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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빛 저주의 공녀님-24화 (24/130)

24화

오늘도 여전히 독 냄새는 나지 않았다.

“독은 없으니 안심하고 드셔도 돼요.”

제르딘은 발레린의 얼굴을 살폈다. 발레린은 활짝 웃으며 제르딘의 눈동자를 보았다.

‘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발레린은 기대하는 마음으로 제르딘의 말을 기다렸다. 제르딘은 발레린의 얼굴을 살피며 물었다.

“그동안 왕궁에서 생활하는 데 힘들지는 않으셨습니까?”

“전혀요! 왕자님이 계셔서 생활에 불편함은 없었어요.”

“하인들은 여전히 잘 대하고요?”

간혹 발레린을 보며 피하는 하인들은 있었다. 하지만 발레린은 별생각이 없었다. 어차피 위험하면 피하는 것이 인간의 본능이었다.

발레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때 왕자님이 잘 말씀해 주셔서 이제 저에게 직접적으로 말하지는 않아요.”

“다행이네요. 만약 함부로 대하는 하인이 있다면 주저 없이 말하세요. 그런 행위는 왕족을 모욕하는 것과 같으니까요.”

“하지만 저는 왕족이 아닌걸요.”

“곧 왕족이 될 겁니다.”

“네?”

발레린은 너무나 당황해서 절로 큰 소리를 냈다. 반면 제르딘은 변함없이 단조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정식 결혼 날짜를 잡았습니다.”

그 말을 듣자마자 발레린의 눈이 여느 때보다 커졌다. 제르딘은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아마 조만간 공식적으로 결혼에 대해서 발표할 겁니다. 결혼식 준비는 왕궁에서 모두 할 거고요.”

발레린은 넘쳐흐르는 미소를 주체하지 못했다. 인지하지도 못한 채 얼굴에는 이미 미소가 만연했다. 나름대로 결혼을 기다리긴 했지만 실제로 말을 들으니 기분이 날아갈 듯했다.

제르딘은 발레린을 물끄러미 보다가 말했다.

“저와 결혼하기 전에 공녀에게 귀부인들이 만나자고 할 겁니다. 괜히 가르치려 들고 내리누르려는 수작이니 방문 신청을 하지 않도록 제가 조정하겠습니다.”

“아니요! 저는 괜찮아요.”

“정말 괜찮겠습니까? 특히 세드릭스 부인은 교묘하게 사람을 떠보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발레린은 오히려 다양한 사람을 만날 수 있으니 기쁘기만 했다.

“그런 사람도 만나고 싶어요. 탑에 있을 땐 맨날 지켜보기만 했거든요.”

제르딘은 잠시 굳은 얼굴로 쳐다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제가 말리지는 않겠습니다.”

발레린은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왕자님께 폐가 가지 않도록 행동할게요.”

제르딘은 말없이 쳐다봤다. 발레린은 결혼하는 게 마냥 좋아 절로 미소가 나왔다.

비록 예정된 계약 결혼이었고 제르딘은 사랑을 기대하지 말라고 했지만, 발레린은 여전히 희망의 씨앗을 놓지 못했다.

발레린은 멍하니 제르딘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제르딘도 발레린을 쳐다봤다. 그의 시선은 묘하게 발레린의 입술에 있었다. 그의 시선은 꽤 집요했다. 발레린은 그의 감정 섞인 시선을 차마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저 제르딘의 잘생긴 얼굴과 결혼이라는 것에 빠져 있을 때였다.

“공녀가 걸린 저주는 영원히 풀리지 않는 겁니까?”

“저주요?”

발레린은 저도 모르게 멍하니 대답했다. 제르딘은 차분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발레린은 서둘러 정신을 차리고 입을 열었다.

“제 저주는 원래부터 아무도 원인을 모르는 저주였어요. 그저 제가 태어나면서부터 입술이 초록색이었고 독이 나왔으니까요.”

“그럼 저주를 푸는 방법은 아예 없는 겁니까?”

“그건 모르겠어요. 어떻게 걸린 저주인지도 모르니까요.”

제르딘은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새삼 발레린은 저에게 관심을 기울여 주는 제르딘이 고마웠다. 발레린은 덧붙이듯 말했다.

“그런데 어머니는 항상 저에게 이건 저주가 아니라 행운이라고 했어요. 어렸을 때는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웠지만 지금은 그나마 그 말이 제게 많은 도움이 돼요.”

“하긴 공녀의 저주가 없었다면 저와 같이 이렇게 음식을 먹지도 않았겠죠.”

“그러니까요. 저는 오히려 왕자님께 도움이 되니 기뻐요.”

발레린이 활짝 웃으며 보았다. 제르딘은 발레린을 물끄러미 보다가 나지막이 말했다.

“원래 그렇게 웃음이 많습니까?”

“왕자님을 보면 절로 웃음이 나오는걸요.”

발레린이 웃으며 말하자 제르딘은 헛웃음을 지었다.

“제가 괜한 걱정을 한 모양입니다.”

걱정이라는 말에 발레린은 서둘러 말했다.

“걱정이요?”

“왕궁은 생각보다 만만한 곳이 아니니까요. 그런데 지금 공녀는 나름대로 왕궁 생활을 겪었는데도 괜찮아 보여서요.”

“왕자님이 있으니까요.”

제르딘은 대답하지 않고 발레린을 바라봤다. 그의 얼굴이 은근히 굳었다. 그는 이내 눈썹을 살짝 찌푸리고서 발레린을 쳐다봤다.

“제가 공녀에게 그렇게 도움이 됐습니까?”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제겐 큰 도움이에요.”

제르딘은 웃지도 않고 인상을 찌푸리지도 않았다. 그저 정자세로 쳐다보고 있었다. 꽤 집요한 시선에 발레린의 얼굴은 장미가 피듯 붉게 타올랐다. 발레린은 고개를 푹 숙였다.

그때 낮은 목소리가 울렸다.

“공녀 같은 사람은 처음입니다.”

발레린이 고개를 들자 제르딘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보다시피 왕궁에는 공녀 같은 사람이 없습니다. 모두 늙고 제 권력만 지키고 탐하려는 놈들밖에 없죠.”

발레린은 그 말에 희망을 가지며 서둘러 말했다.

“그럼 제가 이 궁에서 특별한 사람이라는 건가요?”

제르딘은 와인 잔을 잠시 보다가 시선을 들어 발레린을 쳐다봤다.

“특별하다기보다는 조금 튀는 사람입니다.”

“그럼 튄다는 것도 왕자님께는 다르게 보인다는 말씀이죠?”

발레린이 잔뜩 기대하며 보자 제르딘은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공녀.”

“네?”

“제가 말하지 않았습니까?”

“뭘요?”

“괜히 저에게 사랑을 기대하지 말라고요.”

“하지만 왕자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공녀 같은 사람은 왕궁에서 처음 본 걸 그대로 말한 것뿐입니다. 어떤 감정도 없이요.”

그 말에 발레린은 기대하던 마음이 단숨에 꺼지는 듯했다.

“그러니 더 묻지 말고 그대로 받아들이세요. 아니면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게 더 편할 겁니다.”

발레린은 고개를 푹 숙였다. 기대하던 마음은 이제 완전히 재가 되어 사라지는 듯했다. 그럼에도 발레린은 여전히 희망을 버리지 못했다. 15년간 탑 안에 갇혀 있을 때도 발레린은 늘 기다렸다. 그 기다림을 생각하며 발레린은 고개를 들었다.

“왕자님, 그러면 한 가지만 말씀해 주실 수 있나요?”

제르딘이 차분히 눈을 맞추자 발레린은 이어서 말했다.

“왕자님께선 왜 그렇게 감정에 선을 긋는지 궁금해요. 그땐 사적인 일이라 했지만 이젠 왕자님과 결혼을 하니 저에게 말씀해 주실 수 있을까 해서요.”

“그렇게 궁금합니까?”

“네.”

발레린은 눈에 힘을 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르딘은 발레린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발레린은 기대하며 제르딘의 말을 기다렸다. 그녀의 눈빛이 식을 줄 모르자 제르딘은 발레린에게서 시선을 떼서 아직 줄어들지 않은 와인 잔을 보았다.

“어머니는 왕이 된 이후에 한 사람과 결혼했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죽자 제 아버지와 다시 결혼을 했는데 아버지는 다른 사람을 좋아하고 있었죠.”

생각보다 복잡한 관계에 발레린은 뭐라고 말해야 할지 가늠이 서지 않았다. 다행히 제르딘은 발레린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말을 이었다.

“왕궁에서는 특히 조심해야 할 게 있습니다.”

“뭔가요?”

“이루어지지 않을 사랑은 하지 않아야 하죠.”

발레린이 주의 깊게 보자 제르딘이 말했다.

“제 부모님이 그랬습니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사랑했지만 아버지는 어머니를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사랑해야 했지만 다른 사람을 사랑해서 궁에서 도망을 쳤죠.”

발레린이 굳은 얼굴로 보고 있자 제르딘이 입꼬리를 올렸다.

“어머니는 당장 아버지를 잡아서 왕족을 무시한 죄로 처벌해야 했지만 그러지 못했습니다. 여전히 아버지를 사랑하고 있다고 했었죠. 아버지를 원망하면서 말입니다.”

“…….”

“옆에서 계속 지켜보던 저는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한낱 감정 때문에 어머니는 정사도 제대로 못 돌보고 병이 들었고 늘 아버지만 원망하셨죠.”

제르딘이 와인 잔을 들어서 마셨다. 별거 없는 행동이었지만 묘하게 눈길을 끌었다. 몸에 밴 듯 우아한 몸짓이었다.

발레린이 유심히 지켜보자 제르딘이 시선을 들었다. 순간 하늘빛 눈동자와 마주쳤다. 전보다 조금은 감정이 묻어 나오는 듯했다. 발레린은 떨리는 마음으로 제르딘과 시선을 맞췄다.

“그래서 제가 모든 걸 다 해야 했습니다. 당시에도 배도스 공작이 많이 나섰습니다. 그 때문에 지금까지 제 정치 세력은 그다지 많이 커지지 못했죠.”

“…….”

“만약 어머니가 조금만 더 오래 살아 계셨다면 제 편을 더 끌어올 수 있었을 겁니다. 저는 나름대로 제 편을 끌어들이려고 준비하고 있었는데 어머니가 갑자기 돌아가시게 된 거죠.”

“하지만 지금은 누구보다 잘하고 계세요.”

제르딘이 피식 웃었다.

“그렇습니까?”

“네! 제가 본 역사서에서 왕자님 같은 분은 없었어요.”

“그러고 보니 『천년 왕국사』를 16번 완독하셨죠.”

“기억하고 계시네요!”

발레린은 눈을 빛내며 제르딘을 보았다. 이렇게 기억을 해 준다는 것 자체가 발레린에겐 기쁨이었다. 제르딘은 발레린을 한참 동안 보다가 이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먼저 가 보겠습니다.”

갑작스러운 말에 발레린은 몹시 당황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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