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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빛 저주의 공녀님-13화 (13/130)

13화

“그러니 이번에는 그저 관망하는 게 옳을 것 같습니다. 굳이 움직이지 않아도 알아서 일이 해결될 테니까요.”

배도스 공작은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리며 생각에 잠긴 듯 가만히 있었다. 그러다가 루티스 백작에게 물었다.

“그런데 독은? 잘 숨겨 놓았겠지?”

“제가 믿고 맡기는 사람에게 이미 지시를 해 놓았습니다. 미리 공녀의 전용 하녀가 되는 사람도 알아내서 일을 처리하게 시켰고요.”

그 말이 끝나자마자 배도스 공작이 간악한 미소를 지었다.

“그 말을 들으니 묵은 속이 내려가는 것 같구나.”

그때 문이 벌컥 열렸다. 셔츠를 제대로 잠그지 않은 새파랗게 젊은 공자가 터덜터덜 서재로 들어왔다. 배도스 공작은 주먹을 부들부들 떨며 말했다.

“헬릭스! 너 이게…….”

“아버지, 기껏 왔는데 반갑다고 인사라도 해 주시면 어디 덧납니까?”

배도스 공작은 다른 귀족들이 있는데도 냅다 헬릭스에게 얼음을 던졌다. 헬릭스는 기세 좋게 얼음을 받고는 입안에 넣었다.

“확실히 찬 걸 먹으니까 머리가 깨는 것 같네요.”

헬릭스는 얼음을 아드득 씹으며 빈자리에 앉았다.

“너는 몇 시인데 이제야 나타나는 거냐!”

배도스 공작이 소리를 지르자 헬릭스가 시계를 보더니 말했다.

“그래도 아직 점심시간 전입니다.”

“그걸 말이라고 하느냐? 제르딘이 벌써 저주받은 공녀까지 왕궁에 불러들인 마당에 너라도 얼른 정신을 차려야지, 허구한 날 저택에선 자지도 않고 술이나 퍼마신다니.”

헬릭스는 하품을 하고서 눈을 깜빡였다. 배도스 공작의 얼굴이 붉어지며 점차 일그러지자 루티스 백작이 급하게 나섰다.

“하하, 도련님께서 어제 밀린 서류를 많이 본다고 과음하셨나 봅니다.”

그 말에 배도스 공작의 얼굴이 대번에 펴졌다.

“그게 사실이냐?”

헬릭스는 루티스 백작을 봤다. 루티스 백작이 살짝 고개를 끄덕이자 헬릭스가 말했다.

“네.”

그 말이 떨어지자 배도스 공작은 아까와 다르게 다소 누그러진 태도로 말했다.

“그래, 앞으로 더 노력하거라. 자꾸 미루지 말고.”

“네.”

그래도 대답은 꼬박꼬박 하는 꼴을 보며 배도스 공작은 마음을 놓았다. 그때 루티스 백작이 배도스 공작에게 말했다.

“그나저나 이제 저주받은 공녀는 원로원 귀족이 알아서 내보낼 테니 저희는 미리 자축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어차피 저희가 손을 쓰지 않아도 일이 잘 해결될 텐데요.”

그 말이 만족스러운지 배도스 공작이 미소를 지었다.

“그래, 그것도 나쁘지 않겠지.”

그러곤 배도스 공작은 집사를 불러서 자축 자리를 마련하라고 지시했다. 곧 탁자 앞에 앉은 귀족들이 하나둘씩 일어났다. 배도스 공작도 나가고 막 루티스 백작도 뒤를 따라가려고 할 때였다. 누군가 그의 팔을 잡았다.

루티스 백작이 돌아보자 헬릭스가 물었다.

“저주받은 공녀는 뭡니까?”

여자 문제가 복잡한 헬릭스는 역시나 여자에 대한 말이 나오면 관심이 많았다. 루티스 백작은 어차피 발레린 공녀는 저주를 받았으니 헬릭스가 건들지 못할 것임을 알았다. 그는 대수롭지 않은 듯 말했다.

“발레린 공녀입니다.”

“발레린 공녀? 처음 듣는데.”

헬릭스의 얼굴은 대번에 밝아졌다. 루티스 백작은 속으로 혀를 차면서 말했다.

“발레린 공녀는 저주를 받았으니 가까이 가면 화를 입을 겁니다.”

“가까이 가지 못한다고요?”

“예, 아무리 공자님이 어떻게 하고 싶다고 해도 가까이 가기만 하면 독에 걸리니 최대한 멀리하는 게 좋을 겁니다.”

그 말에 오히려 헬릭스는 웃었다.

“제가 여자 문제에 있어서는 멀리하지 못하는 것 아시잖습니까?”

“공자님, 그래도 발레린 공녀는 많이 위험합니다.”

“제가 건들지 못할 정도로 위험합니까?”

“네.”

“그럴수록 더 건들고 싶어지는데.”

루티스 백작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무튼 공자님, 제가 한 말은 농담이 아닙니다. 정말 발레린 공녀는 위험합니다.”

그 말에도 헬릭스는 빙긋 웃기만 했다.

발레린은 곧장 왕자의 집무실로 향했다. 바나나 향 독도 발견하고 사람도 살렸으니 발레린의 기분은 가볍고 좋기만 했다. 그녀의 발걸음은 춤을 추는 듯 우아하고 가벼웠다. 발레린은 살랑거리는 발걸음으로 복도를 걸었다.

그때 하인들이 방독면을 쓴 발레린을 보며 수군거렸다.

“왕자님도 너무하셔. 어떻게 저주받은 공녀를 왕궁에 데려올 생각을 하셨을까?”

“그러게. 옆에 있다가 나도 모르게 독에 중독되면 어떡해.”

발레린은 자신의 방독면을 다시 확인했다. 멀쩡했다. 아까부터 저런 소리를 들었으니 확실히 말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거기다 왕자와 결혼까지 하니 발레린은 왕궁의 하인들과도 좋은 사이를 유지하고 싶었다.

발레린은 웃는 얼굴로 그들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주변에 있던 하인들은 놀라며 흩어졌다. 발레린은 멀뚱히 서서 하인들의 뒷모습을 쳐다봤다.

그저 사실을 말하고 하인들과 친하게 지내고 싶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발레린이 가까이 가면 흩어졌고 멀리 있으면 저들끼리 속삭였다.

발레린은 그로프에게 속삭였다.

“그로프, 혹시 내게 친화적인 기술이 부족했을까?”

“아닙니다. 우선 밝게 웃으며 다가갔지 않습니까?”

“그렇지? 분명 책에서 배운 대로 했는데.”

발레린은 문득 자신의 방독면을 만져 보았다. 마침 앞에는 거울이 있었다. 가끔 하인들이 용모를 단장하는 용도로 쓰이는 듯했다. 발레린은 거울 앞에 자신을 비춰 보았다.

검은 방독면, 검은 곱슬머리, 눈에 띄는 보라색 드레스, 그리고 빨간 독 개구리 그로프. 발레린은 거울을 물끄러미 보며 말했다.

“그로프, 우린 그래도 완벽하지 않니?”

발레린은 결코 자신을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남들과 조금 다를 뿐.

“네, 오늘따라 제 몸 빛깔도 좋습니다.”

“그래, 완벽해.”

어차피 우울하게 생각해 봤자 인상만 더 찌푸려질 뿐이었다. 발레린은 다시 방독면을 확인하곤 기분 좋게 몸을 돌렸다. 주머니에는 바나나 향을 풍기는 독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이 독 덕분에 왕자와 한 번 더 만날 수 있는 것이다.

발레린은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힘차게 걸었다. 어느덧 왕자의 집무실과 가까워졌다.

집무실 앞에 도착하자 발레린은 문지기에게 말했다.

“독을 발견해서 가져왔어.”

문지기는 고개를 끄덕이곤 집무실에 들어갔다가 잠시 후 나왔다.

“곧바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발레린은 예법에 맞게 인사하곤 집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제르딘은 마침 해인저 모녀의 재판 일정을 보고 있었다. 그는 발레린이 들어오자 곧바로 아까 그녀가 앉았던 자리로 안내했다.

“독을 찾았다고요?”

발레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드레스 주머니에서 노란빛의 독을 꺼냈다.

“노란 장미 나무 밑에서 찾았어요.”

제르딘은 발레린이 준 독을 유심히 보았다. 그가 유난히 집중하는 듯 보자 발레린은 제르딘에게 도움이 될까 싶어서 황급히 말했다.

“이 독 이름은 틱시예요. 저에겐 바나나 향이 강하게 나는데 다른 사람은 한 방울만 먹어도 곧바로 쓰러지는 맹독성 물질이죠. 그래도 30분 이내에 해독제를 먹으면 멀쩡한 독이기도 해요.”

그때 제르딘이 고개를 돌렸다. 하늘빛 눈동자와 마주치자 발레린은 활짝 웃었다. 제르딘은 잠시 발레린을 보다가 이내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

“이걸 어떻게 찾으셨습니까?”

“냄새를 맡았어요. 이 독에는 바나나 향이 나거든요.”

제르딘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독을 찾아 주셔서 고맙습니다. 안 그래도 놈들이 독을 숨겨 놓는 장소가 있을 것 같았는데 생각보다 가까이 있었군요.”

“그런데 이 독은 버리시나요?”

“조사관들이 독에 대해 분석한 뒤에는 곧바로 폐기 처분 할 겁니다.”

“그럼 저한테 주시면 안 될까요?”

제르딘이 이해하지 못한 듯 굳은 얼굴로 보자 발레린은 급히 설명했다.

“제가 먹고 싶어서요. 안 그래도 이런 순수한 독은 잘 못 먹었거든요.”

“괜찮겠습니까?”

“이런 독은 많이 먹어 왔는걸요. 참고로 그로프도 잘 먹어요.”

“개꿀개꿀.”

제르딘은 어이없는 상황에 그저 고개를 내저었다. 여전히 발레린이 눈을 빛내며 보고 있었다. 그는 결국 발레린에게 독을 나눠 담아 주었다.

“어차피 조사관은 독을 많이 분석하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이 독은 다른 곳에 쓰지 말고 꼭…….”

발레린은 기대하듯 제르딘을 쳐다봤다. 제르딘은 무언가 어감이 이상한 듯했지만 그래도 이어서 말했다.

“드셔야 합니다.”

“걱정 마세요. 지금 곧바로 먹을 수 있어요.”

제르딘은 자신이 하는 행동이 옳은가 싶었지만 발레린이 괜찮다고 하니 독을 내밀었다. 그러자 발레린은 예법에 맞춰 우아하게 인사를 한 뒤 그로프에게도 한 입 주었다. 그로프는 개꿀개꿀 울면서 독을 먹었다.

다행히 독 개구리는 죽지 않았다. 발레린은 그로프와 몇 마디 이야기를 한 뒤 곧바로 독을 마셨다.

제르딘은 긴장하며 발레린을 쳐다봤다. 곧 발레린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역시 틱시예요. 특히 지금은 순수한 독만 있어서 그런지 바나나 보다 더 맛있어요!”

행복한 얼굴이었다. 그것도 맛있는 음식이라도 먹은 것처럼 밝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제르딘은 도저히 이 상황이 믿기지 않아 한참 동안 발레린을 쳐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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