊지 않기도 하고요.”

발레린은 은근히 자랑했다. 제르딘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저와 같이 있는 동안 저에 대해서 단 한 마디도 새어 나가지 않게 했으면 합니다.”

“물론이에요! 전 왕자님의 안전이 우선인걸요.”

“그리고 제가 예상치 못한 행동을 해도 놀라지 마시고요.”

“예상치 못한 행동이라면…….”

발레린은 저도 모르게 가슴이 뛰는 듯했다. 얼굴도 살짝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발레린이 침을 삼키며 제르딘의 말을 기다렸다. 제르딘은 서두르지 않으며 차분히 말했다.

“소문은 들으셨겠죠.”

순간 발레린은 제르딘에게 늑대 수인의 피가 섞였다는 소문을 떠올렸다. 그로프도 발레린을 올려다보며 숨을 삼켰다. 발레린은 침착하게 말했다.

“소문이라면…….”

발레린은 차마 다 말하지 못했다. 발레린이 머뭇대는 사이 제르딘이 말했다.

“늑대 수인의 피가 섞였다는 소문입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맞습니다. 그때도 말했다시피 어머니를 사랑하지 않고 다른 사람과 도망친 사람이 제 아버지입니다. 늑대 수인이고요.”

발레린은 멍하니 제르딘을 쳐다봤다. 그로프도 놀랐는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멍하니 굳었다.

제르딘은 이런 상황은 예상한 듯 차분히 말을 이었다.

“예전에는 제대로 말씀드리지 않았지만 제가 흔히 말하는 잡종 피입니다.”

“…….”

“피 검사로 왕의 피를 증명한다면 저는 이 자리에서 내려오는 게 맞는 사람이죠.”

“하지만 왕자님은…….”

“어머니께선 저에게 왕위를 주고 싶어 하셨습니다. 제 진짜 아버지가 도망가기 전까지요.”

발레린은 쉽사리 머릿속이 정리되지 않았다. 그때 그로프가 옆에서 말했다.

“어느 족보 책보다 꼬인 것 같습니다.”

발레린은 그로프를 잠시 보다가 제르딘에게 물었다.

“그럼 왕자님의 어머니와 맨 처음 결혼하셨던 분은 왕자님의 친아버지가 아니고 두 번째로 결혼하셨던 분이 왕자님의 친아버지인 동시에 늑대 수인이라는 말씀인가요?”

“맞습니다.”

“그럼 왕자님의 어머니와 맨 처음 결혼하셨던 분 사이에는 자식이 없었나요?”

“없었습니다. 어머니의 말에 따르면 그분과 결혼했던 것은 그저 정략결혼이었고 사랑도 없었다고 하더라고요.”

“…….”

“그런데 어머니가 가장 바랐던 사랑의 끝은 결국 도망과 배신이었죠.”

제르딘의 말은 어딘가 삐딱했다. 묘하게 비꼬는 것 같기도 했다. 그는 붉은 와인 잔을 들어서 한 모금 마셨다.

발레린은 숨 쉬는 것도 잊은 채 제르딘을 쳐다봤다. 그러다 발레린은 보좌관이 병에 대해서 비밀을 지켜 달라고 말한 것을 떠올렸다.

“그럼 왕자님께서는 보름달이 뜨는 날마다 병이…….”

“정확히 말하면 늑대 수인과 피가 섞여 겪는 부작용입니다. 요즘에는 굳이 보름달이 뜨지 않아도 나타날 만큼 빈도가 잦아지고 있습니다. 보름달이 뜰 때가 가장 심하긴 하지만.”

“괜찮으세요?”

“어렸을 때부터 겪었던 일이라 괜찮습니다.”

발레린은 그 말을 들어도 얼굴을 쉽사리 펼 수 없었다.

‘그럼 어렸을 때부터 왕자님이 고통을 겪었다는 말이잖아.’

발레린은 시무룩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지만 실제로 들으니 더 마음이 쓰였다. 하지만 발레린은 기운을 차리고서 고개를 들었다.

“왕자님이 위험하지 않게 제가 더 잘 지켜 드릴게요!”

제르딘이 피식 웃었다. 그 웃음에 발레린의 얼굴은 절로 밝아졌다. 그러다 문득 발레린은 불안해졌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저에게 전부 말씀하셔도 되나요?”

“이제 저와 결혼할 사이이고 공녀는 다른 사람에겐 그런 말을 함부로 할 것 같지 않아서 하는 말입니다.”

“제가요?”

제르딘은 와인을 마시며 고개를 끄덕였다. 발레린은 마음속이 점점 벅차오르는 듯했다.

“그럼 저를 믿어 주시는 건가요?”

“보좌관에게 들었습니다. 이전에 제 방에 왔을 때 저에 대해 어렴풋이 알아도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고 하더라고요.”

발레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짐작이 가긴 했지만 보좌관의 얼굴이 너무 어두웠고 제르딘에게 폐가 갈까 봐 말을 아꼈다.

“그러니 공녀를 믿는 겁니다. 이전에 제 가까이에 있었던 사람들은 일주일이 지나기 전에 사주를 받고 모두 떠벌리고 다녔거든요.”

발레린은 마음이 안 좋았다가 이내 빠르게 말했다.

“그럼 지금 왕자님께 늑대 수인의 피가 섞였다고 떠도는 소문도 잡아야 하지 않나요?”

“제가 소문을 잡으려 해도 잡히지 않습니다. 이미 배도스 공작이 악의적으로 계속 퍼뜨리고 있어서.”

“배도스 공작은 어디에도 빠지지 않네요.”

“최종적으로 저를 죽이고 왕 자리를 빼앗으려고 하니까요.”

발레린은 배도스 공작의 얼굴을 떠올렸다. 길게 째진 눈은 음침한 욕심이 그득해 보였고 쳐다보는 눈빛은 부드러움이라곤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칼처럼 날카로웠다.

“전 배도스 공작 같은 사람이 마음에 들지 않아요. 예전에 책에서 봤을 때 그런 얼굴을 한 사람들은 대개 안 좋은 일을 많이 일으킨다고 했거든요.”

제르딘이 웃었다. 발레린은 오늘따라 제르딘이 많이 웃는 것 같아 기쁘면서도 한편으론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을지 짐작이 가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그럼에도 발레린은 오래도록 제르딘의 웃는 얼굴을 마음에 담기 위해 뚫어지게 쳐다봤다.

제르딘은 여전히 음식에는 시선을 두지 않고 와인만 마셨다.

“정말 사람이 먹는 음식은 드시지 않는 건가요?”

“제가 먹어야 하는 상황이 있을 땐 먹습니다.”

“그럼 평소에 뭘 드시나요?”

발레린은 유난히 눈을 빛내며 물었다. 제르딘에 대한 궁금증은 사그라들 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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