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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빛 저주의 공녀님-28화 (28/130)

28화

세드릭스 부인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곤 차분한 목소리로 발레린에게 말했다.

“공녀님, 그리고 이렇게 서두르면서 만난 걸 용서하세요. 제가 너무 무지했어요. 저는 단지 공녀님을 소문 속의 사람으로 착각하고…….”

“아니에요. 이렇게 저를 제대로 알아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한걸요.”

발레린은 활짝 웃었다. 세드릭스 부인은 발레린을 한참 보다가 이내 손수건을 꺼내서 고개를 돌렸다. 이내 세드릭스 부인은 고개를 들고서 발레린에게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눈가에는 아직 닦지 않은 물기가 남아 있었다.

세드릭스 부인은 발레린을 보며 은근히 의지가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돌아가면 공녀님에 대한 소문은 확실히 잡을게요. 이런 분인 줄 알았으면 진작 인사드릴 걸 그랬어요.”

발레린은 그저 미소를 지었다. 세드릭스 부인은 친절히 고개를 숙이곤 응접실을 나갔다. 발레린은 잠시 자리에 앉아 있었다. 머릿속에는 다양한 생각이 떠돌아다녔지만 단연 떠오르는 것은 왕자님 생각뿐이었다.

“개꿀개꿀.”

그로프가 나직이 울었다. 발레린은 앞을 보며 멍하니 말했다.

“그로프, 너도 내가 생각하는 걸 생각하니?”

“제르딘 말입니까?”

발레린은 서둘러 그로프를 어깨에서 내려 탁자에 놓았다.

“그로프, 그때 말한 거 있잖아. 보름달에 관련된 병이…….”

그때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발레린은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하인 몇 명이 다가오고 있었다. 발레린은 빠르게 일어나며 그로프를 들었다. 하인은 놀라며 발레린에게 고개를 숙였다.

발레린은 그들에게 살짝 물러나며 응접실을 나갔다. 그러곤 그로프에게 속삭였다.

“아무래도 왕자님에 대한 말은 함부로 하면 안 될 것 같아.”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발레린은 고개를 끄덕이곤 서둘러 방으로 향했다. 방에 도착하자마자 발레린은 문을 잠그고 창문도 잠갔다. 그런 뒤 그로프에게 말했다.

“그로프, 너도 기억하지?”

“뭘 말입니까?”

“늑대 수인의 피가 섞이면 보름달이 뜰 때 열이 나고 성격이 난폭해지는 거 말이야.”

“물론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병은 흔하지 않아서 늑대 수인의 피가 섞인 사람에게만 나타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래, 분명 내가 본 책에서는 그랬어.”

발레린은 책을 볼 때 흥미로운 게 있으면 항상 그로프에게 설명해 주었다. 그럼 책에서 본 내용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고 그로프도 꽤 재미있어했다.

“제르딘은 정말 늑대 수인의 피가 섞인 게 아닐까요?”

“설마…… 그러면 왕이 될 수 없잖아.”

“그래서 피 검사를 하지 않고 황금 마검을 찾을 때까지 기다리는 것 아닙니까?”

“그럴듯하지만 그래도…….”

발레린은 말을 하다 말았다. 그러고 보면 이상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만약 배도스 공작이 거슬렸다면 제르딘은 진작 왕이 되었어야 했다. 지금 제르딘은 왕위 계승권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아직 왕자의 신분이었다.

“그러고 보면 이상하긴 했어. 항상 음식은 많이 먹지 않았고 그런 음식을 싫어한다고 했던 것 같은데.”

“그럼 늑대 수인의 피가 섞인 게 맞지 않습니까?”

“하긴 늑대 수인은 익힌 고기를 먹지 않지.”

그럼에도 발레린은 제르딘을 늑대 수인 피가 섞인 사람으로 인정할 수 없었다. 제르딘이 먼저 늑대 수인의 피가 섞였다고 말하지 않았으니까.

“그로프, 아무래도 우리가 쉽게 인정해선 안 될 것 같아.”

“하지만 주인님, 이 정도면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사안 아닙니까?”

“그렇긴 하지만 왕자님이 직접 말씀하지 않았잖아. 그리고 만약 그게 사실이라고 해도 왕자님의 안위가 위험해지니까 말을 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

그로프는 고개를 끄덕였다. 발레린은 그로프를 보며 나직이 말했다.

“그리고 왕자님이 늑대 수인의 피가 섞였다고 해도 난 아무 상관 없어.”

“그럼 왕자의 신분에서 내려와야 해도 말입니까?”

발레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나는 왕자님의 얼굴을 보고 한눈에 반했으니까. 정말 그런 얼굴은 여태껏 보지 못한 얼굴이었거든. 동화책에서 나온 것 같은 잘생김이잖아!”

그로프는 멀뚱멀뚱 발레린을 바라봤다. 발레린은 빙긋 웃으며 창문을 열었다. 저 멀리 노랗게 핀 장미 정원이 보였다. 발레린은 창가에 턱을 괸 채 정원을 바라봤다.

“그리고 난 왕자님의 얼굴뿐만 아니라 모든 게 좋아. 내가 그토록 기다리던 이상형이니까.”

발레린은 미소를 지은 채 제르딘을 생각했다. 그로프는 발레린을 보며 울었다.

“개꿀개꿀.”

05. 선택의 연속

발레린은 부지런히 귀부인을 만났다. 사람을 만나서 이야기를 하는 것은 새삼 발레린을 더 활기차게 만들었다. 몇몇 귀부인은 발레린에게 좋은 티를 내지는 않았다가 돌아갈 때는 발레린을 찬양하며 돌아갔다.

발레린을 만난 대부분은 돌아갈 때쯤이면 발레린의 말에 지쳐서 돌아가곤 했다. 발레린은 지친 기색 없이 마지막까지 그들에게 밝게 웃으며 인사했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나갔다. 발레린은 사람을 더 만나고 싶었으나 루네스가 말렸다.

“공녀님, 이제 귀부인은 그만 만나시고 결혼 준비를 하셔야 해요.”

“그래도 여러 사람을 만나면서 해도 되지 않을까?”

오랜만에 발레린은 입이 트여서 기분이 좋던 찰나였다. 루네스는 황급히 말했다.

“아니에요. 결혼 날짜가 완전히 잡혀서 지금 준비하지 않으면 늦어질 거예요.”

그제야 발레린은 결혼 날짜가 궁금해졌다.

“결혼은 언제야?”

“다음 주예요.”

“다음 주?”

“네, 이전에 결혼 날짜가 잡혔다고 말씀했을 때보다 조금 앞당겨진 시간이더라고요.”

발레린은 그동안 제르딘을 만날 기회도 없었기에 이런 사실은 처음 들었다. 제르딘도 식사 시간에는 별말 하지 않아서 더 그랬다.

그때 루네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모르셨어요?”

발레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죄송해요. 저는 공녀님이 날짜가 앞당겨진 걸 아시는 줄 알았어요.”

“난 전혀 몰랐어. 하지만 결혼 날짜가 당겨져서 더 좋은 것 같긴 해.”

발레린은 이내 싱긋 웃었다. 루네스가 당황하며 보았지만 발레린은 아까와 달리 활기차게 말했다.

“어쨌든 왕자님과 더 빨리 결혼할 수 있다는 거잖아.”

“그렇긴 하죠.”

발레린은 빠르게 루네스에게 물었다.

“그럼 나는 결혼 준비를 위해서 뭘 해야 해?”

“우선 드레스를 고르셔야 하고요. 그리고 식장의 장식과…….”

루네스는 끝도 없이 말했다. 발레린은 그로프와 눈빛을 교환하면서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결혼이라는 것이 이렇게까지 준비가 많을 줄은 몰랐다.

마침내 루네스가 말을 끝마치고 발레린을 쳐다봤다.

“설마 내가 그걸 다 준비해야 하는 건 아니지?”

“공녀님은 그저 선택만 해 주시면 돼요. 제가 모두 추려서 공녀님께 가져올게요.”

그제야 발레린은 조금은 안도했다.

그날 이후부터 발레린은 무척이나 바빴다. 너무 바빠서 식사 시간 전까지 루네스가 계속 옆에서 물어볼 정도였다. 마침 정찬실로 들어가기 전 문 앞이었다.

“공녀님, 웨딩드레스 색도 보랏빛 드레스인가요?”

발레린은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이 질문은 2,142,342번째 결혼에 관한 질문일 것이다.

루네스는 발레린의 대답을 누구보다 빠르게 수첩에 적었다.

그때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발레린이 고개를 들자 제르딘이 서 있었다. 루네스는 황급히 물러나 고개를 숙였다.

제르딘의 시선은 발레린에게 있었다. 발레린은 활짝 웃으며 제르딘에게 인사했다.

“왕자님, 여기서 마주치네요.”

발레린은 제르딘이 오기 전에 거의 매일 먼저 정찬실에 왔었다. 그가 먹을 음식에 독이 없는지 먼저 감별하기 위해서였다.

제르딘은 발레린을 잠시 쳐다봤다. 그의 하늘빛 눈동자는 여전히 맑고 아름다웠지만 눈빛은 차분했고 감정은 느껴지지 않았다. 다만 제르딘의 시선은 오늘따라 발레린에게 머무는 시간이 많았다.

발레린은 활짝 미소를 지었다. 제르딘은 발레린의 눈동자를 잠시 보다가 말했다.

“오늘도 즐거워 보이시네요.”

“왕자님을 여기서 마주쳐서요!”

제르딘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그는 앞에 있는 문지기에게 눈짓했다. 그러자 문지기가 문을 열어 주었다. 제르딘은 문 안으로 발레린을 안내했다.

“들어가시죠.”

제르딘의 얼굴에는 은은한 미소가 남아 있었다. 발레린은 설레는 마음으로 정찬실 안으로 들어갔다. 이미 식탁에는 음식이 한가득했었다.

제르딘은 차분히 의자에 앉았다. 그의 옆으로 하인이 와인을 따라 주었다.

“웨딩드레스는 보랏빛 드레스로 하려고 하는데 괜찮으신가요?”

어쨌든 루네스에게 말하기는 했으나 발레린은 마지막으로 제르딘의 의견이 궁금했다. 제르딘은 대수롭지 않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와인 잔을 들고서 한 모금 마셨다.

“마음대로 하세요. 저는 딱히 간섭하지 않겠습니다.”

“결혼식은 대신전에서 열린다고 하는데 그곳은 어떤 곳인가요?”

“본래부터 왕족들이 결혼하는 곳이었습니다. 왕국의 신성한 대를 잇는다는 목적이었죠.”

발레린의 얼굴은 저도 모르게 붉어졌다. 제르딘은 아이 생각이 없다고 했으나 발레린의 머릿속에는 벌써 아이가 생기고 있었다. 물론 상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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