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그나마 어머니가 저를 많이 위로해 줬어요. 아직도 어머니 말을 기억하면서 살고 있기도 하고요.”
발레린은 여전히 미소를 지었다. 세드릭스 부인은 그저 눈만 깜빡이며 발레린을 쳐다봤다. 한참 시간이 지나도 세드릭스 부인은 아까 표정 그대로 발레린을 쳐다봤다.
발레린이 살짝 고개를 기울이자 세드릭스 부인이 황급히 대답했다.
“어린아이 입장에선 그런 상황이 너무 가혹할 것 같아서요. 나이도 어렸을 텐데 그런 상황에 놓인다는 것 자체가…….”
“그래도 언젠가는 상황이 바로 가는 것 같아요. 저는 탑을 나올 줄 몰랐는데 이렇게 탑을 나오고 왕자님과 결혼하잖아요.”
세드릭스 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발레린은 이제 입이 트이는 것을 느끼며 부지런히 말했다.
“그리고 제게 모든 죄를 뒤집어씌운 해인저 모녀가 이제야 죗값을 치르니까 어렸을 때 차별받은 게 조금은 상쇄되는 것 같기도 하고요.”
“그럼 지금 사르티아 부인이…….”
“저에게 매일 독을 먹였는걸요.”
“독이요?”
발레린은 차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반면 세드릭스 부인은 도저히 믿기지 않는 듯 빠르게 말했다.
“그럼 독을 먹고 멀쩡하다는 말인가요?”
“전 몸에 독기가 흘러서 독을 먹어도 죽지 않고 맛있는 맛만 느껴요. 그래서 왕자님이 저를 독 감별사로 임명해 주시기도 했고요.”
세드릭스 부인은 그 소문은 듣지 못했는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발레린은 늘 하던 이야기라도 이렇게 새로운 사람에게 털어놓는 게 즐거웠다. 그동안 탑 안에서 그로프와 이야기하던 것과 다르게 세세하게 반응해 주는 게 꽤 재미있었다.
발레린의 얼굴에는 절로 미소가 나왔다. 그로프도 지루하지는 않은지 개꿀개꿀 울면서 작게 속삭였다.
“세드릭스 부인이 많이 놀란 것 같습니다.”
발레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로프에게 말했다.
“그러고 보면 왕자님도 내 이야기를 듣고 많이 놀랐잖아. 괜찮으냐고 물어보기도 하고 말이야.”
새삼 발레린은 제르딘을 생각하자 미소가 나왔다. 발레린이 제르딘을 한참 생각하고 있을 때 세드릭스 부인이 말했다.
“공녀님에게 이런 일이 있었을 줄은 몰랐어요. 전 공녀님이 그저 왕자님의 안위를 위협하는 줄 알았는데…….”
“위협이라니요, 저는 오히려 왕자님을 지키기 위해서 왔는걸요.”
세드릭스 부인은 잠시 놀란 듯하다가 고개를 내저었다.
“죄송해요. 공녀님. 제가 여태껏 잘못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네요.”
“아니에요. 이제야 저에 대해서 제대로 생각해 주셔서 감사해요.”
세드릭스 부인의 얼굴은 아까보다는 부드러웠다. 심지어 세드릭스 부인은 발레린의 손을 잡기까지 했다.
“그나저나 정말 대단하세요. 어렸을 때 그렇게 차별받았어도 이렇게 멀쩡한 생각을 하다니.”
발레린은 놀라긴 했으나 자연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니가 좋은 말씀을 많이 해 주셨어요. 그나저나 괜찮으세요?”
“뭘요?”
“제 손을 잡아도 되는지…….”
그 말에 세드릭스 부인이 황급히 손을 뗐다.
“죄송해요. 저도 모르게…….”
“아니에요. 참고로 제 손을 잡아도 괜찮아요. 다만 제 입에서 나오는 입김과 닿으면 위험해지죠.”
“그럼 다른 몸에 닿는 것은 괜찮다는 말인가요?”
“네.”
“미안해요. 제가 아까 손을 뗀 것은 공녀님을…….”
“그렇게 미안하지 않으셔도 돼요. 어쩌면 당연한걸요. 제 몸에 독기가 흐르니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 것이고 그러니 멀리하는 건 당연하죠.”
발레린은 아무렇지 않았다. 어차피 어렸을 때부터 자신과 일반 사람들은 다르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
세드릭스 부인은 발레린을 아까보다 더 뚫어지게 바라봤다. 그녀의 눈빛은 버려진 강아지를 보는 것처럼 동정이 어려 있었다. 발레린은 오히려 그 시선을 즐겼다. 자신을 저렇게 보는 사람은 거의 보지 못했고, 무서운 듯 피하는 것보다는 나았다.
세드릭스 부인은 어딘가 감정이 솟구쳤는지 이내 빠르게 말했다.
“공녀님이 이렇게 예법도 훌륭하고 말도 또랑또랑하게 잘하시니 제가 괜히 일찍 온 것 같아요.”
“일찍 온 것이라면…….”
“공녀님께는 죄송한 말이지만 말씀드린 것처럼 사교계에는 안 좋은 소문이 꽤 많이 돌고 있어요.”
“어떤 소문인가요?”
세드릭스 부인이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고개를 숙였다. 발레린은 궁금한 것은 못 참아 재빨리 물었다.
“말씀해 주셔도 괜찮아요. 사람들이 저에게 하는 욕은 이제 면역이 되었거든요.”
세드릭스 부인의 얼굴은 더 좋지 않았다. 그녀는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입술을 움찍거렸다. 발레린이 주의 깊게 보자 세드릭스 부인이 황급히 고개를 들었다.
“죄송해요. 절대 공녀님을 동정하는 건 아니에요. 단지 저는 어린아이가 그렇게까지 차별을 받았을 거란 생각에 정말 슬퍼서요.”
“이젠 괜찮은걸요.”
“하지만 오히려 공녀님이 그렇게 괜찮다고 하시니 더 마음이 가요.”
세드릭스 부인은 깊은 숨을 내쉬었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사교계에선 공녀님을 그리 좋게 보진 않아요. 어쨌든 저주를 받아서 몸에 독이 흐른다는 말도 있고, 오히려 왕궁 전체를 위협에 빠뜨릴 거라는 말이 많아요.”
발레린이 가만히 듣고 있자 세드릭스 부인이 나직이 말을 이었다.
“물론 걱정 마세요. 저도 아까 전만 해도 공녀님을 많이 오해했는데 이렇게 꿋꿋이 살아왔을 줄은 몰랐어요. 거기다 해인저 모녀가 그 모든 일을 했다고 하니 오히려 제가 공녀님께 미안해요.”
세드릭스 부인은 고개를 살짝 숙였다가 이내 활기차게 말했다.
“어쨌든 이렇게 일찍 공녀님을 만나 뵌 것은 정말 잘한 일이었어요.”
부인의 눈은 약간의 물기로 젖어 있었다. 발레린은 새삼 자신의 일이 이렇게까지 눈물을 흘릴 일인가 생각하다가 이내 미소를 지었다.
“저야말로 감사해요. 제 이야기를 들어 주는 사람이 별로 없었거든요.”
그 말을 듣자마자 세드릭스 부인은 눈을 깜빡이며 입술을 짓씹었다. 발레린은 그저 미소를 지었다. 세드릭스 부인은 손수건으로 눈가를 빠르게 닦고는 애써 미소를 지었다.
“공녀님, 심심하시면 언제든지 저를 부르세요. 저는 나름대로 사교계에서 아는 사람도 많아서 재미있을 거예요. 그리고 혹시 궁금한 게 있으세요?”
궁금한 것. 발레린은 곧장 제르딘을 떠올랐다.
“왕자님은 정말로 이전에 결혼할 사람이 없었나요? 아니, 원래 무심한 분이신가요?”
세드릭스 부인은 살짝 미소를 짓고는 말했다.
“왕자님은 어렸을 때부터 활발한 분은 아니셨어요. 하지만 심지가 굳건하고 총기가 있는 분이셨어요. 왕족답게 예법도 훌륭하고 위엄도 있으셨고요.”
발레린이 눈을 반짝이며 보자 세드릭스 부인이 부지런히 말을 이었다.
“그리고 원래부터 왕자님과 결혼할 분이 있으셨는데 그분은 몸이 안 좋으셔서 일찍 돌아가셨어요. 그리고 한참 있다가…….”
“그럼 저와 결혼하기 전에 왕자님과 결혼을 약속한 분이 있으셨다는 말인가요?”
“네, 하지만 왕자님과 많이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어요. 그래도 왕자님께선 그분이 돌아가시자 나름대로 격식에 맞게 장례를 치러 주셨죠.”
처음 듣는 말에 발레린은 쉽사리 말이 나가지 않았다.
‘왕자님은 이런 말은 해 주지 않으셨는데…….’
발레린이 아무 말 하지 않고 있자 세드릭스 부인이 말했다.
“그런데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왕자님은 그분과 그저 결혼 상대였을 뿐이에요. 그러고 보면 왕자님은 남자도 그렇고 여자에게도 그렇게 관심을 보이진 않으셨어요. 워낙 성격이 무심해서 그런지.”
발레린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동안 제르딘에 대한 성격은 발레린이 짐작하던 바였다. 그때 세드릭스 부인이 고개를 들어 빠르게 말했다.
“그러고 보면 왕자님에 대한 괴상한 소문이 있긴 있어요.”
발레린은 저도 모르게 앞으로 움직이며 말했다.
“무슨 소문이요?”
세드릭스 부인은 주변을 황급히 둘러봤다. 하인들은 모두 문 앞에 서 있었다. 세드릭스 부인은 곧바로 고개를 돌려 발레린이 들릴 정도로 작게 말했다.
“늑대 수인의 피가 섞였다는 소문이요.”
발레린이 눈을 동그랗게 뜨자 세드릭스 부인이 오히려 놀라며 물었다.
“모르셨어요?”
발레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에 그로프가 언뜻 말하긴 했지만 발레린은 더 생각하지 않았다. 말이 되지 않기도 했고.
하지만 소문까지 돌다니.
“그 소문이 유명한가요?”
“그저 왕궁 뒤편에서 돌긴 하지만 나름대로 사그라지지 않고 떠도는 소문이에요. 하지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어차피 질 낮은 소문이니까요.”
세드릭스 부인은 웃으며 물러났다. 그래도 발레린은 쉽사리 표정이 펴지지 않았다. 보름달. 그 병. 예전 밤늦은 시간에 보좌관이 걱정스러워하던 얼굴이 발레린의 머릿속에 둥둥 떠다녔다.
그때 세드릭스 부인이 말했다.
“혹시 더 궁금한 게 있으세요?”
발레린은 고개를 내저었다. 그제야 세드릭스 부인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럼 이만 가 볼게요. 아무래도 제가 늦은 시간에 공녀님의 시간을 방해하기도 했으니까요.”
“더 있다가 가셔도 돼요.”
“아니에요. 제가 이렇게까지 서두르며 왔으니 이제 공녀님의 시간을 존중해 줘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