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제르딘은 속으로 배도스 공작을 욕했다. 그의 눈빛에 그대로 드러났는지 배도스 공작이 살짝 당황한 얼굴로 고개를 기울였다.
제르딘은 그를 똑바로 보며 말했다.
“내가 미령하니 결혼은 더더욱 발레린 공녀와 해야겠는데.”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차라리 발레린 공녀를 옆에 두고 독을 가까이하면 독에 면역이라도 생기지 않겠는가?”
그때 원로원 귀족 하나가 끼어들었다.
“하지만 왕자님, 고결하고 깨끗한 왕족의 피가 더러워질까 염려됩니다.”
“그건 걱정 말게.”
모두들 제르딘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제르딘은 대수롭지 않은 듯 대답했다.
“어차피 자네들은 모두 나를 은근히 잡종이라고 말하지 않는가? 그러니 그깟 저주 걸린 피가 섞이더라도 괜찮겠지.”
“그게 대체 무슨 말씀입니까? 저희가 감히 왕자님을 모욕하다니요!”
제르딘은 피식 웃었다.
“특히 원로원 귀족들이 내게 더 말하지 않는가? 배도스 공작도 그렇고.”
제르딘이 특히 배도스 공작을 쳐다봤다. 배도스 공작은 처음 듣는 듯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제가 감히 어떻게 왕족을 모욕할 수 있겠습니까?”
“그럼 내가 왕위 승계를 위해 피 검사를 미루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지?”
“그건…….”
“모두들 내가 늑대 수인과 피가 섞였다고 말하는 거 알고 있다.”
장중은 단숨에 조용해졌다. 제르딘은 무감한 얼굴로 말했다.
“왕족의 피가 아닌 다른 피가 섞이면 왕이 되지 못하지. 다만 황금 마검을 쥐고 왕족임을 증명해 보이면 피 검사를 하지 않더라도 왕이 될 수 있는데…….”
제르딘이 배도스 공작을 쳐다봤다.
“신기하게도 내가 왕위를 계승하려는 날에 황금 마검이 사라졌고.”
배도스 공작은 헛기침을 하며 꼿꼿하게 고개를 돌렸다. 제르딘은 여전히 배도스 공작을 보며 말했다.
“내가 굳이 피 검사를 받지 않는 것도 그 이유지. 내가 원래 찾으려던 왕국의 가장 신성한 보물인 황금 마검을 찾고 순리대로 왕위에 오르는 것.”
“하지만 피를 검사하는 것이 더 빠르고 깔끔하지 않겠습니까?”
“어머니 때도 황금 마검으로 왕위를 이었는데 내가 굳이 전례를 깨고 싶지 않아.”
그 말에 사르티아 공작이 말했다.
“하긴 피 검사를 한 뒤 왕위를 이은 분들은 모두 일찍 왕의 자리에서 쫓겨났지만 황금 마검으로 왕재를 입증했던 분들은 모두 오랫동안 왕위를 이으시긴 했습니다.”
발레린 공녀를 내쫓아야 한다고 외치던 원로원 귀족들은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배도스 공작은 굳은 얼굴로 입술을 씰룩거렸다.
“그리고 나에게 피 검사를 강요하는 것은 왕족 자체에 대한 불신으로 보이는데.”
그때 원로원 귀족 중 하나가 고개를 숙였다.
“불신이라니요. 저희가 어떻게 감히 왕자님을 부정할 수 있겠습니까?”
“그럼 발레린 공녀에 대한 일은 가만히 따라 주면 되겠군.”
“하지만 왕자님, 이번은 경우가 다릅니다.”
다시 시작되는 반격에 제르딘은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는 티 내지 않고 그들이 지껄이는 말을 가만히 들었다. 아까와 비슷했다. 안 그래도 저주에 민감한 변방의 기사들이 반기를 들어서 국경 주변의 경계가 위험해질 수 있다는 것이었다. 원로원 귀족이 나서면 금방 끝나는 일이었다.
애초에 원로원 귀족이 가지고 있는 영지가 북쪽 영토 경계의 대부분이었고 그들의 사병이 그곳을 지키고 있었다. 그들이 원하는 대로 되지 않을 때 원로원 귀족들은 항상 제르딘에게 변방이 위험해질 수 있다고 협박하듯 말했다.
변방의 경계는 어쨌든 중요했기에 제르딘은 아무렇지 않게 넘길 수 없었다. 왕국 친위대가 있긴 하지만 원로원 귀족들의 반발이 워낙 거세서 아직 완전히 자리 잡지 못했다.
거기에 배도스 공작까지 끼어들었다.
“왕자님, 헬릭스는 왕자님의 유일한 친척입니다. 그러니 제 친척도 모르고 제멋대로 해한다는 소문을 잠재울 겸 이번만은 발레린 공녀를 완전히 내쫓아야 합니다. 그러면 나약한 왕자라는 오명을 씻으시고 강건한 왕자라 칭송받을 수 있으실 겁니다.”
아까부터 자꾸만 자극적인 소문을 들먹이고 있었다. 제르딘은 눈썹을 찌푸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신성한 대회의실에서 저급한 소문을 들먹이지 마라.”
주변에 있던 귀족들이 수군거렸다. 제르딘은 욕이 목까지 차올랐지만 겨우 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귀족들이 대번에 제르딘을 쳐다봤다.
“이번 왕정 회의는 여기서 마친다.”
그러곤 제르딘은 대회의실을 먼저 나갔다. 귀족들이 그가 지나갈 때 고개를 숙였지만 제르딘은 신경 쓰지 않고 그들을 지나쳐 나갔다.
대회의실을 빠져나가자마자 제르딘의 보좌관이 서둘러 따라왔다.
“왕자님, 아까 늑대 수인에 대한 말씀은 너무 위험하셨습니다. 그것도 왕자님께서 말씀하시는 저급한 소문 아닙니까?”
“저급한 소문이긴, 그건 진실인데.”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보좌관은 서둘러 주변을 둘러봤다. 다행히 하인이나 다른 귀족은 보이지 않았다.
“왕자님, 여긴 왕궁입니다.”
보좌관이 거의 울 듯이 말했지만 제르딘은 신경 쓰지 않으며 말했다.
“그리고 어차피 거기 있는 모든 귀족들이 알고 있는데 내가 모른 척하는 것도 웃기겠지.”
“하지만 잘못했다간 그게…….”
“그들이 먼저 말을 지어내는 것보다 내 선에서 끝내는 게 맞아. 안 그랬다간 또 이상한 질 낮은 소문이 돌겠지.”
보좌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발레린 공녀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사르티아 공작이 확실히 내 편을 들어 주니 공녀와 결혼은 거행해야 해.”
“하지만 원로원 귀족들의 반발이 심상치 않습니다.”
“늙은이들이 항상 그렇지. 내가 하는 것마다 죄다 신중해야 한다며 반대를 하니.”
보좌관은 또다시 주변을 둘러봤다. 다행히 늦은 밤이라 복도에 사람은 없었다.
“왕자님, 아무리 그래도 말씀은 가려서 해야 합니다. 혹시라도 듣는 이라도 있다면…….”
“어차피 내가 그들을 좋게 생각하지 않는 건 그들도 알 텐데 굳이 이런 곳에서까지 눈치 볼 필요 있는가?”
“그래도 주변 사람들이 잘못 전달해서 소문이 나면…….”
제르딘이 피식 웃었다.
“어차피 저들끼리 저급한 소문을 퍼뜨리고 다니는데 소문이 더 나도 티도 안 나겠지.”
보좌관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쳐다봤지만 제르딘은 먼저 계단을 내려갔다. 그의 뒤로는 왕족 친위대 병사와 함께 하인들이 따라갔다. 보좌관은 뒤늦게 제르딘에게 다가갔다.
“이번에도 잠을 잘 오게 하는 향주머니를 넣어 드릴까요?”
“아니.”
그 말에 보좌관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럼 이제는 잘 주무시는 겁니까?”
“아니.”
“그럼 대체 왜…….”
제르딘이 멈춰 섰다. 뒤따라오던 사람들이 대번에 고개를 숙이며 잠시 뒤로 물러났다. 제르딘은 보좌관을 보며 말했다.
“향주머니를 관리하던 사람들을 조사해.”
“조사라니요?”
“예전에는 그 냄새를 맡으면 잠이 잘 왔는데 이젠 잠이 안 와. 분명 독이 든 약초라도 섞어 놓았겠지.”
“하지만 그건 저희가 관리하는데…….”
“향이 이전과 달라. 묘하게 거슬리는 향도 섞여 있고.”
“그럼 다시 약초를 배합하겠습니다.”
“아까 내가 한 말은 잊었나?”
제르딘의 눈빛이 꽤 날카로웠다. 보좌관은 곧바로 고개를 숙였다.
“철저히 조사하겠습니다.”
보좌관이 말하자마자 제르딘은 몸을 돌려 먼저 앞으로 걸어갔다. 보좌관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문득 발레린을 떠올렸다. 그는 곧바로 발레린의 방으로 향했다.
발레린은 늦은 시간이었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낯선 곳이라서 잠이 오지 않기도 했고, 자신 때문에 쓰러진 사람이 생각나 그렇기도 했다.
그로프는 옆에서 괜찮다고 말했지만 발레린은 벽에 걸린 보라색 드레스를 쳐다봤다. 그나마 보랏빛을 보면 기분이 조금은 나아지기 때문이다. 발레린이 그렇게 멍하니 보랏빛 드레스를 보고 있을 때였다.
똑똑.
꽤 발랄하게 두드리는 소리였다. 발레린은 시계를 확인했다. 하인이 오기에는 늦은 시간이었다.
그때 또다시 똑똑거리는 소리가 울렸다. 꽤나 급한 것 같기에 발레린은 곧바로 일어나 방독면을 쓴 뒤 문을 열었다.
“보좌관님?”
“공녀님, 안녕하세요. 늦은 시간에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무슨 일 있나요?”
“사실…….”
보좌관은 잠시 망설였다. 발레린이 주의 깊게 쳐다보자 보좌관이 빠르게 말했다.
“왕자님께서 잠을 못 주무셔서 향주머니를 이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향주머니에서 이상한 향이 난다며, 독이 있을 거라고 말씀하셔서요. 혹시 독이 있는지 찾아 주실 수 있을까 해서…….”
“당연히 찾을 수 있어요! 전 독 냄새도 기가 막히게 잘 맡거든요.”
발레린의 말에 보좌관의 활짝 웃었다.
“그럼 괜찮으시다면 저와 함께 가시겠습니까?”
발레린이 고개를 끄덕이자 보좌관이 먼저 앞서서 안내했다.
“개꿀개꿀.”
그로프가 발레린의 어깨 위에 올라가 울었다. 발레린은 자신이 도와줄 수 있다는 사실에 다시 기분이 좋아졌다. 어쨌든 저주를 받았긴 하지만 이렇게 남에게 도움이 된다는 것 자체가 발레린에겐 기쁨이었다.
발레린은 기분 좋은 걸음으로 보좌관을 따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