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하인들은 놀란 눈으로 고개를 숙였다. 여러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 유독 눈에 띄었다. 금발은 햇빛이 없음에도 자연히 색을 발했고 하늘빛 눈동자는 유리처럼 맑으면서도 얼음처럼 차가워 보이기도 했다. 겉으로 보기에 제르딘은 눈빛 때문에 쉽사리 다가갈 수 없는 인상이었다.
헬릭스를 보던 제르딘의 눈길이 발레린에게 멈췄다. 그는 곧장 발레린에게 다가왔다.
“무슨 일입니까?”
의사가 급히 달려와 제르딘에게 말하려던 순간, 제르딘이 손을 들었다. 의사는 민망한 듯 고개를 숙이곤 뒤로 물러났다. 제르딘은 발레린을 보며 차분히 말했다.
“무슨 일인지 말씀해 주실 수 있습니까?”
발레린은 심장이 제멋대로 뛰었지만 그래도 용기를 내서 입을 열었다.
“헬릭스 님이 제 동족인 줄 알고 방독면을 벗었어요.”
그때 옆에 있던 의사가 급히 말했다.
“왕자님, 그래도 이런 왕궁에서 방독면은…….”
“얼른 헬릭스나 살펴봐. 진찰하기는 했나?”
의사는 놀란 눈으로 고개를 숙인 뒤 곧바로 헬릭스를 살폈다.
그때 다급히 뛰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발레린이 고개를 돌리자 여러 사람이 이쪽으로 뛰어오고 있었다. 그중에서 선두에 선 사람은 뱀같이 눈이 가늘어 보였는데 발레린은 그가 누군지 대번에 알아차렸다. 배도스 공작이었다.
그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누워 있는 헬릭스에게 뛰어갔다.
“헬릭스!”
배도스 공작은 의사를 내치고 헬릭스의 어깨를 흔들었다. 하지만 그가 눈을 뜨지 않자 주변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대체 누가 이런 건가!”
제르딘은 배도스 공작을 보며 차분히 말했다.
“배도스 공작, 침착하게 구는 게 좋을 텐데.”
“침착이요? 제가 지금 이걸 보고 침착하게 생겼습니까?”
제르딘은 의사에게 눈짓했다. 의사는 떨리는 목소리로 배도스 공작에게 말했다.
“헬릭스 공자님께서는 지금 쉬셔야 합니다.”
“그 전에 대체 누가 이런 겁니까?”
지켜보던 시선들이 발레린에게 향했다. 배도스 공작은 그들을 훑어보다가 이내 발레린을 쳐다봤다. 옆에서 눈치를 보던 의사가 나직이 속삭였다.
“발레린 공녀가 방독면을 벗으면서 이렇게 되었다고 합니다.”
배도스 공작의 시선이 곧바로 날카로워졌다.
“공녀, 왕궁에 있는 사람들을 모두 죽이기로 작정한 겁니까?”
“죽이다니요. 저는 그저 헬릭스 님이 방독면을 벗어도 된다기에 벗었고, 저와 동족인 줄 알았어요.”
“동족이라니요! 헬릭스가 당신과 같이 저주를 받은 줄 아십니까? 대체 이 왕궁에…….”
“배도스 공작.”
유난히 낮은 목소리였다. 배도스 공작은 말을 끊고 제르딘을 쳐다봤다. 제르딘은 그를 보며 입을 열었다.
“말이 심하네. 공녀가 저주를 받고 싶어서 받은 것도 아닌데 그런 식으로 말하다니.”
배도스 공작은 손을 부들부들 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곤 신경질을 부리듯 주변에 있는 하인에게 외쳤다.
“뭣들 해! 얼른 헬릭스를 실어가지 않고.”
하인들은 들것을 들고 서둘러 헬릭스를 실었다. 의사와 함께 하인들이 헬릭스를 싣고 가자 배도스 공작이 제르딘을 노려보며 말했다.
“왕자님은 요즘 들어 독살 때문에 심기가 많이 약해지셨습니다.”
“심기가 약해지다니?”
배도스 공작이 비열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요즘 소문 못 들으셨습니까? 왕자님께서 많이 심약해지셔서 결국 저주받은 공녀까지 이 왕궁에 데려왔다고요.”
“그런 허무맹랑한 소문까지 내가 들어야 하나?”
제르딘이 무감하게 말하자 배도스 공작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걱정되어서 그렇습니다. 이런 소문이 꽤 많이 돌고 있어서요.”
“배도스 공작, 자네가 언제부터 내 걱정을 했다고 그러는가? 헬릭스가 방금 실려 갔으니 헬릭스에게나 가는 게 좋을 텐데.”
배도스 공작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제르딘을 쳐다봤다. 그는 제르딘에게 인사를 하고 가려다 문득 발레린을 쳐다봤다. 발레린이 흥미로운 눈빛으로 쳐다보자 배도스 공작은 눈썹을 찌푸렸다. 하지만 그는 다시 표정을 차분히 바꾸고선 발레린에게 말했다.
“공녀, 사르티아 공작의 배경은 무시하는 게 좋을 겁니다. 아니, 이제 이 왕궁에서 살아남기를 바라셔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살아남아야 한다는 말은 제가 곧 죽을 거란 말인가요?”
배도스 공작의 얼굴이 대번에 일그러졌다. 그러나 그는 언제 그랬냐는 듯 차분히 표정을 바꾸고는 말했다.
“왕궁은 그만큼 살벌한 곳이니까요.”
배도스 공작은 미소를 짓고는 고개를 숙인 뒤 물러났다. 그가 나서자 주변에 있던 귀족들은 발레린을 한 번씩 보고는 배도스 공작을 따라 반대편 복도로 걸어갔다. 발레린은 표정 없이 배도스 공작의 무리를 쳐다봤다. 옆에서 그로프가 속삭였다.
“저렇게 막무가내로 협박하는 사람은 처음 봅니다.”
“그러게. 해인저 모녀 같은 사람이 세상에 많나 봐.”
발레린은 딱히 두렵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어차피 사람들은 자신의 독기 때문에 가까이 오지 못한다.
그때 제르딘이 말했다.
“배도스 공작 말은 신경 쓰지 마세요. 그동안 악하게만 살아와서 고운 말을 쓸 줄 모르는 인간이니까.”
제르딘은 무척이나 무감해 보였다. 그는 이런 일에 이골이 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때 옆에 있던 보좌관이 제르딘에게 무언가 속삭였다. 보좌관이 물러나자마자 제르딘은 발레린을 보며 말했다.
“저는 바쁜 일 때문에 가 보겠습니다.”
제르딘은 가볍게 인사를 한 뒤 곧 여러 사람과 함께 사라졌다. 발레린은 제르딘의 뒷모습을 멍하니 좇았다.
“그로프, 왕자님이 아니었으면 나는 무척 억울했을 거야.”
그로프가 고개를 끄덕이며 개꿀개꿀 울었다. 발레린은 제르딘이 간 곳을 한참 바라보다가 문득 그로프에게 물었다.
“그나저나 나 때문에 쓰러졌으니 병문안은 가야겠지?”
“하지만 헬릭스가 동의한 것이나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주인님이 방독면을 벗어도 되냐고 했을 때 그러라고 했으니까요.”
“그래도 헬릭스 님은 나에 대해서 잘 몰랐을 수도 있으니까.”
발레린은 한편으론 자신에 대해 모르는 사람이 있다는 것에 감사했다. 어쨌든 편견 없이 자신을 봐줄 거라는 기대감이었다. 심지어 헬릭스는 발레린에게 웃으며 다가왔다. 다른 사람은 모두 피하거나 속닥거릴 뿐이었는데.
발레린은 몸을 돌렸다.
“병실이 어디지?”
“주인님, 지금 가시면 배도스 공작까지 있어서 난처하실 것 같습니다.”
그 말에 발레린은 문득 멈칫했다.
“하긴, 어쨌든 나 때문에 헬릭스 님이 쓰러진 건 맞으니까.”
발레린은 할 수 없이 방으로 돌아갔다.
다음 날, 발레린은 변함없이 운동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시간은 이른 새벽이었다. 발레린은 창문을 향해서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가 이내 그로프에게 몸을 돌리며 힘차게 말했다.
“그로프, 지금 병문안을 가야겠어.”
“지금이요? 너무 이른 것 아닙니까?”
“이르긴 하지만 지금이 그나마 사람이 없을 것 같아서. 괜히 사람 많은 시간에 가 봤자 좋은 소리는 못 듣잖아.”
발레린는 미소를 지었다. 그로프는 마음이 안 좋았지만 나직이 말했다.
“이전에 제가 본 바로 병실은 1층에 있었습니다.”
발레린은 가뿐하게 계단으로 걸어갔다. 생각보다 이른 아침인데도 하인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마주치는 사람들의 시선은 어제와 다르지 않았다. 오히려 헬릭스 일 때문에 그들은 발레린이 걸어온다 싶으면 냅다 다른 곳으로 갔다. 발레린은 그 사람들을 신경 쓰지 않고 계단을 내려갔다.
막 1층에 접어들었을 때였다.
“왕자님! 원로원에서 난리입니다.”
제르딘과 함께 보좌관이 서 있었다. 그들은 홀의 중앙에 있었는데 둘의 표정은 모두 좋지 않았다. 특히 보좌관의 얼굴은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심각해 보였다. 제르딘이 멈춰서 보자 보좌관이 빠르게 말을 이었다.
“헬릭스 님의 상태가 그렇게 좋지는 않다고 합니다.”
“그래서 죽었고?”
“왕자님!”
“그렇게 말하는 걸 보면 죽지는 않았는가 보군.”
“하지만 지금 상태를 보면…….”
“그러고 보면 이제야 배도스 공작이 늘 말하던 날이 왔군.”
제르딘이 입꼬리를 올렸다.
“무슨 날 말입니까?”
“헬릭스가 귀족 회의에 빠질 때마다 늘 아프다고 변명을 늘어놓던 배도스 공작 아닌가?”
오히려 제르딘은 표정이 환했다. 보좌관이 재빨리 말했다.
“하지만 어젯밤부터 원로원은 발레린 공녀를 내보내야 한다고 난리입니다. 공녀가 왕궁에 있으면 이곳에 산 사람이 얼마 남지 않을 거라면서요.”
제르딘은 그저 무표정한 얼굴로 들었다. 그사이 보좌관이 말을 이었다.
“원로원 귀족들의 화를 풀려면 아무래도 헬릭스의 병문안을 가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야 공녀님과 결혼식도 무사히 거행될 것 같고요.”
“다 죽었을 때 가려고 했는데.”
그 말에 보좌관이 놀라며 주변을 둘러봤다. 발레린은 재빨리 주변에 있는 석상 앞에 몸을 숨겼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보좌관의 절규 섞인 목소리가 울렸다.
“왕자님, 그런 말씀은 제발…….”
“하긴, 내가 병문안을 가 줘야 말할 거리라도 있겠지.”
발레린은 석상 앞에서 살짝 고개를 내밀었다. 제르딘은 보좌관과 함께 붉은 카펫이 깔린 복도로 들어서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