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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빛 저주의 공녀님-17화 (17/130)

17화

발레린은 잠시 제르딘의 뒷모습을 쳐다봤다. 어느새 그는 보이지 않았다.

그때 그로프가 발레린의 어깨에 올라와서 말했다.

“헬릭스에겐 안 가는 게 나을 듯합니다. 괜히 가 봤자 주인님만 곤란해질 것 같습니다.”

발레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원로원 귀족들이 그렇게까지 말하는데 병문안을 간다면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좋게 볼 것 같지 않았다. 더구나 아까 발레린에게 쏟아진 시선을 생각하면 더 그랬다.

발레린은 결국 방으로 돌아갔다. 방으로 돌아오고 나서도 마음이 그다지 편하지 않았다. 자신 때문에 모든 게 꼬인 기분이었다.

‘분명 탑을 나올 땐 기분이 좋았는데.’

거기다 지금 발레린이 할 수 있는 것은 딱히 없었다. 그저 예전에 탑 안에 갇혔던 것처럼 가만히 있어야 하는 것뿐. 심지어 지금 나서 봤자 아까처럼 일이 될 것 같아 발레린은 쉽사리 나설 수도 없었다.

발레린이 시무룩하게 보랏빛 드레스를 바라보자 그로프가 말했다.

“주인님, 괜찮을 겁니다. 아까도 분명히 주인님이 준 센트릴 잎으로 처치를 잘하지 않았습니까?”

발레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방독면을 벗었다. 마침 시원한 바람이 그녀의 코끝을 스쳐 지나갔다. 발레린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보았다. 노란 장미가 유난히 눈에 띄었다.

똑똑.

꽤 단호하게 울리는 소리였다. 발레린은 잽싸게 방독면을 쓴 뒤 말했다.

“들어와.”

곧 문이 열리고 누군가 들어섰다. 눈이 마주치자 발레린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왕자님?”

“잠시 할 말이 있어서 왔습니다.”

“할 말이요?”

제르딘은 고개를 끄덕인 뒤 탁자 앞으로 걸어갔다.

“앉아도 되겠습니까?”

“네, 물론이에요.”

발레린이 부산스럽게 안내하자 제르딘은 침착하게 의자에 앉았다. 발레린은 떨리는 마음으로 탁자 앞에 앉았다. 제르딘의 얼굴은 밝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렇게 심각한 표정도 아니었기에 발레린은 왠지 모르게 불안했다.

‘설마 결혼을 무르려는 건 아니겠지.’

비록 사랑이 없는 결혼이라고 해도 발레린은 제르딘 옆에 계속 있고 싶었다. 그게 끝이 있다고 해도 말이다.

발레린이 제르딘을 뚫어지게 보고 있자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헬릭스 일에 관해서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헬릭스 님이요? 혹시 그분이 지금 많이 위험하신가요?”

발레린이 걱정스러운 듯 말하자 제르딘의 표정이 미묘하게 굳었다.

“아니요.”

유난히 낮게 떨어지는 목소리였다. 발레린이 당황하며 보자 제르딘은 차분히 발레린을 쳐다봤다.

“공녀는 헬릭스와 동족이라고 착각해서 방독면을 벗었다고 했는데 그전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그때 옆에서 그로프가 끼어들었다.

“주인님께서는 헬릭스에게 방독면을 벗어도 되는지 물어봤습니다. 심지어 헬릭스는 주인님과 동족이라고 말하면서 방독면을 벗으라고 말했고요.”

“그게 사실입니까?”

발레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신에 차서 말해서 헬릭스 님이 저와 동족인 줄 알았어요.”

피식 웃는 소리가 들렸다. 발레린은 깜짝 놀라 제르딘을 쳐다봤다. 그의 얼굴에는 묘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가 저렇게 웃는 것은 처음 봤기에 발레린은 저도 모르게 제르딘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제르딘은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헬릭스가 원래 그런 인간입니다. 가끔 눈에 보이는 게 없어서 무식하게 보일 때도 있고요.”

“그런데 헬릭스 님은 괜찮으신가요?”

“의사 말로는 누군가 센트릴 잎으로 응급 처치를 잘해 주어서 고비는 넘겼다고 합니다. 의식을 회복하는 데는 3일 정도 걸릴 것 같다고 말하고요.”

“그나마 다행이네요.”

발레린은 속으로 마음을 쓸어 넘겼다. 잠시 말소리가 없었다. 발발레린은 고개를 들다 제르딘과 눈이 마주쳤다.

“공녀가 한 것 아닙니까?”

“네?”

“센트릴 잎은 의사도 잘 들고 다니는 게 아니거든요.”

“제가 한 건 맞아요.”

“위험하긴 했지만 공녀 덕분에 고비는 넘겼습니다.”

발레린은 제르딘의 말에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공녀도 나름대로 이 일에 공이 있습니다.”

발레린이 고개를 들자 제르딘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갑자기 일어나는 제르딘에 발레린은 황급히 물었다.

“지금 가시는 건가요?”

“바쁜 일이 있어서요. 일찍부터 밀린 회의도 있고요.”

발레린은 고개를 끄덕인 뒤 예법에 맞게 인사했다. 제르딘은 간단히 고개를 숙인 뒤 방을 나갔다. 한순간 방이 조용해졌다. 발레린은 제르딘이 나간 문을 바라보다가 이내 주머니를 뒤졌다. 손에는 센트릴 잎이 조금밖에 잡히지 않았다.

‘분명 가져올 때는 많았는데.’

발레린은 아쉬운 마음에 남은 센트릴 잎을 협탁에 모아 놓았다. 보랏빛 센트릴 잎은 그나마 발레린의 마음을 조금은 안정시켜 주었다. 발레린은 영롱한 보랏빛을 멍하니 바라봤다.

칠흑 같은 밤이었다. 늦은 시간이었는데도 궁전의 대회의실 불은 꺼지지 않았다.

“발레린 공녀를 내보내야 합니다.”

어젯밤부터 같은 말이었다. 특히 짙은 눈썹에 나이가 지긋한 원로원 귀족은 그 말에 적극 찬성했다. 옆에 있던 다른 귀족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헬릭스 공자를 그렇게 만든 것은 도저히 용납 못 할 행위입니다.”

“맞습니다! 감히 궁전에서 방독면을 벗다니요!”

“하지만 발레린이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충격적인 일에 쓰러져 있다가 겨우 일어난 사르티아 공작이 말했다. 그의 얼굴은 누구보다 어두웠지만 이 상황에선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의사 말로는 그나마 발레린이 센트릴 잎을 이용해서 헬릭스 공자의 위기를 막았다고 합니다.”

상석에서 가만히 지켜보던 제르딘이 말했다.

“사르티아 공작 말이 맞아.”

그때, 내내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던 배도스 공작이 말했다.

“병 주고 약 주는 것도 아니고 말이 안 맞지 않습니까?”

“그렇긴 합니다. 애초부터 발레린 공녀가 방독면을 벗지 않았다면 일이 이렇게 되지도 않았을 겁니다.”

사르티아 공작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귀족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르딘은 무감한 눈빛으로 배도스 공작을 지켜봤다. 배도스 공작은 눈을 살짝 내린 채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 아들입니다. 안 그래도 몸이 안 좋아서 집에서 자주 요양하던 아이가 독에 중독되었으니…….”

“3일 뒤에 깨어난다고 하던데 내가 들은 게 잘못된 건가?”

눈물을 빼내려던 배도스 공작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고개를 들었다. 제르딘은 그와 맞서며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그동안 많이 아팠으니 이번에야말로 푹 쉬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왕자님! 그 말씀은 잔인하십니다. 어떻게 지금 아파서 누워 있는 공자에게 그런 말씀을 하실 수 있는 겁니까?”

“맞습니다. 안 그래도 발레린 공녀의 독 때문에 위험한 분을…….”

주변에서 제르딘을 탓하는 말이 쏟아졌다. 제르딘은 늘 있어 왔던 일이라 놀랍지는 않았다. 왕의 장자이자 유일한 왕자임에도 원로원 귀족에서부터 배도스 공작을 따르는 귀족들까지, 다들 제각각 제르딘을 반대하고 나섰다.

아픈 어머니를 돌보느라 주변을 제대로 돌보지 못한 탓이었다. 제르딘이 어머니에게 관심을 쏟는 사이 배도스 공작이 귀족들을 모두 제 편으로 만들었다. 어머니의 장례식을 치른 뒤에는 제르딘의 세력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그가 이렇게 상석에 앉은 것도 왕위 계승 1위라는 타고난 핏줄 때문이었다. 거기에 더해서 질긴 목숨도 한몫했다.

“어찌 되었든 발레린 공녀를 궁에서 내쫓아야 합니다.”

아까부터 같은 소리에 제르딘은 한숨이 나올 지경이었다. 제르딘은 질린 얼굴로 턱을 괴었다.

“궁 내부에도 발레린 공녀에 대한 소문이 무성합니다. 모두들 발레린 공녀를 두려워하는 마당에 지금 내쫓지 않으면…….”

“그만.”

제르딘은 더는 듣고 싶지 않았다. 귀족들은 저마다 눈치를 보며 주변을 살폈다. 제르딘은 주변에 있는 귀족을 찬찬히 쳐다봤다. 그들은 제르딘과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숙였으나 제르딘은 그들이 자신을 존경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배도스 공작이 이 왕궁에서 권력을 거의 차지한 뒤로 그랬다. 제르딘은 그 이후부터 귀족들이 뭐라고 떠들든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저들끼리 세력을 만들어서 하는 판에 끼어드는 것도 귀찮았고 완전히 질린 게 맞았다.

하지만 이제 배도스 공작은 선을 넘고 있었다. 무언가를 제대로 하려고 하면 이것저것 걸고넘어지면서 측근까지 모두 죽이고 있었다. 이제 더 두고 볼 수는 없었다.

“발레린 공녀는 내가 데려온 사람이다. 그러니 결혼도 내 뜻대로 할 거고.”

“지금 당장 내쫓지도 못할 판에 결혼이라니요! 이건 귀족 사회를 무시하는 처사입니다!”

원로원 귀족이 말하자 옆에 있던 늙은 귀족들이 하나둘씩 머리를 조아리며 외쳤다.

“맞습니다. 지금 이렇게 독단적으로 처리하시면 북쪽 변방에서 매시드 왕국을 하루하루 지키는 기사들에게도 좋지 않습니다.”

제르딘은 속으로 헛웃음을 삼켰다. 원로원 귀족들이 이렇게 변방의 기사를 들먹거리며 협박하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제르딘은 독단적으로 처리하고 싶어도 원로원 귀족들이 가진 사병과 그들의 영지 때문에 함부로 처리하지 못했다.

그가 가만히 있자 옆에서 화살 같은 말이 날아왔다.

“맞습니다. 안 그래도 독살 사건으로 미령하신데 결혼 관련된 일은 저희에게 맡겨 주시지요.”

제르딘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배도스 공작이 옅은 미소를 지은 채 제르딘을 쳐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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