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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빛 저주의 공녀님-9화 (9/130)

9화

제르딘이 물끄러미 쳐다보자 발레린은 노란 튤립을 보며 설명했다.

“제가 어릴 때 엄청 우니까 어머니가 꽃병에 있는 노란 튤립을 주셨어요. 이상하게 이 튤립은 제가 입을 벌리고 있어도 시들지 않았대요. 물론 지금까지 시들지 않고요.”

제르딘은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발레린은 꽃병을 옆에 얌전히 두고 말했다.

“그리고 제가 주로 입는 보라색 드레스도 들고 왔는데 그건 보좌관님이 마차에 따로 실으셨어요.”

“왜 하필 보라색 드레스입니까?”

발레린은 지금도 보라색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제 초록빛 입술이랑 잘 어울리잖아요.”

“그럼 단순히 잘 어울리기 때문에 좋아하는 겁니까?”

“그것도 있지만 보라색을 보면 기분이 좋아서요. 그래서 항상 제 드레스는 옷장이 아니라 벽에 걸어 둬요. 기분이 가라앉을 때마다 드레스를 보고 기분을 풀려고요.”

조금은 특이한 생각에 제르딘은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제 가족이자 유일한 친구인 그로프예요.”

발레린은 활짝 웃으며 그로프를 들었다. 그로프는 눈을 끔뻑거리며 제르딘과 눈을 맞췄다.

“그로프는 보시다시피 다른 개구리와 다르게 몸이 빨간색인데 독 개구리예요. 아마 왕자님께서 손을 대신다면 곧바로 손에 발진이 올라와서 한동안 고생하실 거예요.”

제르딘은 안 그래도 그로프를 만질 생각이 없었기에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발레린은 그로프에게 작게 속삭였다.

“그로프, 왕자님께 정식으로 인사드려. 이분은 이 위대한 매시드 왕국의 가장 완벽하고 잘생긴 왕자님인…….”

발레린이 제르딘을 쳐다봤다. 제르딘은 빠르게 눈치를 채고 이름을 말했다.

“제르딘입니다.”

그 말에 발레린의 얼굴이 이전보다 활짝 폈다. 제르딘은 과연 발레린의 얼굴이 언제 우울해지는가 진지하게 궁금했다. 하지만 그는 굳이 묻지 않고 그녀를 쳐다봤다.

“왕자님께서는 이름도 멋지시네요. 저는 그렇게 멋있는 이름은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어요! 제가 본 이름이라곤 에드워드 같은 동화 속 왕자님 이름밖에 없거든요.”

“100년 전 유행했던 이름이군요.”

“네! 왕자님은 얼굴만큼 이름도 멋지세요.”

제르딘의 얼굴이 잠시 굳었다. 저렇게 솔직하게 바로 말하는 사람은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발레린의 눈은 별이라도 튀어나올 것처럼 반짝반짝 빛났다.

분명 저택에서 주의를 주었는데도 발레린은 지금 자신의 눈빛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는 듯했다.

제르딘은 자신과 너무나 다른 사람에 그저 어이가 없어서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러자 발레린은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살짝 내렸다.

제르딘은 무감하게 시선을 피했다.

아무래도 발레린은 너무나 순수하고 때가 묻지 않은 사람인 것 같았다. 순간 제르딘은 자신의 행동이 과연 옳은지 고민했다. 저렇게 순수한 사람을 왕자비의 자리에 앉게 해도 될지. 그것도 배도스 공작이 망할 때까지 말이다.

그가 사는 왕궁은 더럽고 치사하며 잔인한 곳이었다. 보좌관은 발레린이 15년간 탑 안에 갇혀 있었다고 했다. 그렇다면 이렇게 사람 사는 생리를 모르는 게 당연할 것이다.

제르딘은 왕궁에 도착하기 전 아무래도 주의를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여전히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발레린을 보며 차분히 말했다.

“어쨌든 왕궁으로 가면 조심하셔야 할 겁니다. 탑 안에서만 지냈다고 들었는데 왕궁은 생각보다 거친 곳입니다. 소문도 많고 사람도 함부로 죽는 곳이기도 하고요.”

“네, 알아요. 왕궁은 200년 전부터 여러 살인 도구를 개발했고 살인 사건들도 끊이지 않았잖아요. 심지어 100년 전 알프드렉스의 톱 사건은 다른 왕국의 신문에 나올 정도로 유명하지 않았나요?”

뜻밖의 과거사를 들추는 말에 제르딘은 눈썹을 찌푸렸다.

“15년간 탑 안에 있었다고 들었는데요.”

“갇혀 있는 동안 책을 많이 읽었어요. 제가 안 읽은 책이 없을 정도예요. 그중에서 『천년 왕국사』는 제가 제일 좋아하는 역사책이었어요.”

“그 책은 제가 지금 읽기에도 방대하고 복잡한데 그걸 읽으셨다고요?”

“16번이나 완독했는걸요!”

순간 제르딘은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는 순간적으로 깨달았다.

‘보통 인간이 아니군.’

어쩌면 늙은 뱀 같은 배도스 공작과 유일하게 대적할 만한 적수가 등장한 것인지도 몰랐다.

02. 엇갈린 방향

마차는 서서히 왕궁에 도착했다. 제르딘은 먼저 내려서 발레린의 손을 잡아 주었다.

발레린은 볼이 빨개진 채 고개를 숙여 예의를 표했다. 그러곤 천천히 주변을 둘러봤다. 눈앞에는 높고 큰 건물이 있어 발레린의 눈은 자연스레 동그랗게 변했다.

“궁전이 이렇게 큰 줄 몰랐어요. 늘 그림으로 보다가 실물로는 처음 보는 거거든요.”

발레린은 멍하니 건물을 보며 말했다.

“이렇게 실제로 보니까 확실히 분위기가 다르네요. 무엇보다 아라베스크 양식이 웅장하고 아름다워요.”

제르딘은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매일 보는 궁전이 그렇게까지 신기하지도 감명 깊지도 않았다. 그저 저 안에 있는 늙은 뱀 같은 배도스 공작이나 원로원 노인들이 생각나 지겹기까지 했다.

때마침 철창이 보이는 마차도 덜거덕덜거덕 소리를 내며 도착했다. 철창 안에서 날카로운 소음이 들렸지만 여러 소리와 겹쳐서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보좌관이 제르딘에게 달려와 고개를 숙였다.

“해인저 모녀가 발레린 공녀의 어머니를 독살하고 발레린 공녀까지 독으로 해치려 했던 정황을 포착했습니다. 공녀님이 직접 말씀하시면서 증거도 제출했고, 제가 직접 들었으니 증거는 충분합니다.”

“한 번에 두 사람의 범죄자를 잡았군. 이번에 본보기로 보여 주면 되겠어. 독으로 사람을 죽이면 어떻게 되는지.”

보좌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마차 안은 난리통이었다.

“꺼내 줘! 난 죄를 짓지 않았어!”

“어머니 말대로 한 것밖에 없는데 갑자기 갇히다니! 억울해!”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에 제르딘은 손을 내저었다. 곧바로 보좌관이 마부에게 왕궁 뒤쪽을 가리키며 지시했다. 마차는 곧 덜거덕거리며 왕궁 뒤쪽으로 사라졌다. 악에 받친 소리가 뒤를 이었다.

발레린은 지나가는 마차를 물끄러미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이제 벌을 받겠네.”

비로소 발레린은 지겨운 누명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렇게 한 번에 일이 해결된 것은 무엇보다 왕자님, 제르딘 덕분이었다. 그가 저택으로 오지 않았다면 발레린은 그저 탑 안에 갇혀 지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발레린은 더욱 눈을 빛내며 제르딘을 쳐다봤다.

“모두 왕자님 덕분입니다.”

발레린은 활짝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제르딘은 무감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공녀가 제 계약을 들어줬으니 저도 당연히 공녀의 말을 들어줘야죠.”

그때 보좌관이 제르딘에게 다가와 말했다.

“그나저나 배도스 공작이 가만히 있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발레린 공녀님은…….”

“그건 들어가서 얘기해.”

제르딘이 먼저 몸을 돌려 왕궁으로 들어갔다. 기다리고 있던 하인들은 잽싸게 제르딘을 따라갔다. 보좌관도 제르딘의 뒤를 따랐다. 발레린은 총총거리는 걸음으로 주변을 한껏 둘러보다가 그들을 따라갔다.

왕궁에 들어간 발레린은 의도치 않은 시선을 느꼈다. 모두들 발레린이 쓴 방독면을 쳐다보고 있었다.

발레린은 홀로 탑 안에만 갇혀 있다가 이렇게 사람의 주목을 받으니 오히려 벅차오르기까지 했다. 그녀는 기쁜 마음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마침내 그들은 넓은 복도에 들어섰고, 마침 귀족 회의를 마치고 나오는 귀족들과 마주쳤다. 그중에서 배도스 공작이 먼저 나서서 제르딘 앞에 섰다.

“왕자님, 귀족 회의에 빠지시더니 이젠 아예 저주받은 공녀를 데리고 오신 겁니까?”

그 말에 주변에 있던 귀족들이 껄껄 웃었다. 유일하게 웃지 않는 사람은 발레린의 아버지 사르티아 공작이었다. 사르티아 공작이 재빨리 발레린 앞에 서서 중얼거렸다.

“발레린,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이렇게 막무가내로 오느냐.”

“왕자님께서 본인과 결혼하고 독 감별사로 있으라고 하셨어요.”

“뭐?”

갑자기 크게 울린 소리에 배도스 공작은 물론 주변에 있던 귀족이 힐끗거리며 웅성거렸다.

“결혼이라니요?”

배도스 공작이 날카로운 시선으로 발레린을 훑었다. 그 시선에 제르딘이 더 불쾌해하며 발레린 앞을 막아섰다.

사르티아 공작은 물론 배도스 공작까지 의아한 듯 제르딘을 쳐다봤다. 제르딘은 개의치 않고 말했다.

“내 결혼은 배도스 공작이 가장 원하던 일 아니었나? 마침 시기가 적절했지. 사르티아 공작도 곧 동의할 거고.”

제르딘은 사르티아 공작을 쳐다봤다. 공작은 눈을 동그랗게 뜨긴 했지만 별말은 하지 않았다. 배도스 공작이 날카롭게 사르티아 공작을 쳐다보며 말했다.

“이미 왕자님과 말을 나누신 겁니까?”

“그게…….”

그때 제르딘이 끼어들었다.

“사르티아 공작은 서쪽 변방 지역의 광맥 건설권을 원하지 않았나? 안 그래도 요즘 변방 지역의 개발이 미뤄지는 탓에 원성이 자자한데 이번만큼은 내가 확실히 밀어 줄 수 있네.”

사르티아 공작의 눈이 대번에 반짝였다. 그는 배도스 공작의 눈길을 피하며 제르딘에게 고개를 숙였다.

“서쪽 변방의 광맥 건설권만 확실하게 주시면 제가 무엇을 반대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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