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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빛 저주의 공녀님-26화 (26/130)

26화

하루도 지나지 않아 편지에 대한 답장이 왔다. 발레린이 초대에 응하자마자 그들은 하나같이 발레린을 하루라도 일찍 만나기 위해 애썼다.

발레린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궁에서는 자신이 방독면을 쓰고 있어도 피하는 마당에 바깥에서는 귀족들이 이렇게나 만나려고 애쓰다니.

그중에서 세드릭스 부인은 발레린의 답장에 누구보다 적극적이었다.

편지를 보낸 지 정확히 세 시간 뒤였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루네스가 들어왔다. 루네스는 밝은 얼굴로 말했다.

“세드릭스 부인이 오늘 오후 7시에 만나 뵙고자 하셨어요.”

그로프도 놀랐는지 멀뚱멀뚱 루네스를 쳐다봤다.

“오후 7시?”

“네, 혹시 다른 일정이 있으신가요?”

“아니. 딱히 없어.”

“그럼 오후 7시가 괜찮다고 할까요?”

“그래.”

어차피 발레린은 더 늦추고 싶지 않았다. 답장이 무척이나 빨리 온 것에 놀랍긴 했지만 오히려 더 만나고 싶은 생각이었다.

예전에 발레린이 재미있게 읽은 책 중에 『가장 유서 깊은 가문』이 있었다. 그곳에서 꽤 봤던 가문 이름이 세드릭스 가문이었다. 하지만 발레린이 읽은 책은 거의 100년도 더 된 책이라서 실제로 세드릭스 가문이 매시드 왕국에서 어떤 위치인지 궁금했다.

“루네스, 혹시 세드릭스 가문에 대해서 알아?”

“세드릭스 가문은 워낙 유명하잖아요. 세드릭스 공작은 지금 원로원 귀족이기도 하시죠. 부인은 사교계에서 영향력이 대단한 분이시지만 유일하게 자식이 없으세요.”

발레린은 고개를 끄덕였다.『가장 유서 깊은 가문』이라는 책에서도 세드릭스 가문은 자식과 그다지 연이 없다고 쓰여 있었다. 가문의 역사에서도 그들이 자식을 낳으면 일찍 죽거나 오래 살지 못해서 가끔 양자를 들인다고 했다.

발레린이 가만히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루네스가 활발히 말했다.

“어쨌든 세드릭스 부인은 자식이 없으셔서 항상 아이를 보면 좋아하세요. 그분 성격이 무척 까다롭고 대하기 매우 어려운데 아이에게는 늘 관대하세요.”

“아이에게는 관대하다고?”

“네! 예전에 무도회에서 부인의 드레스를 어떤 아이가 실수로 얼룩지게 만든 일이 있었는데 부인께서는 괜찮다며 화도 안 내시고 오히려 아이에게 괜찮으냐고 물어봤다니까요!”

“그럼 혹시 개구리는 무서워해?”

“그건 모르겠어요. 아, 그러고 보니까 동물을 많이 키우신다고 듣긴 들었어요. 저택에 가면 새소리와 함께 개소리가 난다고 하더라고요.”

발레린은 그나마 세드릭스 부인이 동물에 대해선 편견이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발레린은 그로프를 보며 작게 속삭였다.

“그로프, 세드릭스 부인을 만나러 갈 때 같이 가자.”

그로프는 기쁜 듯 개꿀개꿀 울었다.

저녁이 되자 발레린은 설레는 마음으로 저녁 시간을 기다렸다. 하지만 정찬실에 가자 발레린은 실망을 감출 수 없었다. 제르딘이 늘 앉던 상석은 비어 있었다.

발레린은 막 다가오는 하인에게 물었다.

“왕자님은?”

하인은 고개를 숙이곤 대답했다.

“바쁜 일이 있으셔서 오늘은 같이 못 드신다고 하십니다.”

발레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음식으로 시선을 돌렸다. 확실히 결혼 날짜가 잡혀 있으니 제르딘은 바쁜 듯했다. 발레린은 마음속이 시원하지는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포크를 들었다. 왕궁에서 혼자 먹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래도 제르딘은 항상 발레린과 함께 식사를 했었다. 발레린은 잔뜩 가라앉은 마음으로 내부를 둘러봤다. 무척이나 거대한 곳에 혼자 있으니 외로운 기분마저 들었지만 그나마 그로프가 옆에 있었다.

발레린은 그로프가 귀뚜라미를 잡아먹는 것을 보았다. 꽤 빠르게 잡아서 새삼 발레린은 그로프가 개구리라는 게 실감났다.

그렇게 발레린은 간간이 그로프를 보면서 음식을 먹다가 정찬실을 나갔다. 그러자 루네스가 다가왔다.

“공녀님, 지금 곧바로 응접실로 가시면 될 거예요. 마침 세드릭스 부인이 오셨다고 하거든요.”

“벌써 왔다고?”

“네, 공녀님이 식사하고 계실 때 온 것 같아요.”

발레린의 걸음은 자연히 빨라졌다.

“이렇게 일찍 오실 줄 몰랐는데. 대체 이렇게까지 빨리 만나려는 이유가 뭘까?”

발레린의 어깨 위에 있던 그로프가 말했다.

“일부러 일찍 온 것 아닙니까? 자신을 기다리게 했다는 부채감을 심어 줘서 주인님을 난감하게 하려고요.”

“설마, 그럴 리가.”

“하지만 모릅니다. 이렇게까지 주인님을 만나려 하고 일찍 온 걸 보면 그렇게 좋은 의도가 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하긴 모두들 내가 저주받았다고 생각하는데 이상하긴 해.”

새삼 발레린은 제르딘이 한 말이 생각났다. 그래도 발레린은 이런 만남 자체가 즐거웠다.

어떻게 보면 왕궁에서도 사람들이 발레린을 피하는 이유는 당연한지도 모른다. 여전히 발레린을 피하지 않는 사람은 루네스와 제르딘뿐이었다. 그나마 제르딘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발레린을 좋게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 외 사람들은 꺼림칙해했다.

마침 응접실에 도착하자 루네스가 작게 속삭였다.

“공녀님, 들어가시면 될 거예요. 저는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발레린은 고개를 끄덕이곤 천천히 응접실로 들어갔다. 왕궁의 응접실은 처음이었지만 상당히 고급스러운 면이 보였다.

응접실 안에는 세드릭스 부인으로 추정되는 사람이 있었는데 까만 드레스에 기다란 장갑에 방독면까지 쓰고 있었다. 온몸을 감싸며 장례식이라도 가는 모양새였다.

발레린은 우뚝 멈춰 섰다. 어깨 위에서 그로프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역시 주인님을 그다지 좋게 생각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발레린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세드릭스 부인이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대번에 발레린을 보고는 고개를 뻣뻣이 들었다.

“공녀님!”

목소리는 한껏 올라가 있었는데 문득 들으면 반가워서 내지르는 소리 같았다. 발레린은 천천히 세드릭스 부인에게 걸어갔다. 그러자 세드릭스 부인이 일어나서 인사를 했다.

“방문을 허가해 주셔서 감사해요. 안 그래도 정말 공녀님을 만나 뵙고 싶었거든요.”

발레린은 미소를 지으며 예법에 맞게 인사를 했다. 그러자 세드릭스 부인이 깜짝 놀라며 발레린을 쳐다봤다. 갑자기 바뀐 세드릭스 부인의 표정에 발레린은 유심히 세드릭스 부인을 쳐다봤다.

세드릭스 부인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이렇게 인사를 완벽하게 하시는 분은 보지 못했거든요. 심지어 제가 예법 교육을 받을 때 봤던 인사보다 더 정확해요.”

발레린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발레린이 자리에 앉았지만 세드릭스 부인은 여전히 놀란 얼굴이었다. 그녀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 듯 말했다.

“이렇게 완벽하게 예법에 맞게 인사를 하는 분이 있다니. 요즘 사람들과 다른 분 같아요.”

그러면서 세드릭스 부인은 천천히 의자에 앉았다. 그녀는 여전히 발레린을 신기한 듯 바라봤다. 발레린은 그저 미소를 지었다. 화법 책에서는 할 말이 없을 땐 그저 은은한 미소를 짓고 있기를 권했다. 그러면 상대방이 알아서 이야기를 꺼낸다고.

그렇게 발레린이 가만히 있자 세드릭스 부인이 어색하게 웃으며 먼저 말을 꺼냈다.

“이렇게 뵈니 다른 곳에서 말만 듣는 것보다 다르시네요.”

“다른 곳이요?”

“사교계예요. 그리 심각한 소문은 아니지만 왕자님께서 공녀님과 갑자기 결혼 발표를 하니 사교계가 떠들썩하긴 해요.”

“어떤 소문이 도나요?”

발레린이 묻자 세드릭스 부인이 웃으며 말을 꺼내려다 순간 얼굴이 굳었다. 그녀의 시선은 발레린의 어깨 위에 있는 그로프에 있었다.

“개꿀개꿀.”

세드릭스 부인이 화들짝 놀라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발레린은 차분히 설명했다.

“어렸을 때부터 저와 함께 있던 독 개구리예요. 이름은 그로프고요.”

“독 개구리요?”

“네, 그런데 만지지 않으면 위험하지 않으니 그렇게 걱정하실 필요는 없어요.”

발레린은 활짝 미소를 지었다. 방독면에 가려져서 입가는 보이지 않겠지만 어쨌든 그로프가 무해하다는 것을 최대한 보여 주고 싶었다. 세드릭스 부인은 그로프를 한참 바라봤다. 그러다 이내 발레린을 보며 물었다.

“공녀님이 특이하시다는 소리는 들었지만 정말 제가 생각한 이상인 것 같아요. 독 개구리라니.”

“하지만 먼저 해를 끼치지 않는 이상 그로프는 아무 해도 가하지 않는걸요.”

“물론 그렇긴 하지만…….”

“그로프도 저와 같은 생물이에요. 스스로 생각도 하고 저와 대화도 나누죠.”

“대화요?”

“네, 그로프가 거의 죽을 뻔한 걸 제가 가지고 있는 독기로 살려 줬거든요.”

세드릭스 부인은 입을 살짝 벌린 채 한동안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녀는 매우 많이 놀라워했다.

발레린은 그저 미소를 지으며 세드릭스 부인이 말할 때까지 기다렸다. 발레린으로선 할 일도 없었고 기다리는 것은 그동안 잘하던 일이었다.

이내 세드릭스 부인이 눈썹에 힘을 주며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 그녀는 이제 다 식은 차를 보며 말했다.

“저는 그런 이야기를 처음 들어요. 독은 무조건 생명을 죽이는 거라고 알았거든요.”

세드릭스 부인은 아직도 정신이 없어 보였다.

“저도 그로프를 살리기 전에는 제 존재가 그런 건 줄 알았어요. 어쨌든 어머니를 제외하곤 모두 제 독기가 사람을 죽인다고 생각하고 가까이에도 오지 않았거든요.”

“그럼 어렸을 때부터 하인들이 오지 않았다고요?”

발레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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