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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빛 저주의 공녀님-23화 (23/130)

23화

하늘빛 눈동자에는 딱히 감정이라는 것이 담겨 있지 않았다. 그저 지나가는 구름을 보는 것처럼 무감했다. 순간 발레린은 자신이 잘못했나 싶어서 급히 말했다.

“혹시 제가 말을 너무 많이 해서 기분이 상하셨나요?”

“아니요.”

“그럼 제 목소리가 너무 시끄러웠나요?”

“아니요.”

“그럼 대체…….”

“공녀.”

귓가를 자극하는 낮은 목소리였다. 발레린은 의아해하며 제르딘을 쳐다봤다. 여전히 맑은 하늘빛 눈동자는 발레린을 향해 있었지만 어쩐지 그의 표정은 딱딱하기 그지없었다. 발레린은 잔뜩 긴장하며 제르딘을 쳐다봤다.

그는 표정 변화 없이 발레린을 보며 말했다.

“부디 그 성격을 잃지 않길 바랍니다.”

발레린은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다. 그저 눈만 깜빡이고 있자 제르딘은 간단히 고개를 끄덕이곤 보좌관과 함께 복도를 나섰다. 발레린은 잠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경고인가 아니면 걱정인가.’

쉽사리 제르딘의 마음속을 읽을 수 없었다. 아까 회의장에서 자신의 편을 들어 줄 땐 제르딘이 한없이 가까운 듯했지만 이렇게 알 수 없는 말을 남기곤 떠나는 것을 보면 한없이 먼 존재 같기도 했다.

발레린이 눈썹을 살짝 찌푸린 채 고민하고 있을 때 그로프가 말했다.

“왕자는 이 궁전에서 온갖 일을 다 겪은 것 같습니다.”

그제야 발레린은 정신을 차리고서 주변을 둘러봤다. 이미 제르딘은 저 멀리 떠난 뒤였다. 발레린은 할 수 없이 몸을 돌려서 방으로 향했다.

발레린은 그로프가 한 말을 곰곰이 생각하다가 말했다.

“확실히 왕자님은 이곳에서 많이 고생을 하신 것 같긴 해. 아까 귀족들조차도 왕자님 편을 들어 주지 않았잖아.”

“그렇긴 했습니다. 다들 왕자가 한마디 하면 물어뜯으려고 하는 것처럼 들리기도 했고요.”

“그러게. 왕자님이 그나마 그 사람들보다 생각이 앞서서 다행이야. 그렇지 않았다면 나도 여기서 무사하지 못했겠지.”

“그런데 귀족들은 왜 그렇게 왕자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일까요?”

발레린은 역사서를 떠올렸다.

“귀족들은 왕족의 세력까지 자기 쪽으로 돌려서 자기들 권력을 더 공고히 하려고 그러는 거야. 그리고 지금은 왕자님의 기반이 약해서 더 그렇게 보여. 적장자이긴 하지만 왕족의 세력보다는 귀족의 세력이 너무 큰 거지.”

발레린은 은근히 역사가 반복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이전 왕국사에도 적장자이긴 했지만 왕족의 세력이 너무 약해서 귀족 세력에 의해 왕자가 물러난 전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 사람은 나이가 어린 사람이었다. 지금의 제르딘은 나이도 적당했고 심지어 머리까지 좋았다.

“그나저나 왕자님이 헤르틴 하녀장을 지키는 병사에게 센트릴 잎을 보급하는 건 어떻게 생각하셨을까?”

“저도 그건 놀랐습니다. 그러고 보면 독살은 반복되는 모양입니다.”

발레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한번 다짐했다. 왕자님을 꼭 제 손으로 지켜 주겠다고. 발레린은 이전보다 더 씩씩하게 방으로 걸어갔다.

04. 왕자의 소문

발레린은 왕정 회의에 다녀온 이후로 줄곧 조용하게 지냈다. 독 감별사로서 발레린에게도 그다지 별일은 없었다. 음식은 여전히 맛있었고 독은 더 발견되지 않았다.

제르딘과의 식사도 특별한 것은 없었다. 그는 발레린에게 친절하게 대하긴 했지만 묘하게 선을 긋는 태도를 지우지는 못했다.

발레린은 그런 면모를 볼 때마다 아쉽긴 했지만 티 내지는 않았다. 그저 제르딘의 얼굴을 보며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속이 벅차오르는 것이 사실이었다.

‘결혼식은 언제 할까.’

늘 발레린은 자기 전에 생각했다. 하지만 먼저 묻기에는 제르딘이너무 바빴고 괜히 독촉을 하는 것 같아 발레린은 얌전히 기다렸다. 늘 기다리는 것은 발레린이 15년간 잘하던 일이기도 했다.

그렇게 발레린이 끝없이 기다릴 때쯤이었다. 그날도 어김없이 발레린은 일찍 일어나 운동을 하고 있었다.

똑똑.

발레린은 곧장 방독면을 쓰고는 말했다.

“들어와.”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다름 아닌 전용 하녀 루네스였다. 그녀는 밝은 얼굴로 발레린에게 다가왔다.

“공녀님! 오늘 아침 식사에 왕자님께서 긴히 하실 말씀이 있으시대요.”

“할 말?”

“네! 제가 잠깐 왕자님 집무실 근처를 지나오는데 보좌관님이 저를 부르셔서 말씀하셨어요. 오늘 아침에는 꼭 공녀님이 식사 시간에 참석해 주셨으면 한다고요.”

발레린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혹시 심각한 분위기는 아니었지?”

“보좌관님은 기분이 좋아 보이셨어요! 웃으시기도 하고요.”

그 말을 듣자 발레린은 그나마 기분이 나아지는 듯했다. 그로프도 안심했는지 낭랑한 목소리로 울었다.

“개꿀개꿀.”

발레린은 그로프를 보며 싱긋 웃고는 드레스를 갈아입었다. 늘 하던 대로 검은 목걸이를 걸고 보라색 드레스를 입었다. 루네스는 발레린을 보며 감탄하듯 내뱉었다.

“역시 공녀님은 보라색이 정말 잘 어울리세요!”

그러곤 방독면에 시선을 두었다. 루네스는 조심스럽게 발레린을 살피며 말했다.

“방독면만 없다면 정말로 잘 어울리실 텐데…….”

발레린은 물끄러미 거울을 바라봤다. 방독면이 다 가리고 있긴 하지만 발레린은 개의치 않았다.

“내가 이걸 안 하면 사람들이 위험해지잖아. 어쩔 수 없지.”

저주가 풀리지 않는 이상 발레린은 어쩔 수 없었다. 어렸을 때는 초록빛 저주가 무척이나 거슬렸다. 어머니는 그저 행운이라고 말했지만 발레린은 영 믿을 수 없었다.

‘내 저주는 행운이 아니라 말 그대로 사람들이 가까이에 오지도 않는 저주니까.’

하지만 지금 발레린은 어느 누구보다 행복했다. 만약 초록빛 저주가 아니었다면 천년의 이상형인 왕자님 곁에 있지도 못할 것이다. 거기다 발레린의 완벽한 이상형을 만나지도 못한 채 살아갈 수도 있었다.

발레린은 미소를 짓고는 루네스에게 말했다.

“만약 이 저주가 아니었다면 나는 이곳에 오지도 못했을 거야. 결국 내 저주 때문에 왕자님의 독 감별사가 된 것이기도 하니까.”

루네스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긴 해요. 공녀님이 아니었다면 이 왕궁이 더 시끄러워졌을 것 같아요.”

기분 좋은 말에 발레린은 기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발레린이 방을 나서자 루네스가 발레린의 뒤를 따르며 물었다.

“공녀님, 그래도 저주는 풀고 싶지 않으세요?”

“풀고 싶기는 하지만 지금은 딱히 방법이 없어.”

“방법이라면…….”

“나는 태어날 때부터 저주에 걸렸는걸. 심지어 왜 저주에 걸렸는지도 몰라. 어머니는 누구보다 강력한 마력을 가진 사람이었지만 아버지는 그저 귀족일 뿐이었으니까.”

그때 어깨 위에 앉아 있던 그로프가 말했다.

“그러고 보면 주인님의 저주는 누군가 작정하고 건 게 아니라 그저 운이 나빠서 걸린 것 아닙니까?”

“어렸을 땐 그렇게 생각했는데 이젠 그것도 모르겠어. 왜 저주에 걸린 건지도 모르니까.”

가만히 따라오던 루네스가 끼어들었다.

“그럼 공녀님, 제가 저주를 푸는 방법을 찾아볼까요?”

루네스의 눈빛이 반짝였다. 생각보다 적극적인 태도였다.

“정말 찾을 수 있어?”

“장담할 순 없지만 예전에 비슷한 일을 한 적 있어요. 그땐 어머니의 병에 좋은 약초를 찾는 데 매진했는데 꽤 좋은 약초를 많이 알아서 병이 많이 호전됐거든요.”

“하지만 저주 푸는 방법을 찾기는 어려울 거야. 나도 수많은 책을 읽어 봤는데 내 저주에 대한 답은 찾을 수 없었어. 심지어 우리 가문에 얽힌 원한도 없었고.”

발레린은 15년 동안 탑 안에서 많은 책을 읽었다. 하지만 그중에 발레린의 저주에 대한 답은 하나도 없었다. 역사서에도 저주에 걸린 사람들은 그저 누군가의 원한으로 걸렸다고 할 뿐, 다른 내용은 없었다.

사르티아 가문의 족보와 함께 여러 책을 봐도 누군가의 원한은 없었고, 심지어 사르티아 가문에서 저주에 걸렸던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발레린은 마음속으로 다짐하듯 말했다.

“아마 찾을 수 없을 거야.”

“하지만 그래도 찾다 보면…….”

“지금은 내 저주를 풀고 싶지 않아.”

루네스가 멈칫하며 발레린을 쳐다봤다. 그녀는 꽤 놀란 얼굴이었다. 발레린은 싱긋 웃고는 그로프를 쳐다보며 말했다.

“만약 내가 저주에 걸리지 않았다면 그로프와 친하게 지내지도 못했을 거고 지금 왕자님을 도와줄 수도 없었을 거야. 그리고 나는 아직도 할 일이 있으니까.”

어쨌든 발레린은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지금 생활이 만족스러웠다. 비록 방독면을 쓰고 사람들을 만나야 하는 처지이긴 하지만 말이다.

발레린은 여전히 말없이 멍하니 보는 루네스를 보며 말했다.

“그래도 나를 도와주려는 건 고마워.”

마침 정찬실이 가까워졌다. 그제야 루네스는 황급히 발레린에게 문을 열어 주었다. 발레린은 고맙다고 말한 뒤 활기찬 걸음으로 안으로 들어갔다.

제르딘은 신문을 보고 있었다. 발레린이 들어서자 마침 그가 알아차렸는지 고개를 들었다. 하늘빛 눈동자가 유난히 맑아 보였다. 이마 사이로 살짝 흘러내린 금발이 은근히 눈길을 끌었다.

발레린은 두근대는 마음으로 의자에 앉았다. 그녀가 앉자마자 제르딘이 말했다.

“방독면은 벗어도 됩니다.”

제르딘은 늘 그렇게 말했다. 그동안 발레린은 먼저 벗기를 주저했지만 오늘만은 제르딘의 말을 들으며 방독면을 벗었다. 그러곤 냄새를 킁킁 맡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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