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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빛 저주의 공녀님-20화 (20/130)

20화

“그렇긴 하지만 왜 하필 늑대 수인일까요?”

“예전부터 매시드 왕국 수도에 늑대 수인이 많이 살았대. 지금은 그들이 사라졌다고 하지만 난 여전히 이곳에 살아 있을 것 같아. 나같이 저주받은 사람도 있으니까.”

잠시 주변이 조용해졌다. 발레린은 다시 한번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행히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발레린은 아까 보좌관이 한 말을 기억하며 그로프에게 말했다.

“보좌관님도 내가 들었던 말을 조심하라고 했으니 우리도 이야기를 더 꺼내면 안 될 것 같아.”

그로프는 고개를 끄덕였다.

발레린이 방에 돌아왔을 때 시간은 새벽 1시였다. 발레린은 지친 몸을 침대에 던졌다. 침대 스프링은 발레린을 부드럽게 받아 주며 꿈속으로 인도했다.

발레린은 습관처럼 눈을 떴다. 시계를 확인하니 아침 6시였다. 늘 탑 안에서 일찍 일어나던 것이 굳게 박인 듯했다.

발레린은 일어난 김에 제자리에서 몸을 움직이며 운동을 했다. 그리고 막 씻고 나오자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발레린은 방독면을 쓴 뒤 말했다.

“들어와.”

마침 들어온 사람은 이전에 쓰러졌던 발레린의 전용 하녀 루네스였다.

루네스는 발레린을 보자마자 활짝 웃으며 물었다.

“잘 주무셨어요?”

발레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왕궁의 침대는 탑에 있는 침대보다 훨씬 좋았다. 은근히 몸이 상쾌하면서도 무거운 느낌도 없었다.

루네스는 주변에 있는 커튼을 젖히며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왕자님께서 같이 아침 드시기를 청하셨어요.”

순간 발레린은 제르딘 몸이 괜찮은가 물어보려다가 말았다. 어제 보좌관은 분명 말하지 말라고 했다. 비록 루네스는 발레린의 전용 하녀이긴 했지만 어쨌든 왕궁 역사를 보면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었다.

“드레스는 뭘 입으시겠어요?”

루네스는 마침 옷장을 열었다. 밝게 웃던 얼굴이 단숨에 굳었다. 루네스는 곧장 발레린에게 말했다.

“보라색 드레스밖에 없는데 제가 곧장 다른 드레스로…….”

“아니야. 어차피 난 보라색 드레스밖에 안 입어.”

“네?”

“여태껏 보라색 드레스만 입었거든. 다른 색 드레스는 입고 싶지도 않고.”

그때 가만히 지켜보던 그로프가 울었다.

“개꿀개꿀.”

루네스는 깜짝 놀라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발레린은 옆에 있는 그로프를 들어 올려서 말했다.

“울음소리가 특이한 독 개구리 그로프야. 이전에도 한번 소개했을 거야.”

“죄송해요, 공녀님. 제가 그땐 정신이 없어서…… 그나저나 독 개구리라고요?”

“독 개구리이긴 하지만 만지지만 않으면 괜찮아. 그로프도 사람에게 먼저 다가가지 않아서.”

발레린은 그로프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로프는 발레린에게 고개를 숙인 뒤 루네스를 보며 울었다.

“개꿀개꿀.”

루네스는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 이내 그녀는 그로프를 잠시 보았다. 그나마 아까보다는 루네스의 얼굴이 심각하지 않았다.

“이렇게 새빨간 개구리는 처음 봐요. 몸 색이 엄청 튀네요.”

“아마 조심하라고 그렇지 않나 싶어. 내가 보라색 드레스를 입는 이유이기도 하고.”

발레린은 활짝 웃었다. 농담처럼 한 말이지만 루네스는 눈을 깜빡이며 발레린에게 다가왔다.

“공녀님, 저는 공녀님이 전혀 무섭지 않아요! 오히려 저는 공녀님이 어딜 가든지 가까이에서 따라다닐 거예요.”

그러곤 루네스는 발레린의 손을 덥석 잡았다. 발레린은 놀라서 가만히 루네스를 쳐다봤다. 발레린이 아무 말 하지 않자 루네스는 서둘러 손을 놓았다.

“죄송해요. 공녀님, 제가 너무 생각 없이…….”

“아니야. 오히려 그렇게 말해 줘서 고마워.”

발레린이 미소를 짓자 루네스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저는 공녀님이 전혀 위험하지 않다고 생각해요. 제 목숨까지 살려 주셨고요. 심지어 그때도 가까이 있었는데 저는 지금 멀쩡하잖아요?”

발레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그런데 그때 독은 완전히 제거된 거야?”

“의사 말로는 독은 거의 제거가 되었다고 해요. 그나마 공녀님이 일찍 센트릴 잎을 주셔서 제가 살 수 있었대요.”

“다행이네.”

“네, 공녀님 아니었으면 저는 억울하게 죽었을지도 몰라요. 심지어 저는 궁에 들어온 지 한 달밖에 되지 않았거든요.”

“한 달밖에 되지 않았다고?”

루네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무슨 생각이 났는지 루네스는 활기차게 말했다.

“제가 워낙 일을 잘해서요. 그래서 아마 저를 뽑지 않았나 싶어요.”

그때 그로프가 발레린에게 고개를 돌렸다. 발레린과 눈이 마주치자 그로프가 침착하게 말했다.

“주인님, 아무래도 한 달밖에 일하지 않은 사람이 주인님을 보필한다는 것이 의아합니다. 적어도 주인님은 공녀님이고 크게 보면 왕비가 되실 분인데…….”

“그로프, 어차피 나는 왕자님을 도와주기로 하고 자유를 약속받았잖아. 거기다 왕자님은 사랑을 기대하지 말라고 했으니까.”

“그래도 이런 식으로 주인님 곁에 초보자를 두자니 걱정됩니다.”

발레린은 미소를 지으며 그로프에게 속삭였다.

“괜찮아, 그로프. 어차피 나는 루네스가 편해. 다른 하인들은 이렇게까지 나에게 가까이 올 것 같지는 않거든.”

그로프는 루네스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아까부터 루네스는 발레린과 그로프를 호기심 넘치는 눈빛으로 보고 있었다. 이내 그로프는 발레린에게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공녀님 말씀이 맞습니다. 확실히 루네스는 공녀님에게 적의는 보이지 않는 것 같으니까요.”

그때 루네스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공녀님?”

발레린이 고개를 돌리자 루네스가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혹시 제가 실수했다면 말씀해 주세요. 저는 단지 공녀님을…….”

“아니야. 오히려 날 살갑게 대해 줘서 고마워.”

그제야 루네스가 활짝 웃었다. 루네스는 곧장 옷장으로 걸어갔다.

“그럼 공녀님, 제가 드레스 입는 것 도와 드릴게요.”

발레린은 낯설긴 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탑 안에 있을 땐 누군가 이렇게 시중을 들지도 않았다. 심지어 아침 일찍 깨워 주지도 않았다. 일찍 일어나서 운동하고, 드레스를 입는 것은 모두 발레린이 직접 해야 하는 일이었다.

루네스가 보라색 드레스를 가져왔다. 발레린은 어색한 몸짓으로 루네스가 하는 대로 드레스를 갈아입었다. 그러곤 발레린이 나가려 하자 루네스가 황급히 말했다.

“공녀님! 머리도 빗어 드릴게요. 그리고 액세서리도요.”

“액세서리?”

발레린이 돌아보자 루네스가 마침 들고 온 상자를 열었다.

“왕실 보석이라고 해요. 특별히 왕자님께서 하사하셨어요.”

상자 안에는 액세서리가 무척이나 많았다. 수많은 다이아몬드가 박힌 목걸이에서부터 커다란 에메랄드가 돋보이는 반지. 그러나 다른 어떤 화려한 보석보다 발레린의 눈길을 끄는 것은 따로 있었다.

바로 검은 선이 규칙적으로 얽힌 목걸이였는데 목에 걸면 목에 완전히 닿는 형식이었다. 발레린이 검은 목걸이에서 눈을 떼지 못하자 루네스가 천천히 들어 올렸다.

“이걸로 하시겠어요?”

발레린은 밝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루네스는 조심스레 발레린의 목에 목걸이를 걸어 주었다. 거울을 보자 보라색 드레스와 무척이나 잘 어울려 보였다. 거울 앞에서 지켜보던 그로프도 입을 열었다.

“주인님, 무척 잘 어울립니다.”

발레린은 활짝 웃으며 그로프를 손에 들어 올렸다.

“고마워, 그로프.”

발레린은 밝은 얼굴로 그로프를 어깨에 두었다. 마침 루네스가 발레린의 머리를 빗어 주었다.

“이 세상에 공녀님 외에 이렇게 과감한 색으로 드레스를 입는 사람은 없을 거예요. 물론 공녀님이 누구보다 잘 어울리기도 하고요.”

“고마워.”

“공녀님은 다른 색 드레스는 입을 생각이 없으신가요?”

“탑 안에 갇힌 뒤로 보라색 드레스만 입었거든. 그래서 다른 색 드레스를 입으면 익숙하지 않을 것 같아. 기분도 안 좋을 것 같고.”

탑 안에서 입은 보라색 드레스도 버려진 드레스였다. 저런 색의 드레스를 누가 입나 싶어서 버린 듯한데 발레린은 유난히 보랏빛 드레스가 눈에 들어왔다. 다행히 보랏빛 드레스는 꽤 많았다. 마치 누군가 그 색깔의 드레스만 탑에 버린 것처럼 말이다.

‘그러고 보면 보라색 드레스에서 유난히 달콤한 향이 나긴 했는데.’

순간 발레린은 거울을 쳐다봤다. 머리를 빗던 루네스가 놀라며 발레린을 살폈다.

“공녀님, 괜찮으세요? 혹시 제가 실수라도…….”

“아니야. 괜찮아.”

루네스는 발레린의 머리를 몇 번 빗다가 이내 물러났다.

“다 됐습니다!”

발레린은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곧 벽에 걸린 보라색 드레스를 찬찬히 살폈다. 그러다 발레린은 드레스에 코를 박고 냄새를 맡았다. 이젠 달콤한 향은 나지 않았다. 다만 예전보다 색깔이 조금 옅어 보였다.

발레린이 보라색 드레스를 뚫어지게 보고 있자 그로프가 물었다.

“주인님, 혹시 빛깔이 마음에 안 드십니까?”

“아니.”

“그럼 왜 갑자기 이 드레스를 보고 있는 겁니까?”

“탑 안에 보라색 드레스가 많았던 이유를 알 것 같아.”

“원래 탑 안에는 보라색 드레스밖에 없었지 않습니까?”

“전에는 그게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고 그저 예쁘게만 보였어. 그리고 달콤한 향도 나길래 그냥 좋아서 입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까 누군가 흰 드레스에 독성이 있는 보랏빛 염료를 부어서 만든 것 같아.”

발레린이 보랏빛 드레스만 보고 있자 루네스가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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