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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빛 저주의 공녀님-21화 (21/130)

21화

“공녀님, 이 드레스를 세탁하라고 할까요?”

“아니, 괜찮아. 그나저나 수고했어.”

“뭘요, 혹시 더 필요하시면 부르세요.”

발레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루네스는 밝은 얼굴로 인사를 하고는 방을 나갔다. 한순간 주변이 조용해졌다. 그때 그로프가 말했다.

“그럼 누군가 흰 드레스에 독이 든 보랏빛 염료를 부어서 탑에 버렸다는 말씀입니까?”

“그런 것 같아.”

“그럼 해인저 모녀가 한 짓 아니겠습니까? 탑에 독을 넣어서 음식을 주는 거나 탑과 관련된 모든 것은 해인저 모녀가 관리했으니까요.”

발레린은 곰곰이 생각했다. 이미 지나간 일이 갑자기 훅 다가온 것이 당황스럽긴 했지만 그래도 그로프의 말은 나름대로 일리가 있었다.

“하긴 보라색 염료는 무척 비싸니까. 차라리 독성이 강한 퍼핀 독으로 천을 염색하면 값이 더 싸겠지.”

“그럼 확실히 해인저 모녀가 한 게 맞는군요.”

발레린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발레린은 개의치 않고 몸을 돌렸다.

“그러고 보면 내가 보라색 드레스를 좋아하는 이유가 분명했어.”

“무슨 이유 말입니까?”

“결국 나와 같은 기운을 가진 드레스잖아. 지금은 오래되어서 그 성분이 빠졌겠지만.”

발레린은 빙긋 웃었다.

“역시 끌리는 건 이유가 있다니까. 왕자님도 그렇고.”

결국 끝에는 제르딘 생각이었다. 발레린은 언제 그랬냐는 듯 활기찬 걸음으로 방을 나섰다. 정찬실은 이전에 왕궁을 둘러볼 때 봤던 기억이 나서 대번에 찾아갈 수 있었다.

정찬실에 들어서자 제르딘이 마침 앉아 있었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식탁 위에 있는 장식을 보고 있었다. 발레린은 황급히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왕자님, 제가 늦었네요.”

제르딘은 고개를 들어 발레린을 쳐다봤다.

“아닙니다.”

발레린은 제르딘을 유심히 쳐다봤다. 그는 전과 다르게 그다지 피곤한 기색도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더 깔끔해 보였다.

‘몸은 괜찮으신 건가.’

그때 발레린의 시선을 느꼈는지 제르딘이 그대로 그녀의 눈을 응시했다. 발레린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내렸다.

“앞으로 음식은 저와 같이 먹을 겁니다. 제 독 감별사인 동시에 저와 결혼하게 될 테니까요.”

결혼이라는 말에 발레린은 괜히 설레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르딘은 발레린을 물끄러미 보며 물었다.

“혹시 이곳에 독이 들어간 음식이 있는 겁니까?”

발레린은 고개를 들어 킁킁 냄새를 맡았다. 딱히 독 특유의 과일 향은 느껴지지 않았다.

“이곳에 독 있는 음식은 없어요. 마음껏 드셔도 돼요.”

발레린은 활짝 웃었다. 곧 발레린 앞에 음식이 놓였다. 옆에 있는 그로프는 이미 여러 마리의 귀뚜라미를 잡아먹은 후였다. 발레린은 포크를 쥔 채 그로프를 보다가 문득 고개를 들었다. 제르딘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이전부터 보고 있었는지 꽤 집요한 시선이었다.

“혹시 제가 예법에 어긋났나요?”

발레린이 불안하게 물었지만 제르딘은 그저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예법이라니요?”

“저를 뚫어지게 쳐다보셔서요. 혹시 제가 실수했나 싶어서요.”

제르딘의 얼굴이 미세하게 굳었다. 그는 어딘가 당황한 것 같기도 했다. 처음 보는 제르딘의 반응에 발레린은 의아해서 그를 살폈다. 제르딘은 살짝 넋이 나간 듯 앞에 있는 식탁 장식을 보고 있었다.

그때 하인들이 모두 인사를 한 뒤 나갔다. 이내 안에는 발레린과 그로프, 제르딘만 남았다.

잠시 조용한 분위기가 흘렀다. 그때 제르딘이 시선을 들었다. 아까와 다르게 그의 눈빛은 차분히 내려앉아 있었다. 묘하게 보이던 감정도 이젠 보이지 않았다.

발레린이 멍하게 보고 있자 제르딘이 말했다.

“저와 식사 중에는 방독면을 벗어도 됩니다. 어제도 위험하지 않았으니까요.”

“하지만 정말 괜찮으세요?”

제르딘은 간단히 고개를 끄덕였다. 발레린은 어제 제르딘이 생각났다. 그는 독 냄새와 비슷한 향을 누구보다 잘 알아내서 향주머니에 독이 들었다고 착각했었다.

“어젯밤은 잘 주무셨나요?”

“네, 잘 잤습니다.”

제르딘의 목소리는 꽤 부드러웠다. 정말 어제는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나마 다행이네요. 어제는…….”

발레린은 말하다 말고 입을 닫았다. 보좌관이 말을 하지 말라고 한 것이 떠오른 탓이다. 제르딘은 궁금한 듯 발레린을 응시했다. 발레린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에요.”

제르딘은 잠시 발레린을 보다가 말했다.

“공녀, 한 가지 알아 둬야 할 게 있습니다.”

차분한 말이었지만 은근히 선을 긋는 듯한 어조였다. 발레린이 시선을 맞추자 제르딘이 말을 이었다.

“앞으로 제가 하는 행동은 공녀를 좋아해서가 아니라 남들 눈에 적당히 신경 쓰이지 않기 위해 하는 행동이라는 걸요.”

발레린은 마음이 바늘로 콕콕 찌르는 것처럼 아팠지만 개의치 않고 물었다.

“그럼 이렇게 음식을 같이 먹는 것도 그런 건가요?”

제르딘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원로원 귀족들은 공녀를 내쫓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아침이라도 같이 먹으면서 나름대로 사이가 좋은 걸 보여 주고자 합니다.”

발레린은 마음이 힘없이 꺼지는 것 같았으나 애써 아무렇지 않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제르딘은 사랑을 기대하지 말라 했으니 어쩌면 제르딘의 말은 이전과 변함없는 말이었다. 그와 다르게 발레린은 저도 모르게 제르딘에게 기대를 하고 있었다.

발레린은 힐끗힐끗 제르딘을 보았다. 제르딘은 왕족답게 식사 예절에 어긋남이 없었다. 그는 쩝쩝거리며 먹지 않았고 고기를 써는 손짓도 거침없었지만 동시에 우아한 분위기가 있었다.

하지만 제르딘은 먹는 내내 발레린을 보지 않았다.

‘그래도 한 번이라도 봐줄 줄 알았는데.’

발레린은 아쉽긴 했지만 더 마음 쓰지 않고 제르딘을 조금씩 관찰했다. 그래도 잘생긴 왕자님의 얼굴은 어디 가지 않았다. 그렇게 발레린이 은근한 미소를 짓고 있을 때였다.

“개꿀개꿀.”

갑자기 우는 그로프에 발레린은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주인님, 음식 식겠습니다.”

그러고 보니 그로프는 이미 다 먹은 뒤였다. 발레린은 더 늦지 않기 위해 부지런히 포크를 움직였다.

그렇게 발레린이 포크를 내려놓을 때쯤이었다. 제르딘은 일어나며 말했다.

“그럼 먼저 가 보겠습니다.”

제르딘은 예법에 맞게 인사를 한 뒤 정찬실을 나갔다. 발레린이 차마 잡을 틈도 없었다. 바람처럼 사라지는 제르딘에 발레린은 멍하니 문을 바라봤다.

“많이 바쁘신가 봐.”

“그러게 말입니다. 디저트까지 같이 먹고 가는 게 예의 아니겠습니까?”

마침 발레린 앞에 눈꽃 같은 하얀 아이스크림이 놓였다. 발레린은 내심 제르딘이 먼저 간 것이 마음에 걸렸지만 그래도 제르딘과 함께 있으면서 그를 본 것만으로도 마음속이 분홍빛으로 물드는 것처럼 행복감이 피어올랐다.

심지어 제르딘을 생각만 해도 발레린은 기분이 좋았다.

발레린은 작은 행복감에 젖으며 숟가락을 들었다. 아이스크림이 입 안으로 들어가자 발레린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맛있습니까?”

그로프가 궁금해하며 물었다. 발레린은 눈에 힘을 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맛있는 아이스크림은 처음 먹어 봐. 입 안에 들어가자마자 눈 녹듯이 녹는데…….”

그로프가 눈을 멀뚱멀뚱 뜨며 아이스크림을 쳐다봤다. 발레린은 한 숟가락을 떠서 그로프에게 주었다.

“먹어 볼래?”

그로프는 가까이 와서 이리저리 살피더니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냄새는 맛있는 냄새가 나지만 왠지 제가 먹어선 안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배가 부르기도 하고요.”

발레린은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배고프면 언제든지 말해.”

“네, 역시 주인님밖에 없습니다.”

그로프는 개꿀개꿀 울었다. 발레린은 남은 아이스크림을 마저 먹었다. 세상에 살면서 이렇게 맛있는 아이스크림은 처음 먹어 보았다. 그나마 맛있는 아이스크림 덕분에 발레린은 기분 좋게 식사를 마칠 수 있었다.

발레린은 정찬실에서 나온 뒤에 바로 방으로 돌아갔다. 혹시라도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제르딘에게 누를 끼칠 행동을 할까 싶어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거기다 헬릭스 사건 때문에 돌아다니는 것이 조심스러운 것은 사실이었다.

대신 발레린은 방 안에서 이리저리 운동을 했다. 그렇게 한창 운동을 하던 참이었다. 갑자기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확 열렸다.

발레린은 놀라며 문을 쳐다봤다. 여러 방독면은 쓴 병사들이 서 있었다. 왕자의 방 문 앞에서 있던 왕실 친위대의 병사 옷과 비슷했다. 붉은 천에 황금 인장이 달린 병사 옷이었다.

발레린은 이 상황이 영 당황스러웠다. 발레린이 이리저리 보는 사이 병사 중 하나가 앞을 나섰다.

“방독면을 쓰고 저희를 따라와 주십시오.”

우선 발레린은 방독면을 쓰고 물었다.

“무슨 일이 있나요?”

“왕자님의 명령입니다.”

“왕자님이요?”

도저히 발레린은 믿을 수 없었다. 이렇게 무서운 사람들이 갑자기 찾아온 상황에 아무래도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발레린이 멍하니 바라보자 앞에 있던 병사가 설명했다.

“지금 헤르틴 하녀장이 독 중독으로 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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