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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빛 저주의 공녀님-10화 (10/130)

10화

큼큼거리며 기침하는 소리가 울렸다. 특히 배도스 공작 옆에 있던 귀족은 티 나게 사르티아 공작을 노려보았다.

제르딘은 입꼬리를 올린 채 사르티아 공작을 응시했다. 그의 태도는 여유롭기만 했다.

“청혼서는 곧 보내겠네.”

그때 배도스 공작이 끼어들었다.

“이렇게 품위 없이 결혼을 성사시키는 사례는 처음 봤습니다. 제대로 된 자리도 아니고 이런 복도에서 말이 오가다니.”

제르딘은 천천히 배도스 공작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선은 아무 감정 없어 보였지만 눈빛만은 짙었다.

“배도스 공작, 자네야말로 내 결혼에 가장 심혈을 기울이지 않았나? 내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면 결혼부터 해야 한다며 한사코 내 말을 막았었지.”

“그래서 왕자님의 결혼은 조금 더 검증된 가문과…….”

“그래서 사르티아 가문과 결혼하려 하는데 불만인가?”

모두들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사르티아 가문이 제법 힘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배도스 공작 주변에 있던 귀족들은 말은 하지 않으면서도 큼큼거리며 기침을 하거나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제르딘은 그 모습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러니 사르티아 가문과 맺어지는 결혼은 더할 나위 없이 기쁜 일 아니겠나?”

“하지만 저희와 한 번의 상의도 없이 왕자님께서 독단적으로 내리신 결정은…….”

“어차피 이건 내 권한이야.”

제르딘은 차분히 말했으나 배도스 공작의 눈빛은 여지없이 살벌했다. 제르딘은 배도스 공작의 시선을 피하지 않으며 말했다.

“배도스 공작이 나와 친척 관계라고 해도 왕위 계승 1위인 내가 결정하는 게 가장 이치에 맞는 것 아닌가? 거기다 배도스 공작은 예전에 왕위 계승에서도 밀렸으니까.”

배도스 공작의 얼굴이 시뻘겋게 변했다. 제르딘은 미묘한 미소를 지은 채 말했다.

“그러니 내가 결정하는 게 맞는 일이지. 자네는 왕위 계승 서열도 한참 아래니까.”

두 번이나 강조하는 말에 배도스 공작의 눈썹이 일그러졌다. 제르딘은 옆에 있는 발레린을 보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알다시피 왕궁은 독살로 시끄럽고 이미 내 측근이 세 명이나 죽은 마당에, 유일하게 독이 통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더군.”

모두들 제르딘의 말을 주목했다. 제르딘은 무감한 눈빛으로 배도스 공작을 바라봤다. 배도스 공작의 입술이 살짝 떨렸다. 제르딘은 그를 보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발레린을 내 독 감별사로 임명했네.”

“그게 대체……!”

“왕자님, 그것은…….”

모두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다. 배도스 공작만이 눈썹에 잔뜩 힘을 주며 제르딘을 쳐다보고 있었다. 제르딘은 그의 시선을 무시한 채 차분히 말을 이었다.

“어차피 전용 독 감별사는 모두 제 명을 다하지 못할 것 같으니 차라리 발레린 공녀가 나을 거라는 판단이야. 발레린 공녀는 누구보다 독에 아주 강하니까.”

발레린은 자신에 대해 말하는 제르딘을 보며 눈을 빛냈다. 그렇게 발레린이 감격한 눈빛으로 보는 사이 원로원 귀족 중 하나가 거들먹거리며 나섰다.

“흠, 하지만 왕궁은 왕자님만 계신 곳이 아닙니다. 독에 걸린 공녀를 이 왕궁에 두신다는 것은 왕궁 전체를 위협하는 겁니다.”

그때 배도스 공작이 능숙하게 끼어들었다.

“맞습니다. 사르티아 공작이 발레린 공녀를 탑 안에 가둔 것도 끔찍한 이유 때문 아니겠습니까? 제 어머니를 독으로 죽였다고 하던데요.”

배도스 공작은 사르티아 공작을 한번 눈짓했다. 사르티아 공작은 애써 시선을 피했다. 제르딘은 헛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참고 배도스 공작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아, 그건 해인저 모녀가 스스로 밝혔어. 사르티아 부인을 독으로 죽인 뒤 발레린 공녀도 똑같이 해치려고 했다는 걸, 발레린 공녀는 물론 내 보좌관이 들었고.”

주변에 있던 귀족들이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들은 서로 쳐다보며 웅성거렸다. 그중에서 사르티아 공작은 유령이라도 본 것처럼 멍한 얼굴로 제르딘을 쳐다봤다.

“이, 이게 무슨…….”

사르티아 공작이 말을 다 끝맺기도 전에 뒤로 넘어갔다. 한순간 주변은 놀란 목소리와 의사를 부르는 소리가 넘쳐났다.

제르딘은 그 사이를 유유히 빠져나갔다. 배도스 공작이 그의 뒷모습을 날카롭게 쳐다봤다. 그 모습을 발레린이 흥미롭게 관찰했다.

그러곤 발레린은 제르딘 옆으로 쪼르르 달려가 말했다.

“배도스 공작님이 왕자님을 쳐다보는 게 엄청 날카로워요.”

“원래 그런 인간입니다. 황금 마검을 훔쳐서는, 제가 왕이 되기를 거부하는 인간인 동시에 독기를 품은 악한 인간이죠.”

그 말에 발레린이 멈춰 섰다. 제르딘은 의아하게 보다가 이내 눈썹을 살짝 찌푸리곤 말했다.

“마지막에 한 말은 정정하겠습니다. 배도스는 독기를 품었다기보다는 재활용조차 안 되는 쓰레기라고.”

그 말에 발레린은 놀라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왕자님은 꽤 말씀이 험하신 편이네요.”

“왕궁에 살다 보면 더한 일이 많으니까요. 그나저나 제가 아까 공녀의 과거를 무례하게 밝혔다면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오히려 제가 하고 싶은 말이었는걸요! 사실 전 일곱 살 때부터 어머니가 해인저 모녀에게 돌아가신 걸 알고 있었어요. 그런데 모두들 제 이야기는 안 듣고 해인저 모녀 말만 들었죠.”

“이제야 밝혀졌군요.”

“네, 15년 만이에요.”

“괜찮습니까?”

“이제야 밝혀졌으니 괜찮아요! 그리고 무엇보다 왕자님께서 저를 구해 주셨잖아요!”

“그건…….”

“전 왕자님께 무척 고마워요. 처음 보는 저한테도 친절하시고요.”

친절이라는 말에 제르딘은 절로 눈썹을 찡그렸다.

“제가 친절하다는 말입니까?”

“네! 제가 탑 안에 살 때 음식을 갖다 주던 하인보다 더 친절하신걸요?”

제르딘은 고개를 내저었다.

“도대체 그동안 탑에서 어떻게 견뎌 냈습니까?”

“그로프와 책 덕분이에요. 그나마 책을 보면 그곳에서 시간이 금방 가거든요. 말동무가 필요할 땐 그로프와 함께 말하면서 지냈고요.”

제르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그는 마침 도착한 집무실 앞에 멈춰 섰다. 무척이나 위엄이 돋보이는 문이었다. 황금으로 주변을 장식한 문이었는데 중앙에는 왕궁의 인장인 황금빛 방패와 검이 찍혀 있었다.

제르딘은 그 앞에서 발레린에게 말했다.

“들어오세요. 마침 청혼서도 있고, 제 전용 독 감별사가 된다고 하셨으니 정식으로 서명하셔야 합니다.”

곧이어 문이 열렸다. 발레린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왕자의 서재로 들어갔다. 서재 안은 깔끔했다. 그의 성격을 보이는 듯 빈틈 하나 없이 잘 치워져 있었다.

보좌관은 왕자가 의자에 앉자 들고 있던 서류 중 하나를 꺼냈다. 왕자는 일어서서 구경하는 발레린에게 말했다.

“앉으세요. 이제 왕궁에 왔으니 본격적으로 할 말이 있습니다.”

발레린은 예법에 맞게 의자에 앉았다. 그때 보좌관이 발레린에게 서류를 주며 설명했다.

“이건 청혼서입니다. 여기에 서명하시면 본격적으로 왕자님과의 결혼에 동의하게 됩니다.”

서류에는 제르딘이 말한 내용이 모두 적혀 있었다. 배도스 공작이 몰락하면 이혼한다는 것이 걸리긴 했지만 발레린은 거침없이 서명했다. 어차피 왕궁까지 온 마당에 피할 곳은 없었다.

곧 보좌관이 다른 서류를 들이밀었다.

“이 서류는 독 감별사를 임명하는 서류로 여기에 서명하시면 왕자님의 독 감별사로 정식으로 임명이 됩니다.”

발레린은 서류를 꼼꼼히 읽어 봤다. 그중에선 특히 주의 사항이 눈에 띄었다.

주의 사항

1. 왕궁에서 있었던 일은 바깥으로 새어 나가지 않게 한다.

2. 언제나 왕자의 곁을 보필하며 성실히 일에 임한다.

특히 2번 사항이 마음에 들었다. 발레린은 활짝 웃으며 서명했다.

보좌관이 확인을 한 후 최종적으로 제르딘에게 서류를 내밀었다. 제르딘은 고개를 끄덕이곤 보좌관에게 다시 서류를 주었다.

“서류 관리소에 잘 보관해 놓도록.”

보좌관은 고개를 끄덕이곤 물러났다. 이제 집무실에는 발레린과 제르딘뿐이었다.

“결혼식은 조만간 열릴 겁니다. 그동안…….”

“제가 꼭 왕자님을 지켜 드리겠습니다!”

꽤나 큰 목소리였다. 발레린은 활짝 웃으며 제르딘을 쳐다봤다. 제르딘은 말을 하려다 가만히 발레린을 응시했다. 허약하게 보이는 하얀 얼굴빛과 다르게 발레린의 눈빛은 어느 누구보다 반짝반짝 빛이 났다.

제르딘이 그저 보고만 있자 발레린은 궁금한 것을 물었다.

“만약 이곳에서 독이 나오면 제가 먹어도 되나요?”

“괜찮겠습니까?”

“오히려 먹으면 맛있는걸요.”

이미 제르딘은 발레린이 독에 어떤 맛을 느끼는지 알았기에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제가 먹는 음식에 독이 나왔다면 그대로 드셔도 됩니다. 그리고 혹시라도 왕궁에서 독을 발견한다면 저에게 보고해 주세요.”

“네.”

마침 그때 하인이 차를 내왔다. 은은한 허브 향이 나는 차였는데 찻물이 보랏빛이었다. 발레린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센트릴 잎 차네요.”

그 말에 제르딘은 발레린을 똑바로 쳐다봤다.

“이 차를 단번에 아시다니. 놀랍군요.”

“책에서 묘사하던 향 그대로라서 오히려 제가 더 놀라워요. 센트릴 잎은 보라색이라서 눈에 띄기도 하고요. 또 해독 작용이 있어서 독을 먹었을 때 섭취하면 곧바로 회복되는 귀한 찻잎 아닌가요?”

“맞습니다. 필요하시면 가져가셔도 됩니다.”

제르딘이 마침 탁자 위에 있는 상자를 열었다. 그곳에는 종이에 싸인 센트릴 잎이 가득 있었다. 발레린의 눈이 절로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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