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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빛 저주의 공녀님-22화 (22/130)

22화

독 중독. 발레린은 어딘가 꺼림칙했지만 차분히 물었다.

“헤르틴 하녀장이 누군지 알 수 있을까요?”

“헤르틴 하녀장은 루네스를 독살하려는 혐의와 함께 독을 함부로 숨겼다는 의혹을 받는 중이었습니다.”

그제야 발레린은 헤르틴이 누군지 떠올렸다. 처음 왕궁에 왔을 때 독 냄새를 따라갔다가 언뜻 본 사람이었다.

“그런데 독살이라니요? 누군가 독을 먹였다는 말인가요?”

“아직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고 조사 중입니다.”

“그런데 왕자님께선 왜 저를 부르시는 건가요?”

“그건 저희를 따라오시면 아십니다.”

꽤나 강경한 병사의 말에 발레린은 할 수 없이 병사들을 따라나섰다. 발레린은 독살 사건과 연관된 옛 역사를 생각했다. 독살 사건은 왕궁에서 가끔 있던 일이었다.

지금처럼 일주일에 한 번 꼴로 일어나는 것은 아니었지만, 대체로 입을 열면 안 되는 이에게 독을 먹인 뒤 완전히 입을 닫게 만들었다.

발레린은 어깨 위에 있는 그로프에게 작게 속삭였다.

“헤르틴 하녀장이 꽤 많은 것을 알고 있었나 봐.”

“그런 것 같긴 합니다. 혼자 그 모든 일을 저지르지는 않았겠죠. 분명 위에서 누군가 명령했을 거고요.”

“하긴 하녀장이 혼자 생각하고 저지르기에는 너무 악독하고 목적이 불분명해. 심지어 루네스는 하녀장과 많이 얽힌 것 같지도 않으니까.”

그러니까 하녀장이 독단적으로 일을 저지르기에는 명분이 없었다. 결국 루네스를 죽이려고 하던 것도 최종적으로는 발레린에게 돌린 화살과 비슷했다.

발레린은 찝찝한 마음으로 병사를 따라갔다. 이내 그들은 커다란 문 앞에 멈춰 섰다. 발레린이 작게 감탄하는 사이 문이 완전히 열렸다. 병사는 옆에서 고개를 숙였다.

“들어가시면 됩니다.”

발레린은 감사 인사를 한 뒤 안으로 들어갔다. 넓은 회의장이었다. 네모난 책상에 내로라하는 귀족들이 앉아 있었고 상석에는 제르딘이 있었다. 그는 여느 때보다 인상이 날카롭고 예민해 보였다.

더구나 회의장 안은 시장 바닥보다 더 시끄러웠다.

“발레린 공녀가 어젯밤에 헤르틴 하녀장을 독살한 게 틀림없습니다! 심지어 헤르틴이 먹었던 독은 발레린 공녀가 내뿜는 독과 비슷하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때 사르티아 공작이 나서며 말했다.

“발레린이 굳이 왜 헤르틴 하녀장을 독살하겠습니까? 심지어 발레린은 헤르틴 하녀장을 고발한 사람인데요.”

“하지만 독성분이라는 것은 무시 못 하지 않습니까? 분명히 헤르틴 하녀장에게서 발견된 독은 발레린 공녀가 가지고 있는 독으로…….”

“대체 같은 말을 몇 번이나 반복하는 겁니까?”

발레린은 잠시 놀라서 회의장을 멍하니 바라봤다. 제 아버지가 자신 외에 저렇게 소리를 지르는 모습은 처음 봤다. 그러고 보면 도저히 말이 이어지지 않을 만큼 질리는 말싸움이었다.

그사이 보좌관이 발레린을 보고서 황급히 그녀를 이끌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무슨 일인가요?”

발레린이 조심스레 묻자 보좌관이 작게 속삭였다.

“지금 헤르틴 하녀장 독살 사건의 범인으로 공녀님을 의심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말을 해도 듣지 않아, 왕자님께서는 차라리 공녀님이 오셔서 직접 해명하기를 원하십니다.”

발레린은 해명하는 것도 그렇지만 자신을 이렇게 막무가내로 범죄자 취급하는 것에 어이가 없었다. 그럼에도 발레린은 미소를 지으며 주변을 살폈다.

귀족들은 발레린을 힐끗 보면서도 고개를 빳빳이 들었다. 눈이 마주쳐도 인사는커녕 시선을 피하기 바빴다. 발레린은 일부러 밝게 웃으며 인사를 했다. 하지만 받아 주는 사람은 처음 보는 젊은 귀족뿐이었다.

그는 어색하게 고개를 숙였다. 발레린은 환하게 웃으며 인사를 한 뒤 보좌관을 따라서 제르딘 가까이 섰다. 마침 제르딘이 발레린을 보았다. 그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말했다.

“공녀를 부른 이유는 간단합니다. 귀족들이 대체로 공녀를 믿지 못해서 공녀가 직접 이야기해 주었으면 합니다.”

그때 보좌관이 다가와 작게 속삭였다.

“공녀님, 그저 있는 사실만 말씀해 주셔도 됩니다. 만약 말씀드리기 곤란하다면 어차피 왕자님께서…….”

“아니에요. 그래도 제가 여기까지 왔으니 말은 해야죠.”

발레린은 빙긋 웃으며 귀족들을 보았다. 귀족들은 꽤 기대를 하는 모양인지 발레린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발레린은 쏟아지는 시선을 즐기며 말했다.

“저는 헤르틴 하녀장의 독살과 전혀 상관없습니다.”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주변에서는 거세게 말이 나왔다. 발레린은 눈을 깜빡이며 주변을 둘러보다가 더 큰 목소리로 말했다.

“제 독성분이라고 해 봤자 흔한 독입니다. 그리고 제가 하녀장을 죽였다는 것은 전혀 말이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어젯밤에 저는…….”

그때 보좌관이 발레린의 팔을 급히 잡았다. 발레린이 놀라며 보자 보좌관이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죄송하지만 어젯밤 이야기는 말씀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왕자님의 아주 비밀스러운 일이라…….”

보좌관은 무척 미안한 듯 보였다. 하지만 어젯밤 제르딘의 향주머니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면 발레린은 더 할 말이 없었다. 심지어 이 상황에선 보좌관도 그녀의 무죄를 입증해 줄 수 없었다.

발레린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귀족들은 그나마 이런 일에는 인내심이 있는지 발레린을 기다려 주었다. 다만 그들의 표정은 이미 넘어올 게 넘어왔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무척이나 자신만만해 보였는데 한편으론 오만함이 철철 넘쳤다.

발레린은 그동안 읽었던 역사책을 생각했다. 특히 독살에 관한 역사는 발레린이 매일 봤기 때문에 금방 떠올랐다.

“혹시 헤르틴 하녀장이 음식을 먹다가 죽지 않았나요?”

주변에 있던 귀족이 놀라며 말했다.

“그걸 어떻게 아는가? 역시 발레린 공녀가 죽인 것이…….”

“만약 제가 죽였다면 그 사람은 곧바로 뒤로 넘어갔을 거예요. 이 사실은 아버지는 물론 헬릭스 님에게도 나타났던 현상이고요.”

큼큼 기침 소리가 들렸다. 발레린의 아버지인 사르티아 공작이 민망한 듯 시선을 피했다. 발레린은 개의치 않고 밝은 얼굴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여태껏 왕궁에서 일어난 사례를 보면 대부분 음식으로 독살을 해 왔어요. 그게 가장 깔끔하면서도 남의 눈에 띄지 않는 방법이니까요.”

그 말에 주변에는 말이 없었다. 귀족끼리 서로 눈치를 보며 먼저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때 제르딘의 차분한 목소리가 울렸다.

“공녀 말대로 헤르틴 하녀장은 음식을 먹다가 죽었어. 만약 발레린 공녀가 죽였다면 그 사람은 그나마 센트릴 잎으로 살 수도 있었겠지. 헬릭스처럼.”

발레린이 놀란 얼굴로 제르딘을 돌아보자 제르딘이 말을 이었다.

“심지어 그곳에서 일하던 병사들이 가지고 있던 센트릴 잎으로 처치를 했음에도 헤르틴 하녀장은 죽었지.”

제르딘은 특히 배도스 공작을 쳐다봤다. 배도스 공작은 날카로운 시선으로 보고 있었으나 그의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제르딘은 싱긋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만큼 헤르틴 하녀장에겐 발레린 공녀의 독보다 더 독한 독을 사용했다고 볼 수 있지. 이걸 발레린 공녀의 독과 비슷하다고 결론을 내린 조사관은 거짓말을 한 거고.”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주변이 술렁였다. 발레린은 멍하니 제르딘을 쳐다봤다. 생각지도 못했는데 제르딘이 도와준 격이었다. 발레린은 저도 모르게 벅차올라서 미소를 지었다.

그때 제르딘이 일어났다.

“발레린 공녀가 헤르틴 하녀장을 독살하지 않았다는 증거가 명백하니 회의는 이것으로 마치겠다.”

의자에 앉아 있던 귀족들이 서둘러 일어났다. 발레린은 멍하니 있다가 보좌관이 손짓하자 곧바로 제르딘의 뒤를 따라갔다.

회의장을 나서자마자 제르딘이 발레린을 돌아봤다.

“공녀를 갑자기 부른 걸 용서하세요. 상황이 이렇다 보니 어쩔 수 없었습니다.”

“아니에요. 오히려 직접 해명할 기회를 주셔서 감사한걸요. 거기다 제가 무결하다는 걸 덧붙여 말씀해 주셔서 오히려 제가 더 감사해요.”

제르딘은 차분히 고개를 끄덕인 뒤 복도를 걸었다. 발레린은 그의 곁을 따라가며 물었다.

“그런데 병사가 센트릴 잎을 어떻게 가지고 있었나요?”

“요즘 들어 독살이 자행되고 있으니 분명 헤르틴 하녀장에게도 그럴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하녀장을 지키는 병사에겐 제가 특별히 센트릴 잎을 지급했고요.”

제르딘의 철저한 준비성에 발레린은 활짝 웃었다.

“역시 왕자님이시네요! 저는 그런 건 생각지도 못했거든요.”

발레린은 제르딘 옆에서 종알종알 떠들었다. 여태껏 제르딘 같은 사람은 보지 못했기에 발레린은 그저 신나기만 했다.

“여러 책을 봐도 왕자님 같은 사람은 보지 못했어요. 어떻게 이렇게 완벽하실 수 있어요? 심지어 저를 여기 부르신 것도 정말로 잘 생각하신 것 같아요.”

발레린은 제르딘을 살폈다. 그는 딱히 발레린의 말을 막을 의지는 없어 보였다. 발레린은 환하게 웃으며 나머지 말을 했다.

“물론 조금 당황스럽긴 했지만 그래도 왕자님이 아니었다면 이렇게 완벽하게 해명할 수 없었을 것 같아요. 어쨌든 제 목소리가 첨가되어야 귀족들도 그나마 믿어 주겠죠.”

제르딘이 멈춰 섰다. 그는 발레린을 잠시 내려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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