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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빛 저주의 공녀님-14화 (14/130)

14화

발레린은 오히려 제르딘의 시선을 즐기며 말했다.

“이 독을 숨긴 사람은 하녀복을 입고 있었는데 팔에 완장을 달고 있었어요. 그리고 주변에 루네스라는 제 전용 하녀도 쓰러져 있었고요. 무척이나 다행인 건 제가 그때 센트릴 잎을 가지고 있어서 루네스를 살릴 수 있었어요.”

긴 이야기였지만 제르딘은 한 마디도 흘려듣지 않았다. 오히려 발레린의 목소리는 귀에 쏙쏙 박혀서 이해가 잘 되었다. 거기다 발레린은 유일하게 증거로 쓸 만한 것을 목격했다. 그가 그토록 찾아 헤맨 증거였다.

제르딘의 얼굴은 절로 펴졌다.

“하녀장이군요. 여태껏 독을 누가 숨겨서 관리하나 싶었는데. 어쨌든 발레린 공녀, 고맙습니다. 첫날부터 꽤 큰 일을 했습니다.”

제르딘은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최근 10년간 제대로 된 미소를 지은 적 없던 그였다. 발레린은 그 모습에 감격해서 넋을 잃은 듯 제르딘을 쳐다봤다.

그때 마침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곧 보좌관이 들어왔다. 제르딘은 보좌관에게 틱시 독이 담긴 작은 병을 내밀었다.

“노란 장미 나무 아래에서 발견했다고 했어. 그 주변을 자세히 조사하고 하녀장을 곧바로 잡아. 그리고 이 독은 조사관에게 제출해서 분석하라고 해.”

보좌관은 고개를 끄덕인 뒤 말했다.

“점심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제르딘은 시계를 확인했다. 벌써 점심시간이었다.

“발레린 공녀도 왔으니 정찬실에서 음식을 먹어야겠지.”

“그럼 정찬실로 가시죠.”

보좌관이 먼저 안내했다. 제르딘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발레린도 그를 따라서 일어나자 제르딘이 발레린에게 다가와 말했다.

“제 음식에 독이 있는지 감별해 주시면 됩니다.”

부드럽게 떨어지는 목소리는 꽤 감미로웠다. 순간 발레린은 심장이 쿵쿵 뛰었다. 의도치 않게 제르딘과 숨이 닿을 만큼 가까울 거리였다. 거기다 갑자기 다가온 제르딘의 존재감은 남달랐다.

발레린은 조심스레 고개를 들었다. 하늘빛 눈동자와 마주쳤다. 제르딘은 대답을 기다리는 눈치였다. 발레린은 재빨리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그럴게요!”

활기찬 발레린의 대답과 다르게 제르딘은 무감한 눈빛으로 내려다봤다. 발레린은 얼굴이 빨개질 것 같았으나 겨우 말했다.

“혹시 그로프 음식도 챙겨 주나요?”

제르딘은 발레린의 손 위에 있는 그로프를 쳐다봤다. 그로프도 멀뚱멀뚱 제르딘과 시선을 맞췄다. 그는 우선 고개를 끄덕였다.

“개구리가 먹을 만한 것으로 준비하라고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왕자님. 역시 왕자님은 친절하세요.”

친절이라는 말에 제르딘은 헛웃음이 나올 뻔했지만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이상하게 발레린에게 자신이 가지지 않은 부분에 대해 칭찬을 듣는 것이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

그렇게 정찬실에 거의 다 도착했을 때였다. 하인들은 제르딘을 보고 인사한 뒤 발레린을 힐끔거리며 수군거렸다.

“앞으로 이 시간에는 오지 말아야겠어.”

“왜?”

“저 공녀가 돌아다니면 근처에 있다가 내가 잘못될 수도 있잖아.”

소곤거리는 소리였지만 제르딘이 곧장 멈춰 섰다. 그는 하인들이 모여 있는 곳을 쳐다봤다.

“감히 공녀가 앞에 있는데 그런 소리를 하다니.”

“죄, 죄송합니다.”

“너희보다 지위가 높은데 얼마나 무시하면 그런 소리가 나오지?”

“주,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하인들이 재빨리 무릎을 꿇으며 머리를 조아렸다.

“심지어 나와 함께 지나갈 때 그런 소리를 지껄였지.”

“죄송합니다. 왕자님, 저희는…….”

“변명은 됐다. 배도스 공작이 하인들 관리를 아주 엉망으로 했구나. 하녀장도 곧 감옥에 들어갈 테니 이참에 주변을 완전 바꿔야겠어.”

바로 앞에 있는 하인들은 물론 주변에 돌아다니던 귀족까지 놀란 눈으로 제르딘을 보았다.

제르딘은 보좌관에게 명령했다.

“지금 무릎을 꿇은 하인들은 내 앞에서 말을 함부로 한 죗값으로 한 달간 감봉에 처한다. 앞으로 입조심하도록.”

하인들은 울상을 지은 채 고개를 숙였다. 보좌관은 곧바로 수첩에 내용을 적은 뒤 하인을 돌려보냈다. 발레린은 상황을 모두 보다가 홀린 듯 제르딘을 쳐다봤다.

발레린은 마음속이 벅차오르는 듯했다. 여태껏 다른 사람이 저를 위해 이렇게까지 말하지는 않았다. 모두 무시하기나 했지.

그러나 잘생긴 왕자님은 친절하면서 제 사람까지 챙길 줄 알았다. 발레린은 눈을 빛내며 중얼거렸다.

“왕자님 같은 분은 이 세상에 더 없을 거예요.”

한순간 주변이 조용해졌다. 제르딘이 살짝 눈매를 굳혔다. 그는 발레린을 응시했다. 저런 말은 생각으로만 하지, 실제로 입 밖으로 꺼낸 사람은 처음 봤다. 너무나 어이가 없어서 그가 여전히 지켜보고 있자 발레린이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황급히 입을 열었다.

“감사합니다. 왕자님. 저를 위해서 이렇게까지 말씀해 주시고.”

발레린은 무척이나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였다. 정석에 가까운 예법 인사에 제르딘은 잠시 얼떨떨하다가 이내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무감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연한 일을 했을 뿐입니다. 공녀는 저와 곧 결혼할 사이이고 독 감별사이니 공녀를 욕하는 건 절 욕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니까요.”

마침 정찬실 문은 열려 있었다. 제르딘은 먼저 발레린을 들여보내 주었다. 발레린은 활짝 웃으며 고갯짓을 하고는 정찬실 안으로 들어갔다.

정찬실 안에는 여러 음식이 차려져 있었다. 발레린은 놀란 눈으로 이리저리 쳐다봤다. 그동안 독으로만 맛봤던 실제 과일들이 그녀의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포도, 사과, 딸기에서부터 시작해서 열대 과일인 망고까지. 없는 과일이 없을 정도였다.

발레린은 식탁에 있는 과일을 둘러보다가 순간 제르딘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차분히 말했다.

“그동안 탑 안에 갇혀 있어 과일은 잘 못 먹은 것 같아서 일부러 준비했습니다. 아무래도 실제 과일을 먹어야 더 좋을 것 같아서요.”

“…….”

발레린은 대답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오로지 놀라움뿐이었다. 반면 제르딘은 멍하게 자신을 보는 발레린을 보며 살짝 눈썹을 찌푸렸다.

“혹시 과일을 싫어하는 겁니까?”

그 말에 발레린은 서둘러 정신을 차리곤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요! 정말 정말 좋아해요!”

꽤 높은 목소리였다. 제르딘은 그런 목소리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지만 어쨌든 차분히 대답했다.

“다행입니다. 그럼 맛있게 드시길 바랍니다.”

“…….”

여전히 발레린은 쉽사리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는 제르딘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넋이라도 놓은 얼굴이었다. 제르딘은 잠시 눈을 맞추어 주었다. 하지만 발레린은 여전히 시선을 떼지 않았다.

결국 제르딘이 먼저 시선을 떼며 의자에 눈짓했다. 그제야 발레린은 주변을 둘러보더니 서둘러 자리에 앉았다. 그러곤 코를 이리저리 킁킁대더니 이내 제르딘에게 말했다.

“여기에 독 냄새는 나지 않아요. 음식은 드셔도 될 거예요.”

“일반 과일도 섞여 있는데 독 냄새를 구분할 수 있습니까?”

“독은 과일과 다르게 조금 신 냄새가 있어요.”

그때 그로프가 울었다.

“개꿀개꿀.”

마침 그로프 앞에도 귀뚜라미가 있었다. 귀뚜라미는 작은 통에 담겨 있었는데 그로프가 혀를 내밀기만 하면 쉽사리 잡히는 구조였다.

발레린은 그로프를 잠시 보더니 제르딘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로프도 만족스러워하는 것 같아요. 다시 한번 고맙습니다. 왕자님.”

제르딘은 고개를 끄덕이곤 음식을 먹었다. 하지만 발레린은 여전히 음식을 보고만 있었다. 그제야 발레린의 방독면이 보였다. 제르딘은 자신의 무지를 탓하며 주변에 있던 하인을 모두 물러나게 했다. 그러곤 발레린에게 말했다.

“공녀, 방독면은 벗어도 됩니다.”

“하지만 왕자님께서 위험하실 텐데요.”

“보다시피 저와 공녀 사이의 거리는 5미터 정도입니다. 그러니 이곳까지 독이 퍼지지 않을 겁니다. 마침 제 옆에 창문도 있으니 환기도 되고요.”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만약이라는 말도 있잖아요.”

발레린은 눈에 띄게 걱정했다. 그럼에도 제르딘은 단호하게 말했다.

“전 괜찮으니 방독면을 벗고 식사하셔도 됩니다.”

발레린은 잠시 망설이는가 싶더니 이내 방독면을 벗었다. 그제야 그녀의 얼굴이 완전히 드러났다. 맨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초록빛 입술이었다. 제르딘은 그 입술을 잠시 보다가 이내 고개를 내려 음식을 내려다봤다. 그는 포크를 쥔 채 한숨을 내쉬었다.

한편 발레린은 책에서 보던 것처럼 포크를 쥐고 음식을 먹었다. 탑 안에서 먹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맛이었다. 발레린은 더는 망설이지 않고 가리는 것 없이 먹었다.

제르딘은 지루한 칼질을 하다 문득 고개를 들었다. 발레린이 과일을 이것저것 먹으며 밝게 웃음 지었다. 그는 저도 모르게 발레린을 쳐다봤다.

늘 먹는 것을 조절하는 귀족들과 같이 식사를 하다가 시원스럽게 먹는 발레린의 모습은 새로웠다. 그러다 문득 발레린이 고개를 들었다.

발레린은 씹던 것을 넘기고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말했다.

“혹시 제가 먹는 게 너무 지저분했나요?”

“아니요. 오히려 다른 누구보다 예법에 맞는 식사를 하셨습니다. 거기다 잘 드시는 걸 보니 보기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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