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이내 보좌관은 커다란 나무 문 앞에 멈춰 섰다. 발레린이 이리저리 둘러보자 보좌관이 다가와 말했다.
“이곳은 왕자님의 향주머니를 관리하는 곳입니다. 특히 왕자님 직속 기관이라서 배도스 공작의 간섭을 적게 받는 곳이기도 하고요.”
보좌관이 앞에 있는 기사에게 눈짓했다. 기사는 곧바로 문을 열어 주었다. 발레린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주변을 둘러봤다. 짙은 약초 냄새가 발레린의 코를 스쳤다. 모두 잘 마른 냄새였고 딱히 시큼한 과일 향은 나지 않았다. 발레린은 옆에 있는 그로프에게 작게 속삭였다.
“그로프, 너도 독 냄새는 나지 않지?”
“네, 딱히 독은 없는 것 같습니다.”
발레린도 동의하며 보좌관에게 말했다.
“이곳에 독은 없는 것 같아요.”
그때 하인 한 명이 향주머니를 들고 왔다. 보좌관은 향주머니를 들고서 말했다.
“그러면 이 주머니에도 독이 없는지 확인해 줄 수 있으십니까?”
발레린은 향주머니를 들어서 킁킁 냄새를 맡아 보았다. 잘 마른 풀 냄새만 날 뿐 다른 향은 나지 않았다.
“독초는 아니에요. 독 냄새가 나지 않아서요.”
그 말에도 보좌관의 얼굴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혹시 왕자님께 무슨 일이 있나요?”
보좌관이 깜짝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발레린이 유심히 지켜보자 보좌관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사실 왕자님께서 잠을 많이 설치십니다. 그리고 이 향주머니도 딱히 독성분이 발견되지 않았는데 냄새가 좋지 않다고 하셔서요.”
“그럼 제가 다시 맡아 봐도 될까요?”
“네, 물론입니다.”
보좌관이 향주머니를 주었다. 발레린은 잠시 생각하다가 보좌관에게 말했다.
“혹시 제가 다른 곳에 가서 자세히 향을 맡아 봐도 될까요? 아무래도 제가 방독면을 쓰고 있어서 자세히 맡지 못하는 것 같아서요.”
“그럼 이곳에 있는 빈방에 들어가세요. 마침 안 쓰는 방이 있거든요.”
보좌관은 곧바로 발레린을 빈방으로 안내했다. 늦은 밤이라 이곳에 남아 있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언뜻 발레린과 그로프를 보며 놀란 얼굴을 지었지만 그들은 크게 내색하지 않고 길을 비켜 주었다.
마침 보좌관이 멈춰 섰다.
“여기입니다.”
발레린은 감사 인사를 한 뒤 방에 들어갔다. 불은 환하게 밝혀져 있었고 쓰다 만 물건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는 곳이었다. 발레린은 방독면을 벗고는 향주머니를 가만히 맡아 보았다. 킁킁. 약간 거슬리는 냄새가 있었다. 독 냄새는 아니었지만 비슷한 냄새가 아주 약하게 코끝을 스쳤다.
발레린은 그로프에게 향주머니를 내밀었다.
“그로프, 너도 냄새가 느껴지니?”
그로프는 가만히 있다가 고개를 돌렸다.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딱히 독 냄새는 느껴지지 않아서요.”
발레린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향주머니를 열었다. 안에는 다양한 약초가 담겨 있었다. 발레린은 하나하나 꺼내서 냄새를 맡아 보았다. 다들 잔잔하고 잘 마른 약초 냄새가 나던 중 어느 것 하나가 발레린의 코를 예민하게 만들었다.
분홍빛 꽃이 마른 풀이었는데 그 풀에서 유난히 독 냄새와 비슷한 새콤한 냄새가 났다.
“이 약초 같은데.”
발레린이 작게 중얼거리자 그로프가 고개를 내밀었다.
“어디서 본 약초 같습니다.”
“그렇지? 책에서 본 것 같은데 이름은 기억이 안 나.”
그러나 발레린은 굳이 더 생각하지 않고 방독면을 썼다.
“분명 이 약초 때문에 왕자님이 잘 수 없었던 거야.”
“하지만 저에겐 이런 냄새가 느껴지지 않는데 왕자가 너무 예민한 것 아닙니까?”
발레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상 겉으로 맡아서 그다지 거슬리는 냄새는 느껴지지 않던 향주머니였다. 그나마 발레린은 독 냄새에 민감해서 이렇게 잘 맡지만 일반 사람에겐 이런 향은 잘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왕자님이 그만큼 후각에 예민한 것 아닐까?”
“개도 아니고 사람이 그렇게까지 후각이 예민할지는 몰랐습니다. 저도 잘 느껴지지 않는 냄새인데.”
발레린도 살짝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어쨌든 왕자였다. 그는 고귀한 왕족의 핏줄을 타고났다. 거기다 매시드 왕국의 왕자님은 제르딘밖에 없었다. 발레린은 어느덧 자신도 모르는 미소를 지은 채 말했다.
“그로프, 왕자님은 왕족의 피를 타고난 분이잖아.”
그로프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왕족의 피는 평범한 인간보다 더 뛰어나다고 늘 찬양받았다.
발레린은 다시 방독면을 쓰고는 곧바로 문을 열었다. 마침 보좌관이 기다리고 있었는지 발레린을 보자마자 물었다.
“혹시 찾아내셨습니까?”
발레린은 보좌관에게 말린 분홍빛 꽃을 내밀었다.
“약초 이름은 정확하게 모르겠어요. 그런데 이 약초에서 약간 다른 냄새가 나서요.”
보좌관은 황급히 옆에 있던 사람에게 물었다.
“이 약초 이름이 뭡니까?”
“투타스 꽃입니다. 이 꽃이 피었을 때 신 냄새가 나긴 하지만 말리면 그 냄새가 날아가서…….”
“그럼 이 약초는 빼고 향주머니를 채우세요.”
그 사람은 곧바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향주머니를 들고 갔다. 보좌관은 발레린에게 미소를 지었다.
“도와주셔서 고맙습니다.”
“뭘요, 제가 필요하면 언제든지 부르세요!”
발레린은 활기차게 대답했다. 그때 향주머니를 준비한 사람이 보좌관에게 내밀었다. 보좌관은 밝은 얼굴로 향주머니를 받고는 밖으로 발레린을 안내했다.
발레린은 보좌관과 함께 그곳을 나왔다. 그리고 발레린이 막 작별 인사를 하려던 참이었다.
“같이 가시죠.”
“같이요?”
“왕자님께 직접 향주머니에 대해 말씀하시면 왕자님께서 더 잘 이해하실 것 같아서요.”
“제가 가도 괜찮을까요? 안 그래도 왕자님께서는 주무실 때 나는 독 냄새를 싫어하시는 것 같은데.”
“방독면을 쓰셨으니 괜찮을 겁니다. 만약 내키지 않는다면 굳이 가지 않으셔도 됩니다.”
발레린은 잠시 고민했다. 보좌관도 괜찮다고 하는 마당에 계속 거절할 명분은 없었다. 어쨌든 제르딘의 방이 궁금하기도 했고 그를 한 번 더 보고 싶기도 했다.
‘방독면을 쓰면 괜찮으니까.’
심지어 제르딘은 발레린이 방독면을 벗었을 때도 멀쩡하지 않았던가? 비록 멀리 떨어져 있긴 했지만 말이다.
발레린은 보좌관에게 빠르게 말했다.
“같이 갈게요!”
보좌관은 미소를 짓고는 먼저 앞서서 안내했다.
“이쪽입니다.”
발레린은 설레는 마음으로 보좌관을 따라갔다. 왕궁의 복도는 조용하고 엄숙한 분위기였다. 주변의 장식이 화려한 데다 장대한 분위기까지 더해져 발레린은 왕궁에 있다는 것이 실감이 났다.
그렇게 발레린은 궁전을 구경하며 보좌관을 부지런히 따라갔다. 어느덧 보좌관은 커다란 문 앞에 멈춰 섰다. 양각의 장식이 세세하고 아름다운 문이었다. 발레린이 눈을 반짝이며 보는 사이 갑자기 문이 열리더니 하인이 부리나케 튀어나왔다.
발레린은 놀라며 뒤로 물러났다. 보좌관도 놀란 듯했으나 이내 침착하게 하인에게 물었다.
“무슨 일인가?”
하인이 고개를 숙이며 빠르게 말했다.
“왕자님께서 그 병이 도지셨습니다.”
“아직 보름달도 뜨지 않았는데. 병이라니!”
보좌관은 빠르게 하인에게 명령했다.
“지금 당장 델시르를 불러와라.”
하인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빠르게 달려 나갔다. 발레린은 보좌관을 살폈다. 그의 얼굴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발레린은 아까 하인이 한 말을 떠올렸다.
‘병이라고 들었던 것 같은데.’
하지만 발레린이 여태껏 본 왕족의 역사에서 유전병에 걸린 왕은 없었다. 거기다 거의 모든 역사서에서는 왕족이 피를 잘 타고나서 아프지도 않다고 했다.
발레린이 의아하게 보는 사이 보좌관이 발레린을 쳐다봤다. 눈이 마주치자 보좌관이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공녀님, 아까 들으신 말은 머릿속에서 잊어 주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오늘은 왕자님의 방에 같이 들어가지 못할 것 같습니다.”
발레린은 우선 고개를 끄덕였다. 보좌관의 얼굴이 너무 좋지 않아서였다.
“다른 말은 하지 않을게요.”
“고맙습니다.”
그러곤 보좌관은 왕자의 방 안으로 들어갔다. 발레린은 잠시 닫힌 문을 바라보다가 몸을 돌렸다. 그로프가 어깨 위에서 말했다.
“제르딘은 그다지 아파 보이지 않았는데 꾀병 아닙니까?”
“꾀병이라기에는 보좌관님의 얼굴이 심각해 보였어.”
“하지만 여태껏 왕자가 아픈 모습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러게. 대체 무슨 병일까.”
“그러고 보면 아까 보좌관이 보름달이 뜨지 않았다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보름달?”
“네, 보름달이라면 늑대 수인과 관련된 병 아닙니까?”
발레린은 우뚝 멈춰 섰다.
“설마, 그로프. 그런 말 하지 마. 왕족의 피는 수인과 섞이면 안 돼. 왕이 되지 못할뿐더러 왕족 체면도 깎이는 일이니까.”
“하지만 보름달과 관계가 있다니 늑대 수인과 연관된 병 아닙니까?”
“그렇긴 하지만…….”
그때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발레린은 서둘러 주변을 둘러봤다. 흔들리는 촛불만 보일 뿐 다른 생명은 보이지 않았다.
“그로프, 이 주변에 사람 못 봤어?”
“사람은 보지 못했지만 아까 쥐 한 마리가 벽으로 달려 나가는 건 봤습니다.”
발레린은 그나마 마음속을 가라앉혔다.
“예전에 역사서에서 본 게 기억나. 12대 왕의 아들이 늑대 수인과 피가 섞였다고 하면서 결국 왕자 자리에서 내려오게 만들었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