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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빛 저주의 공녀님-25화 (25/130)

25화

“벌써 가신다고요?”

“마침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하지만 거의 드시지 않으셨잖아요.”

“딱히 먹을 생각이 없어서요.”

“하지만…….”

제르딘은 간단히 고개를 숙인 뒤 정찬실을 나갔다. 발레린은 괜히 힘이 빠졌다. 분명 제르딘과 이야기가 잘 되는 것 같아서 좋던 찰나였다.

‘많이 바쁘신가.’

하지만 생각해 보면 제르딘이 바쁜 것은 당연했다. 귀족들이 모두 제르딘을 향해 모진 말만 퍼붓고 일만 만들어 내는데 처리할 일이 없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나마 발레린은 결혼 날짜라도 잡은 것이 다행이었다.

발레린은 결혼만 생각하며 기분 좋게 음식을 먹었다. 그로프도 개꿀개꿀 울면서 귀뚜라미를 잡아먹었다.

제르딘은 정찬실에서 나오자마자 거칠게 머리를 쓸어 넘겼다. 이상하게 자꾸 발레린에게 시선이 갔다. 왕궁에서 가장 하지 않아야 할 일이 쓸데없이 감정에 휩쓸리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자꾸만 발레린을 보고 있었다.

이전에는 일말의 알아차림이라도 있었지만 이제는 무의식적으로 자꾸만 발레린에게 시선이 향했다.

‘신기해서 그렇겠지.’

제르딘은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여태껏 왕궁에서 보지 못하던 사람이었다. 사람의 가장 타락한 욕심만 내보이는 왕궁에서 항상 웃고 있는 것만 봐도 발레린은 이상하고 신기한 사람이었다.

그조차도 웃음을 잃어버린 지 오래였다. 그래서 더 눈길이 가는지도 모른다. 항상 웃으며 밝은 얼굴이니 제게 없는 것이라도 눈에 담으려는 마음인지도 모른다. 그러니 이게 감정일 리 없었다.

호기심. 그 이상 그 어떤 것도 아니었다.

감정이라는 게 담긴다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제르딘은 누구보다 잘 알았다. 어차피 발레린과 이루어질 수 없었다. 잡종 피의 왕족과 저주받은 공녀. 어디를 봐도 제대로 되지 않았다.

제르딘은 질린 듯 눈썹을 찌푸렸다. 스멀스멀 올라오던 감정이 서서히 식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내 그의 머릿속에는 다시 지긋지긋한 권태가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제르딘은 한숨을 내쉬곤 따라오던 보좌관에게 한마디 했다.

“지금 곧바로 결혼 날짜를 발표해.”

보좌관은 고개를 끄덕이며 제르딘을 부지런히 따라왔다. 그때 문득 제르딘이 멈춰 서서 보좌관을 쳐다봤다.

“잠깐 쉴 테니 따라오지 마.”

“하지만 왕자님…….”

제르딘은 먼저 앞서서 걸어갔다. 결국 보좌관은 제르딘의 뒷모습만 좇았다. 나머지 하인들과 왕실 친위대가 그의 뒤를 따를 뿐이었다.

발레린이 정찬실을 나오자 곧장 루네스가 뒤를 따랐다.

“공녀님, 제가 그동안 생각을 해 보았는데요.”

“뭘?”

“공녀님 저주 말이에요.”

발레린은 멈춰 서서 루네스를 쳐다봤다. 생각보다 루네스는 저주에 관심이 많은 듯 보였다. 발레린이 유심히 보자 루네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공녀님의 저주는 아무래도 저주가 아니라 능력인 것 같아요.”

발레린은 싱긋 미소를 지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어차피 저주를 푸는 방법도 없는데.”

“그러니까요! 보통 저주는 누군가의 원한에서 시작되거든요. 그런데 공녀님의 가문에 원한도 없다고 하고, 또 공녀님의 어머니는 위대한 마법사이셨다고 하니까 그게 결국 능력인 거죠.”

루네스는 나름대로 머릿속으로 많이 생각한 건지 말이 꽤 길었다. 발레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니도 그렇게 말씀하셨어. 심지어 어머니도 어렸을 때 나와 비슷했었거든. 물론 나중에 그게 마력으로 작용해서 위대한 마법사가 되긴 했지만.”

발레린이 계단을 올라가자 루네스가 호기심 넘치는 눈빛으로 물었다.

“그럼 공녀님의 어머니도 원래는 공녀님과 비슷했지만 그게 나중에 마력으로 바뀌어서 변하셨다는 말씀인가요?”

발레린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그로프가 발레린의 귀에 나직이 속삭였다.

“루네스라는 자, 아무래도 수상합니다. 아까부터 주인님께 너무 많은 관심을 드러내기도 하고요.”

그때 마침 발레린의 방에 도착했다. 루네스는 황급히 문을 열어 주었다.

“공녀님, 혹시 필요한 게 있으시면 바로 부르세요!”

발레린은 고개를 끄덕인 뒤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마자 그로프가 말했다.

“주인님, 루네스의 뒤를 밟을까요?”

발레린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하지만 그저 호기심이 많은 사람일 수 있잖아. 그리고 내가 살려 줘서 단순히 고마워서 관심을 많이 보이는 것일 수도 있고.”

“하지만 아무래도 찝찝합니다.”

발레린은 벽에 걸려 있는 보라색 드레스를 바라봤다. 여태껏 발레린이 입어 왔던 드레스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임에도 여전히 아름다워 발레린의 시선을 끌었다.

“그래도 기다려 보자. 어차피 드러날 일은 드러나잖아.”

발레린이 웃으며 말하자 그로프가 나직이 말했다.

“해인저 모녀의 죄가 드러나는 것처럼 말입니까?”

발레린은 밝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15년을 기다리긴 했지만 전보다 벌을 더 무겁게 받을 수도 있게 됐잖아.”

“그건 그렇습니다. 만약 그때 바로 밝혀졌다면 지금보다 벌을 가볍게 받을 수도 있었습니다. 지금은 독에 관한 범죄를 가장 무겁게 처리하니까요.”

“그러니까 루네스도 분명 이유가 있을 거야.”

발레린은 이내 시선을 창문으로 돌렸다. 노란 장미가 유난히 아름답게 핀 정원이 보였다. 그사이 발레린은 쉬지 않고 발을 움직였다. 음식을 먹고 난 뒤 운동을 하는 것은 발레린에겐 습관이었다.

발레린은 환하게 핀 노란 장미를 보며 제르딘을 생각했다. 햇빛에 비치는 노란 장미 빛이 그의 찬란한 금발과 비슷한 것 같았다. 그 생각에 발레린의 얼굴은 절로 환해졌다.

발레린이 운동을 마치고 침대에 쉬고 있을 때였다. 때아니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울렸다. 발레린은 벌떡 일어나 방독면을 썼다.

“들어와.”

그 소리가 떨어지기 무섭게 문이 열리며 루네스가 들어왔다. 루네스는 밝은 얼굴로 발레린에게 인사하며 다가왔다. 루네스는 은제 쟁반을 들고 왔는데 쟁반 위에는 편지가 가득했다.

“웬 편지야?”

발레린이 호기심을 드러내자 루네스가 탁자 위에 쟁반을 놓으며 말했다.

“공녀님이 왕자님과 결혼을 한다고 하셔서 이곳에 방문을 요청하는 귀부인들의 편지예요.”

발레린은 맨 위에 있는 초대장을 살폈다.

세드릭스 부인 올림

제르딘에게 들었던 사람이었다. 그로프도 옆에 와서 이리저리 살폈다.

“주인님, 아시는 분입니까?”

“왕자님께 들었던 사람이야. 교묘하게 사람을 떠보는 것으로 유명하대.”

“그럼 굳이 만날 필요가 있을까요?”

발레린은 고개를 내저었다.

“난 오히려 이런 사람이 어떻게 사람을 대하는지 궁금해.”

그때 루네스가 끼어들었다.

“세드릭스 부인은 사교계에서 꽤 명망 있는 분이세요. 그분께서 입은 드레스가 하루도 지나지 않아서 유행할 정도라니까요.”

“그렇게 유명한 분이셔?”

“네!”

루네스는 무척이나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발레린은 여태껏 사교계 사람은 만나 보지 못했다. 15년간 탑 안에 갇혀 있으니 고작 본 것이라곤 일하기 싫은 하인의 표정이라든가 가끔 방문하는 귀족이었다.

그것도 멀리서만 보았지 가까이서 이야기를 나눈 적은 거의 없었다.

발레린은 긴장이 되는 것보다는 설레었다. 드디어 사람을 많이 만나는 자리인 것이다. 그것도 왕자님과 결혼하는 자격으로 말이다!

발레린의 얼굴에 미소가 떠나지 않자 루네스가 말했다.

“공녀님, 여기에 중요한 분들도 많긴 하지만 모두 만날 수는 없으니 제가 나름대로 이름 있는 분들만 뽑아 드릴까요? 참고로 이분들은 공녀님을 많이 피곤하게 하실 거예요.”

“왜?”

“다들 내로라하는 귀족 부인이거든요. 사교계에서도 꽤 유명하고요.”

그 말을 듣자 발레린은 더욱 기대되었다.

“모두 만나 볼게.”

루네스가 놀란 얼굴로 바라봤다.

“피곤하지 않으시겠어요? 시간도 오래 걸릴 텐데요.”

“아니야. 이렇게 내게 관심을 보이는데 모두 만나고 싶어.”

발레린은 안 그래도 사람을 많이 만나 보지 못한 것이 여태껏 흠이었다. 여러 사람을 만나면서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탑 안에 갇혀서 그동안 못 했던 이야기를 하고 싶기도 했다.

루네스는 여전히 놀라긴 했으나 발레린을 말리지 못했다. 다만 그녀는 옆에서 발레린을 도와서 편지를 썼다.

이윽고 초대를 허락하는 편지를 다 쓰자 발레린은 기지개를 켰다. 사실상 책상을 거의 덮을 만한 양이었다. 하지만 발레린은 기분 좋은 얼굴로 루네스에게 말했다.

“모두 편지를 부치고 약속을 잡아 줘. 시간이 겹치지 않게.”

루네스는 고개를 끄덕인 뒤 편지를 은제 쟁반에 모두 모았다.

“혹시 더 필요하신 일은 없으신가요?”

발레린은 고개를 내저었다. 이제 조금 쉬고 싶은 마음이었다. 루네스는 이내 인사를 하고는 방을 나갔다.

그로프는 발레린의 곁으로 와서 말했다.

“주인님, 정말 다 만나실 작정이십니까?”

“응, 그동안 내가 다양한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지는 못했잖아.”

“하지만 하녀 말대로 피곤할 수 있습니다. 시간도 오래 걸릴 거고요.”

“그래 봤자 나는 여기서 바쁘지도 않잖아.”

그건 그랬다. 아침, 저녁, 점심시간 외에 발레린이 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로프는 쉽사리 반박하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발레린은 자리에서 일어나서 침대에 몸을 던지듯 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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