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남들이 하지 않는 칭찬에 발레린은 기분이 좋아져 활짝 웃었다. 그러곤 발레린은 제르딘의 그릇을 확인했다. 그는 거의 먹지 않은 상태였다.
“그런데 왕자님은 왜 다 안 드세요?”
“저는 이런 것보다…….”
제르딘은 말을 하다 말았다. 발레린의 의아하게 보자 그는 고개를 내젓고는 와인을 한 잔 마셨다.
“원래 음식은 별로 안 먹습니다.”
“혹시 몸이 안 좋으신 건가요?”
“아니요.”
“그럼 왜…….”
“어렸을 때부터 그랬습니다. 이런 음식은 제게 안 맞기도 하고요.”
“괜히 저 때문에 그러시는 건가요? 저는 괜찮으니 다른 음식으로…….”
“아닙니다. 식사를 다 한 뒤에는 뭘 하실 겁니까?”
능숙하게 말을 돌리는 제르딘에 발레린은 잠시 머뭇거렸다. 괜한 말을 한 듯했다. 발레린은 조심스레 제르딘을 보았다. 여전히 감정이 보이지 않는 눈빛이었다. 그러나 그의 눈빛은 은근히 집요한 구석이 있었다.
발레린은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운동하려고요. 원래 탑 안에서 살 때도 일어나서 꼭 30분 동안 운동하고 음식을 먹고 나서도 30분간 운동을 했었거든요.”
제르딘이 고개를 끄덕이자 발레린은 그나마 나은 기분으로 말을 이었다.
“음식을 먹고 난 후 가볍게 운동을 하면 더 좋대요. 음식을 먹으면 몸속의 당이 올라가는데 운동을 하면 당이 내려가서 건강에는 더 좋다고 해요.”
뜻밖의 건강 상식에 제르딘은 발레린을 보며 말했다.
“탑 안에서 꽤 많은 책을 읽으셨나 봅니다.”
“제가 읽은 책만 해도 십만 권이 넘을 거예요. 사실 최근 책은 아니었어요. 모두 50년 전이나 100년 전 책이었어요. 저택에서 너무 오래되어서 방치된 책이었죠. 그래도 그런 책이 아니었다면 전 이렇게 많이 알지 못했을 거예요. 궁금한 것도 해결 못 했을 거고요.”
제르딘이 그저 가만히 들어 주자 발레린은 신나서 더 말했다.
“그리고 그거 아세요? 오래된 책일수록 더 자세하고 방대해요!”
제르딘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요즘 책은 너무 간략하게 나와서 볼 게 없죠.”
“그러니까요. 그래서 전 옛날 책이 좋아요. 책 상태도 옛날 책이 더 튼튼하고 종이 질도 더 좋거든요.”
제르딘은 생각보다 발레린의 말이 지루하지 않았다. 오히려 발음도 정확해서 더 듣고 싶은 생각까지 들었다. 그 생각이 들자마자 그는 눈썹을 찌푸렸다. 그런 생각은 여태껏 남에게 들지 않았던 생각이었다.
제르딘은 굳은 얼굴로 포크를 놓았다. 그 모습에 발레린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왕자님, 혹시 불편하신가요?”
“아닙니다.”
발레린은 제르딘을 한 번 더 살피다가 이내 그로프를 보았다. 그로프는 귀뚜라미를 다 먹었는지 배가 꽤 빵빵했다. 발레린은 미소를 지으며 그로프의 배를 만졌다. 그로프는 만족스러운 소리로 울었다.
“개꿀개꿀.”
그때 정찬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곧 보좌관이 들어왔다. 발레린은 급히 방독면을 썼다.
“왕자님, 현재 조사관이 하녀장을 조사하고 있는데 독에 대해선 끝까지 말을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제르딘의 눈썹이 살짝 일그러졌다. 그의 얼굴은 묘하게 차가운 인상처럼 보였다. 발레린이 숨죽이며 쳐다보자 제르딘이 마침 발레린에게 시선을 돌렸다.
“죄송하지만 바쁜 일이 있어서 먼저 일어나야겠습니다.”
“아니에요. 먼저 가셔도 돼요. 저도 벌써 다 먹었는걸요.”
“그래도 부족하면 언제든지 전용 하녀를 시켜서 말씀하세요.”
“네, 고맙습니다.”
제르딘은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한 뒤 정찬실을 나갔다. 곧 정찬실은 눈이 내려앉은 것처럼 조용해졌다. 발레린은 잠시 눈을 깜빡이다가 그로프를 쳐다봤다.
“그로프, 우리도 나갈까?”
그로프가 고개를 끄덕이자 발레린은 그로프를 들고 정찬실을 나왔다.
발레린은 운동을 위해 궁전을 한 바퀴 돌려고 복도를 걸었다. 확실히 제르딘이 한마디 해서 그런지 하인들은 발레린을 힐끗거리며 쳐다보지 않았고 오히려 살갑게 인사하기까지 했다. 발레린은 그들에게 웃으며 인사를 해 주었다.
그렇게 복도를 걷던 중이었다. 저 멀리 누군가 발레린에게 다가왔다. 멀리서 봐도 옷의 빛깔은 하인이 입은 것과 다르게 윤이 났다. 거기다 걸음걸이는 잘나가는 귀족 가문을 보여 주는 듯 당당하기만 했다.
“그로프, 누굴까?”
“멀리서 봐도 멍청해 보입니다.”
“그걸 어떻게 확신해?”
“지금 공녀님 쪽을 보며 웃으면서 오고 있습니다.”
“하지만 내가 반가워서 그럴 수도 있잖아.”
“그렇긴 하지만 대개 인간들이 저희와 같지는 않잖습니까?”
“그렇긴 하지.”
발레린이 작게 동의하자 그로프가 울었다.
“개꿀개꿀.”
그 소리에 그 사람은 멈춰 서서 이리저리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개구리를 못 찾았는지 이내 그 사람은 발레린에게 다가왔다. 꽤나 큰 키였다. 제르딘과 비교하면 약 1mm 작을 만큼 컸는데 덩치도 제르딘 못지않게 대단했다.
발레린이 물끄러미 보자 그는 곧장 발레린에게 고개를 숙이며 소개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헬릭스라고 합니다.”
“저는 발레린입니다.”
발레린이 예법에 맞게 인사하자 헬릭스가 웃었다.
“저희 할머니가 보시면 아주 좋아하실 것 같습니다. 이렇게 예법을 완벽히 따른 인사를 하시니까요.”
발레린은 칭찬에 기분이 좋아져 활짝 미소를 지었다. 그것을 물끄러미 보고 있던 헬릭스가 나직이 말했다.
“그나저나 그 방독면은 벗으시는 게 어떠십니까?”
“왜요?”
“잘나신 공녀님의 얼굴을 다 가리고 있어서 제 마음이 아픕니다.”
심히 걱정하는 어투에 발레린은 설마설마하며 물었다.
“혹시 헬릭스 님도 저와 동족인가요?”
“무슨 말입니까?”
“독 말이에요.”
발레린이 속삭이듯 말하자 헬릭스는 기분 좋은 듯 웃으며 말했다.
“맞습니다. 당신의 독에 중독되고 싶은 외로운 사람이죠.”
그 말에 발레린은 활짝 웃으며 말했다.
“그럼 제가 방독면을 벗어도 되나요?”
“네, 벗으십시오. 저는 언제든 준비되어 있습니다.”
발레린은 주변을 두리번거린 뒤 사람이 없는지 확인했다. 눈에 보이는 사람은 없었다. 발레린은 안도하며 방독면을 벗었다. 그리고 여전히 밝은 미소를 지으며 헬릭스에게 말했다.
“동족이라서 반가워요.”
하지만 그 말을 하자마자 헬릭스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뒤로 쓰러졌다.
03. 무심한 존재
발레린은 재빨리 헬릭스에게 다가갔다. 그의 얼굴은 점점 퍼렇게 부풀고 있었다. 발레린은 우선 방독면을 쓰고는 주머니를 뒤졌다. 다행히 남은 센트릴 잎이 있었다.
곧 센트릴 잎을 꺼내서 헬릭스의 입에 넣었다. 헬릭스는 센트릴 잎을 삼키긴 했지만 영 움직임이 없었다.
발레린은 잔뜩 내려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동족이 아니었나 봐.”
“웃으면서 오는 것부터 이상하긴 했습니다.”
그때 헬릭스가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발레린은 헬릭스에게 물러나서 주변을 둘러봤다. 하인들이 놀란 얼굴로 서 있었지만 쉽사리 다가오진 않았다. 결국 발레린은 헬릭스에게서 완전히 물러나서 외쳤다.
“의사 불러 줘!”
몇몇이 머뭇거리는가 싶더니 재빨리 고개를 끄덕이며 반대쪽 복도로 뛰어갔다. 다른 하인들은 서로 속닥거리며 잔뜩 굳은 얼굴로 발레린을 쳐다보고 있었다.
발레린은 괜히 저 때문에 사람들이 가까이 오지 않는 것 같아 창가로 물러났다. 시무룩한 얼굴로 창가에 선 채 누워 있는 헬릭스를 쳐다봤다. 다행히 센트릴 잎으로 응급 처치는 끝났지만 상태는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았다. 여전히 눈을 뜨지 않고 숨만 내쉬고 있을 뿐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방독면을 벗는 게 아니었는데.’
너무나 사람을 믿은 결과였다. 동족인 줄 알고 방독면을 벗었으나 발레린은 실로 자신의 독기만 보인 꼴이었다.
그때 그로프가 말했다.
“주인님, 너무 상심하지 마십시오. 덕분에 저 남자도 멋대로 말하는 걸 고치게 될 겁니다.”
“괜찮겠지?”
“네, 주인님께서 누구보다 빨리 응급 처치를 하셨으니 괜찮을 겁니다.”
그래도 발레린은 헬릭스를 주의 깊게 지켜봤다. 주변에서는 속닥거리는 소리가 은근히 울렸다.
“어떻게 저런 사람을 궁에 데려오게 된 걸까?”
“워낙 독으로 사람이 많이 죽잖아. 왕자님도 할 수 없었던 거지.”
“그래도 저런 사람이 있다면 궁에는…….”
사람들이 모여드는 소리가 들렸다. 하얀 옷에 핏방울 완장을 찬 사람들이 헬릭스 앞으로 뛰어왔다.
“어쩌다 이렇게……!”
하얀 수염이 있는 의사가 주변을 둘러봤다. 하인들은 모두 눈짓으로 발레린을 가리켰다. 의사의 눈길이 발레린에게 갔다. 발레린은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헬릭스 님이 동족인 줄 알고 방독면을 벗었는데…….”
“방독면을 벗다니요! 이곳은 궁입니다. 안 그래도 공녀님의 독기가 가득한데…….”
그때 웅성거리는 소리가 울렸다. 이곳으로 누군가 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