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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빛 저주의 공녀님-11화 (11/130)

11화

물이 묻지 않은 센트릴 잎의 보랏빛이 특히 영롱해서 절로 눈길이 갔다.

발레린이 눈을 떼지 않고 보자 제르딘이 설명했다.

“요즘 독살이 많아서 항상 챙겨 놓고 있습니다.”

“그럼 저도 가져가도 되나요?”

제르딘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가져가세요. 아직 남은 게 더 많습니다.”

발레린은 감사 인사를 하며 센트릴 잎을 챙겼다. 그러곤 찻잔을 들어 향을 맡았다. 하지만 먹지는 못했다. 방독면을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발레린이 다시 찻잔을 내려놓자 제르딘이 말했다.

“혼자 있을 땐 방독면은 벗어도 됩니다.”

“고맙습니다.”

제르딘은 잠시 차를 마셨다가 천천히 입을 뗐다.

“그리고 우선 공녀가 할 일은, 저택에서도 들었겠지만 제 근처에 있으면서 독이 있는지 감별하는 겁니다. 일은 그다지 어렵지 않을 겁니다. 그저 독이 있는지 없는지 구별하면 되니까요.”

“그런데 독을 구별하는 마법 가루가 있지 않나요?”

“있긴 하지만 마법 가루를 채취하는 곳이 거의 사라져서 이제는 부르는 게 값일 정도로 비쌉니다.”

“생각보다 세상이 많이 변했네요.”

“탑에 있을 때보다 적응하기가 힘들 겁니다. 여긴 왕궁이니까요.”

발레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책으로도 수많은 사건을 접해 봤기에 왕궁이 어떤 곳인지는 대략 짐작이 갔다. 발레린이 가만히 듣고 있자 제르딘은 차분히 말을 이었다.

“그리고 주의해야 할 사람이 있습니다.”

“주의해야 할 사람이요?”

“배도스 공작과 원로원의 귀족입니다. 특히 배도스 공작은 저를 죽이려고 혈안이 된 미친놈이죠.”

“배도스 공작이라면 왕자님과 친척 관계 아니신가요?”

“맞습니다. 저의 외삼촌이지만 지금 황금 마검을 숨기고 어디에 있는지 가르쳐 주지도 않죠.”

“황금 마검은 왕이 되기 위해 꼭 필요한 거잖아요.”

제르딘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저를 죽일 때까지 숨기고 있는 겁니다.”

발레린은 놀란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런데 배도스 공작은 왜 그렇게까지 하나요?”

“예전에 반만 섞인 왕족 피 때문에 왕좌에서 밀린 것이 두고두고 후회가 되는 모양입니다. 거의 30년 전의 일이죠.”

발레린은 그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주의할 사람이 또 있습니다. 원로원 귀족인데 그 사람들은 저보다 더 예의를 따지는 노인들입니다. 그 노인들이야말로 배도스 공작 못지않게 귀찮은 존재들이죠. 그러니 괜히 그들 눈에 띄지 않는 게 좋습니다.”

“아까 배도스 공작 옆에 있던 노인을 말씀하시는 거죠?”

“맞습니다. 모두 나이가 많은데 아직도 정정하죠. 징글징글하게.”

제르딘은 질린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발레린은 성실히 그의 말을 기억하며 눈빛을 생생히 빛냈다. 꽤 긴 이야기를 했는데도 발레린의 눈빛은 시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제르딘은 어안이 벙벙했다. 그가 이야기를 하면 지루한 얼굴은 기본이었다.

“확실히 공녀는 특이하군요.”

“제가요?”

“제 이야기에 그렇게 눈을 빛내니까요.”

“그저 왕자님 얼굴만 봐도 재미있는걸요.”

제르딘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그가 뚫어지게 쳐다보자 발레린은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제가 무례했다면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오히려 재미있네요.”

발레린이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제르딘은 발레린을 보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부디 왕궁에서 그 눈빛을 잃지 않기를 바랍니다.”

“왕자님의 명령이니 꼭 따르겠습니다!”

의지로 빛나는 목소리였다. 제르딘은 그 모습을 보며 차분히 입을 열었다.

“왕궁은 쉽게 보이면 죽습니다. 그러니 각별히 조심하세요.”

“네, 주의할게요.”

발레린은 밝게 대답했다. 제르딘은 그 모습에 묘하게 안정되면서도 이상하게 계속 시선이 갔다. 그는 발레린을 잠시 지켜봤다.

발레린은 여전히 밝은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에는 검은 방독면이 있었다.

제르딘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그리고 이곳은 제 궁전이니 방독면을 쓴다면 마음껏 돌아다녀도 됩니다.”

“네, 고맙습니다.”

발레린이 예의 바르게 인사하자 마침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왕자님, 해인저 모녀의 재판 일정이 잡혔습니다. 그리고 지금 결재할 서류가…….”

이내 제르딘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보좌관에게 지시했다.

“우선 발레린에게 지낼 방을 보여 줘. 아까 말한 전용 하녀도 배정하고.”

보좌관이 고개를 끄덕이며 발레린에게 다가섰다.

“공녀님, 가시죠.”

발레린은 제르딘에게 인사한 뒤 서재를 나갔다. 복도에 나서자마자 보좌관이 물었다.

“그나저나 계속 방독면을 쓰고 다니시면 불편하지 않습니까?”

“무척 답답해요. 그동안 탑 안에 있으면서 방독면을 오래 쓰는 일도 없었거든요.”

방독면 안에서 말소리가 웅웅 울렸지만 발레린의 발음은 누구보다 정확했다.

“혹시 발음 교정술이라도 받으셨습니까? 발음이 무척 정확하시네요.”

“어떻게 아셨어요? 전 책으로 발음 교정술을 익혔거든요.”

예전에는 하인조차 발레린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었다. 그래도 지금은 그보다 반응이 나아 발레린은 기쁨을 느끼며 활짝 웃었다.

보좌관은 그 모습에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행복한 기운이 전염된 것처럼 그는 활짝 웃고 있었다. 그러다 보좌관은 문득 거울을 보고는 이내 표정을 굳혔다.

왕궁에서 일하는 보좌관은 절대 표정을 그대로 드러내서는 안 된다.

보좌관은 굳은 얼굴로 걸어갔다. 그사이 발레린은 왕궁 이곳저곳을 눈으로 담았다.

문지기의 갑옷과 벽에 걸린 화려한 그림, 그리고 부드러운 카펫, 화려한 벽장식. 어느 곳을 봐도 신기한 것투성이였다.

그로프도 신기한지 고개를 내밀어 주변을 구경했다. 주변을 보던 하인들이 힐끗거리며 수군거렸다.

“왕자님은 굳이 왜 저 사람을 데려오신 걸까?”

“그러게. 안 그래도 저주를 받아서 불길한데.”

“그러니까, 방독면까지 쓰고 다니는데 우리가 독에 다 중독되면 어떡해?”

발레린이 돌아보자 그 사람들은 황급히 다른 곳으로 달려갔다. 이미 왕궁에는 발레린이 왔다는 소문이 온 사방에 퍼진 모양이었다.

‘하긴 우리 아버지까지 쓰러졌으니.’

발레린은 아버지가 쓰러졌는데도 그다지 걱정은 되지 않았다. 어차피 그는 갓난아기였던 발레린 독에 살아남은 자가 아니던가?

‘아버지는 뒤로 넘어가도 죽지 않는 사람이니까.’

갓 태어난 발레린이 웃으며 입을 벌렸을 때, 분명 독이 사르티아 공작의 주변에 퍼졌는데도 뒤로 쓰러지기만 했고 며칠 뒤 일어나서 평범하게 걸어 다녔다. 다만 독에 대한 무서움이 이전보다 커졌을 뿐이었다.

그때 보좌관이 멈춰 섰다. 나뭇잎 모양의 양각이 두드러진 화려한 나무 문이었다. 발레린이 감탄하며 양각의 섬세함을 보고 있을 때 보좌관이 잠시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여기가 발레린 공녀님이 임시로 계실 방입니다.”

“들어가도 되나요?”

보좌관이 고개를 끄덕이자 발레린은 천천히 문을 열었다. 곧 드넓은 방이 드러났다. 커다란 침대는 물론이고 화려한 가구가 눈에 띄는 방이었다.

발레린은 감탄하며 주변을 둘러봤다.

“이렇게 커다란 방은 처음이에요.”

심지어 발레린이 일곱 살 이전에 살았던 저택의 방보다 훨씬 넓은 곳이었다.

“정식으로 왕자님과 결혼하신 후에는 다른 방으로 가실 겁니다. 그동안 이곳에 머무르실 거고요.”

발레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주변을 둘러봤다. 보좌관은 발레린을 착실히 따라오며 물었다.

“혹시 부족한 것은 없으십니까? 이미 공녀님께서 가져오신 짐은 모두 옮겨 놓았습니다.”

보좌관은 옷장 문을 열어 주었다. 발레린의 보라색 드레스 세 벌이 나란히 걸려 있었다. 발레린은 협탁 위에 노란 튤립이 있는 꽃병을 놓고는 드레스를 모두 꺼냈다. 그리고 그림을 걸기 위해 만들어 놓은 자리에 보라색 드레스를 걸었다.

보좌관이 의아하게 보자 발레린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렇게 걸어 놓는 게 더 좋거든요.”

보좌관은 고개를 끄덕이곤 이내 물러났다.

“혹시 더 필요한 것이 있으시다면 언제든지 협탁 위에 있는 종을 울려 주십시오. 그리고 조만간 전용 하녀가 공녀님을 찾아뵐 겁니다.”

“고맙습니다.”

발레린이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보좌관은 그녀에게 인사를 하곤 방을 나갔다. 문이 닫히자마자 발레린은 방독면을 벗고 소리를 지르며 침대에 누웠다. 침대 스프링이 튀면서 발레린의 몸이 살짝 위로 올라갔다가 내려앉았다. 그녀의 까만 곱슬머리가 탄력 있게 주변으로 퍼졌다.

“그로프, 이런 방 상상한 적 있니?”

“아니요.”

“나도. 이런 곳에 산다는 건 한 번도 생각 못 해 봤어. 거기다 여긴 궁전이잖아!”

발레린은 엎드린 채 두 손으로 이불을 만지며 웃었다. 그녀의 두 발은 기분 좋게 양옆으로 흔들렸다.

“심지어 내가 어릴 때도 방이 이렇게 넓진 않았거든.”

일곱 살 때의 발레린을 기억하는 그로프는 고개를 끄덕였다.

발레린은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침대에서 일어나 창문가에 섰다. 창문에서는 정원이 한눈에 보였다. 노란 장미꽃이 유난히 돋보이는 정원이었다.

그로프도 정원이 마음에 드는지 멍하니 고개를 내밀어 봤다.

“그로프, 탑 안에 있을 때보다 정원이 더 넓게 보이지 않니? 거기다 노란 장미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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