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확실히 이곳이 더 낫습니다.”
발레린도 만족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주변을 둘러보고 방 이곳저곳을 살피다 보니 어느새 발레린은 할 일이 없어졌다. 그녀는 문득 시계를 봤다. 이곳에 온 지 한 시간이 지나 있었다.
“그나저나 왜 아무도 오지 않지?”
“하녀 말입니까?”
“응, 아까 분명 보좌관이 말하지 않았어? 전용 하녀가 방문할 거라고.”
“저도 분명 그렇게 들었습니다.”
“어차피 할 일도 없는데 잠깐 정원 좀 둘러볼까? 왕자님이 이곳은 자신의 궁이니 마음껏 돌아다녀도 된다고 했잖아.”
그로프가 고개를 끄덕였다. 발레린은 다시 방독면을 쓰고 문을 열었다. 복도는 한산했다. 몇몇 하인이 발레린을 보며 놀랐지만 발레린은 개의치 않고 계단을 내려갔다.
궁을 완전히 나오자 밝은 햇살이 그녀의 눈을 자극했다. 발레린은 오랜만에 햇살을 느끼며 잠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때였다. 상큼한 냄새가 은은하게 코끝을 스쳤다. 킁킁. 발레린은 저도 모르게 냄새를 맡았다. 묘하게 먹성을 자극하는 냄새였다. 발레린은 그로프에게 말했다.
“그로프, 너도 이 냄새 느껴지니?”
“바나나 냄새 말입니까?”
“응, 어디선가 많이 맡아 본 냄새지?”
“확실히 익숙합니다.”
분명 틱시 냄새였다. 맹독성 물질인데 발레린이 좋아하는 바나나 맛이 나는 독이기도 했다. 발레린은 절로 침을 삼키며 킁킁 냄새를 맡았다. 그렇게 냄새를 따라가며 정원을 걸어가는데 걸을수록 점점 냄새가 강해졌다.
노란 장미 나무가 많은 곳에 들어섰을 때였다. 마침 누군가 보였다. 그 사람은 노란 장미 나무 밑에 있는 수풀 사이에 무언가를 갖다 놓고는 몸을 돌렸다. 발레린은 근처에 있는 노란 장미 나무 뒤에 숨어서 살폈다.
그 사람은 하녀복을 입고 있었으나 꽤 높은 사람인지 팔에는 인장을 달고 있었다. 발레린은 그로프에게 속삭였다.
“하녀장인가 봐.”
“그런 것 같습니다. 걷는 모양새가 오만하군요.”
발레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 사람이 완전히 지나간 후 노란 장미 나무에서 나왔다. 그리고 그 사람이 숨겨 놓은 곳을 재빨리 확인했다.
하얀 천 가방이었다. 발레린은 천 가방을 들어 안에 있는 것을 꺼냈다. 노란 물약이 담긴 작은 병이었는데 틱시 냄새가 무척이나 강했다.
발레린은 활짝 웃으며 외쳤다.
“독이야!”
그로프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확실히 냄새가 강합니다.”
발레린은 황급히 노란 물약의 마개를 빼서 냄새를 맡았다. 진한 향이 발레린의 코를 자극했다. 바나나 향이었다. 아까부터 강렬하게 났던 향! 그것도 순수하고 맑은 바나나 향이었다. 발레린은 절로 미소를 지었다.
“그로프, 너도 냄새 맡아 볼래?”
발레린이 속삭이듯 말하자 그로프가 고개를 내밀어 냄새를 맡았다.
“잘 만들어진 독이군요. 이전에 맡았던 독보다 향이 꽤 강합니다.”
“그렇지? 이건 왕자님께 잘 갖다 드리자.”
그렇게 발레린은 독이 든 병을 주머니에 넣고는 몸을 돌렸다. 그러나 발레린은 바로 움직이지 않았다. 발레린은 고개를 들어 냄새를 맡았다.
“그로프, 이상하지 않아?”
“무엇이 말입니까?”
“분명 나한테 독이 있는데 이상하게 다른 곳에서 똑같은 독 냄새가 나는 것 같아.”
발레린은 킁킁 냄새를 맡으면서 고개를 이리저리 돌렸다. 그러다 수풀에 가려진 사람의 신발을 보았다.
“저거 신발 아니야?”
발레린이 놀라며 말하자 그로프가 재빨리 펄쩍 뛰어가서 확인했다. 발레린도 급히 가는데 그로프가 외쳤다.
“사람이 쓰려져 있습니다!”
그로프의 말대로 사람이 쓰러져 있었다. 짧은 갈색 머리에 하녀복을 입은 사람이었다. 발레린은 급히 주머니를 뒤져서 왕자가 준 센트릴 잎을 하녀에게 먹였다. 그러자 잠시 후 하녀가 눈썹을 찌푸리며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발레린은 마음을 놓으며 그로프에게 말했다.
“그나마 우리가 일찍 발견했나 봐. 독을 토해 내니까.”
“늦지는 않았나 봅니다.”
발레린은 그로프와 함께 하녀가 기침을 하며 독을 전부 토해 낼 때까지 기다렸다. 마침내 그 사람이 기침을 겨우 끝내고 천천히 주변을 둘러봤다. 그러다 발레린을 보고는 놀라서 물러났다.
“누, 누구세요?”
“난 발레린 사르티아야. 이쪽은 내 독 개구리 그로프이고.”
발레린이 그로프를 들고 소개를 하자 그 사람은 잠시 눈을 깜박이다가 이내 급히 고개를 숙였다.
“공녀님. 죄송합니다. 알아보지 못하고.”
“아니야. 그나저나 넌 이름이 뭐야?”
“전 루네스라고 합니다. 마침 공녀님의 전용 하녀로 배정받았습니다.”
그 말에 발레린은 활짝 웃으며 손을 건넸다. 그녀의 손은 햇빛을 전혀 받지 못한 것처럼 새하얀 빛이었다. 루네스는 잠시 놀란 얼굴로 보다가 이내 천천히 손을 맞잡았다. 그러자 발레린이 활기찬 목소리로 말했다.
“반가워, 루네스.”
“저도 영광입니다. 그나저나 구해 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그 말에 발레린은 활짝 웃었다.
“오히려 내 동족을 구해서 나도 기분이 좋은걸.”
여태껏 발레린은 저와 독기가 통하는 것만 구해 줄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야말로 자신의 독으로 사람을 쓰러트린 것이 아니라 구한 것이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발레린은 기뻤다.
발레린은 벅찬 마음으로 루네스를 살폈다. 옷에는 풀잎과 흙이 묻어 있었는데 어딘가 이상했다. 그러고 보니 이곳은 정원 한가운데였고 사람도 지금까지 마주치지 않을 정도로 인적이 드문 곳이었다.
‘이런 곳에 사람이 쓰러져 있다니.’
어딘가 이상했다.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이야?”
발레린이 묻자 루네스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마침 하녀장님이 저에게 할 이야기가 있다고 하며 이쪽으로 불렀습니다. 그리고 그동안 수고했다며 마실 것을 주었는데 전 그것을 먹자마자 쓰러졌고요.”
발레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녀장이 준 건 독일 거야. 아까 하녀장이 독을 숨기는 걸 봤거든.”
루네스는 놀란 얼굴로 발레린을 쳐다봤다. 하지만 발레린은 활짝 웃는 얼굴로 말했다.
“하녀장이 숨긴 건 찾았어. 내 코가 독 냄새 맡는 건 기가 막히거든.”
발레린은 주머니에서 꺼낸 노란 물약을 흔들었다. 루네스는 긴장한 얼굴로 병을 보다가 이내 천천히 일어났다.
“제가 아까 무례했다면 사과하겠습니다. 너무 정신이 없어서요.”
“아니야, 누구라도 나를 처음 본다면 그렇게 놀랄 거야.”
확실히 발레린은 평범한 공녀 차림은 아니었다. 검은 방독면에 초록빛 입술, 그리고 눈에 띄는 보라색 드레스는 일반적인 사교계 사람이 입는 드레스와는 많이 달랐다. 특히 보랏빛 드레스는 과감한 색이라서 누구도 감히 도전 못 할 듯했다.
“그나저나 몸은 괜찮아? 내가 급히 센트릴 잎으로 처치하긴 했지만 그래도 의사에게 가 봐야 할 것 같은데.”
“전 괜찮아요. 약간 머리가 아프긴 하지만.”
루네스는 이마를 만지작거리며 눈을 찌푸렸다. 발레린은 루네스를 물끄러미 보다가 급히 말했다.
“루네스, 아무래도 지금 당장 의사에게 가야 할 것 같아. 머리가 아픈 것을 보면 독이 완전히 빠져나가지 않은 것 같거든.”
발레린이 심각하게 말하자 루네스도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혹시 독이 완전히 빠져나가지 않으면 어떻게 되나요?”
“대표적인 부작용으로 기억을 잃을 수 있어.”
그 말에 루네스는 천천히 일어났다.
“그럼 공녀님, 실례가 안 된다면 먼저 가 봐도 될까요? 아무래도 왕궁 안에 있는 병원에 가야 할 것 같아서요.”
발레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같이 안 가 줘도 되겠어?”
“다행히 어지러울 정도로 머리가 아픈 건 아니라서요.”
발레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편의 봐주셔서 고맙습니다. 이 은혜는 꼭 잊지 않을게요.”
루네스는 인사를 하곤 그곳을 벗어났다. 발레린은 주변을 다시 둘러봤다. 이제 바나나 냄새는 자신이 들고 있는 병 빼고는 느껴지지 않았다.
바쁘게 향하던 발레린의 고개가 어느덧 멈췄다. 맑은 하늘이 보였다. 그리고 정원 속의 노란 장미는 언제 그랬냐는 듯 아름답게 피어 있었다. 더없이 평화로운 풍경이었지만 발레린은 루네스가 사라진 쪽을 보며 중얼거렸다.
“확실히 왕궁은 책에서 보던 것처럼 사건 사고가 많구나.”
그로프도 동의하듯 울었다.
“개꿀개꿀.”
배도스 공작의 집무실 안, 넓은 책상에는 귀족들이 모여 앉아 있었다. 그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사람은 배도스 공작이었다. 그는 하인이 갖다 준 얼음을 씹고 있었다.
제법 나이가 있음에도 그는 굳이 얼음을 씹어 먹었다. 예전부터 이어 오던 습관이었다. 의사가 이제는 나이를 생각해야 한다고 말했지만 배도스 공작은 죽을 때까지 얼음을 씹을 것이다.
지금처럼 마음에 들지 않는 상황이 나왔을 땐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속이 들끓었다.
배도스가 책상을 탁 쳤다.
“감히 저주받은 공녀를 왕궁에 끌어들이다니!”
그때 배도스 공작 옆에서 받을 대로 받아먹은 루티스 백작이 말했다.
“너무 상심치 마십시오. 어차피 원로원 귀족들이 한마디 하면 나갈 겁니다.”
“맞습니다. 아까도 왕궁에서 원로원 귀족들이 먼저 공녀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처럼 말하지 않았습니까?”
“하하, 저도 봤습니다. 원로원 귀족이 어떤 분들입니까? 어느 누구보다 깐깐하고 쉽게 휘둘리지 않는 분 아닙니까?”
그 말에 배도스 공작은 납득한 건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그런 깐깐한 노인네들 마음 얻기가 쉬운 줄 아나? 하긴, 그런 노인네는 누구보다 저주 같은 것에 민감하니 곧바로 조치를 취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