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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빛 저주의 공녀님-8화 (8/130)

8화

“어쨌든 저에게 15년간 주신 독 잘 먹었어요. 생각보다 다양한 독을 주셔서 독에 대해 잘 알 수 있었어요. 특히 오늘 아침에 주신 독은 제가 먹어 본 것 중에 가장 맛있었어요. 심지어 그로프까지 칭찬했다니까요!”

발레린은 두꺼운 책을 들었다. 그동안 해인저 모녀가 준 독을 기록한 책이었다.

타니안과 르네윈은 할 말을 잃은 듯 발레린을 쳐다봤다. 옆에는 보좌관이 근엄한 얼굴로 서 있었다.

거기다 기사까지 대동해 있었는데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금방이라도 그들을 잡을 것처럼 매서웠다.

타니안은 침을 꼴깍 삼키며 보좌관에게 애써 웃었다.

“발레린이 하는 말은 모두 거짓말이에요. 거기다 15년간 독이라니요? 말도 안 되죠.”

타니안이 식은땀까지 흘리며 말했지만 보좌관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으며 말했다.

“아까 하신 말씀은 모조리 들었습니다. 요즘 독으로 살인을 저지르는 일은 왕궁에서 그 어느 때보다 더 거세게 잡는 것 아십니까? 아마 10년 전이었다면 그저 그런 벌을 받았겠지만 이젠 독으로 짓는 모든 죄는 이전보다 더 무겁게 처벌받을 겁니다.”

“하, 하지만 전…….”

그때 보좌관이 옆에 있던 기사에게 눈짓했다.

“안 그래도 독을 유난히 많이 사셨던데 눈여겨볼 만했군요. 어서 끌고 가라.”

기사는 곧바로 르네윈과 타니안의 팔을 잡았다. 하지만 타니안은 소리를 내지르고 팔을 잡아 빼며 저항했다.

“난 왜! 난 아무 짓도 하지 않았어!”

“아까 분명 들었습니다.”

보좌관은 르네윈을 눈짓하며 말을 이었다.

“따님께서 ‘어머니가 겨우 발레린의 엄마를 독으로 죽였다’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타니안은 놀란 눈으로 르네윈을 쳐다봤다.

“르네윈……!”

“어머니가 한 건 맞잖아요. 전 그때 어렸다고요. 지금 제가 이렇게 된 것도 모두 어머니 탓이고요!”

르네윈은 악을 쓰며 외쳤다. 타니안은 할 말을 잃은 듯 기사에게 끌려갔다. 여전히 르네윈은 인정할 수 없다는 듯 소리를 질러 댔다.

발레린은 신기한 듯 그들을 지켜봤다. 탑에서 진실을 밝히겠다고 한 다짐이 드디어 이루어진 것이다. 기쁜 마음에 발레린은 그로프에게 속삭였다.

“그로프, 드디어 내 진심이 통했어.”

“모두 주인님께서 힘쓰신 덕분입니다. 어쨌든 책에서 나온 구절처럼 기다린 자에게 행운이 온다는 말이 맞는군요.”

“그래, 언젠가는 밝혀진다니까. 15년이 걸리긴 했지만.”

발레린은 웃는 얼굴로 끌려가는 모녀를 바라봤다. 아버지가 해인저 부인과 결혼할 때는 울면서 봤지만 이제는 얼굴이 확 피었다. 발레린은 어머니의 말을 다시 기억했다.

‘울어 봤자 네 편은 아무도 없을 거야. 하지만 네가 웃는다면 온 세상이 너를 밝게 볼 거란다.’

역시 어머니 말이 맞았다. 발레린은 멀거니 지켜봤다. 모녀는 발악을 하며 마차에 겨우 타고 있었다.

그때 보좌관이 발레린에게 다가왔다. 발레린은 보좌관에게 쥐고 있던 두꺼운 책을 주었다.

“이게 뭡니까?”

“해인저 모녀가 저에게 먹인 독을 써 놓은 책이에요.”

보좌관의 눈썹이 살짝 일그러졌다. 그는 책을 펴서 이리저리 훑어보았다. 종이에는 빽빽한 글씨가 적혀 있었다.

“생각보다 많네요.”

“덕분에 맛있는 독을 먹을 수 있어서 좋긴 했어요.”

발레린은 싱긋 웃었다. 보좌관은 당황하며 고개를 끄덕인 뒤 그녀를 안내했다.

“가시죠.”

“감사합니다. 그나저나 보좌관님 아니었다면 이렇게 처리하지도 못했을 거예요.”

“아닙니다. 왕자님의 명령이기도 하고, 공녀님께서 왕자님의 제안을 받아들여 독 감별사가 되기로 하셨는데 저희도 공녀님의 말씀을 들어 드려야죠.”

발레린은 미소를 짓고는 왕자가 타고 있는 마차로 향했다. 그녀의 손에는 노란 튤립이 있는 꽃병과 보라색 드레스 세 벌이 있었다. 보좌관을 그녀가 들고 있는 것을 보며 황급히 말했다.

“짐은 저에게 주세요. 제가 들어 드리겠습니다.”

“아니에요. 어차피 얼마 되지도 않는걸요.”

“그런데 짐은 정말 이게 다입니까?”

“네, 어차피 제가 읽었던 책은 이미 머릿속에 다 있어요. 저한테는 이게 다예요.”

발레린은 두 손을 들어 보였다. 꽃병에 있던 노란 튤립이 잠시 흔들렸다. 보좌관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그때 마침 왕자가 타고 있던 마차 앞에 도착했다.

“그런데 이렇게 짐을 가지고 타도 괜찮을까요? 왕자님께서 혹시 무례하다고 말씀하시는 건 아닐지 걱정되네요.”

“아닙니다. 왕자님께선 그 정도 짐 가지고 무례하다고 하시지 않습니다.”

“그럼 들어가도 될까요?”

보좌관이 발레린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꽃병과 드레스는 주세요. 제가 마차에 싣겠습니다.”

“그럼 이 드레스만 실어 주실래요? 꽃병은 제가 들고 갈게요.”

노란 튤립 한 송이밖에 없는 꽃병이었다. 보좌관은 의아하긴 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이곤 마차 문을 열어 주었다.

발레린은 고개를 숙였다가 우아하게 무릎을 굽혀 예의를 표했다. 다소 과한 인사였다. 50년 전 책에나 나올 법한 이런 인사치레를 좋아할 사람은 지금 자신이 모시고 있는 왕자와 원로원의 늙은 노인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보좌관은 그렇게 말하는 대신 그저 미소를 지었다. 발레린은 곧바로 마차에 탔다.

왕자는 창가에 기댄 채 발레린을 보고 있었다. 발레린은 삐딱한 왕자의 시선에 고개를 숙였다.

“왕자님, 죄송합니다. 제가 늦었습니다.”

“늦은 건 둘째 치고, 이 마차는 생각보다 그다지 방음이 좋지 않습니다.”

“네?”

“제가 다 들었다는 말입니다.”

그 말에 발레린이 다소 당황하며 눈을 깜빡거렸다.

그때 그로프가 주머니에서 튀어나와 왕자를 유심히 보고는 발레린에게 말했다.

“저 얼굴이 인간적으로 잘생긴 얼굴입니까?”

발레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제르딘의 얼굴이 점점 일그러졌다. 발레린은 깜짝 놀라서 제르딘을 살폈다.

“왕자님, 괜찮으세요? 혹시 제 독 때문에 그러시는 건 아닌지…….”

발레린이 걱정스레 보자 제르딘은 손을 들었다. 발레린이 멈칫하며 제르딘을 쳐다봤다. 제르딘은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참고로 저는 저 개구리가 하는 말도 알아듣습니다.”

“그로프가 하는 말을 알아들으신다고요?”

발레린은 여태껏 그로프가 하는 말을 알아듣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더구나 발레린의 강한 독기로 살아가는 개구리였기에 이 말을 알아듣는다는 것은 자신의 동족이 아닌 이상……. 그 생각까지 하자 발레린은 더더욱 놀라서 제르딘에게 물었다.

“그럼 왕자님도 독에 중독된 사람인가요?”

그 말에 제르딘은 인상을 팍 쓰며 말했다.

“아닙니다.”

잔뜩 억눌린 목소리였다.

“그럼 어떻게 그로프의 말을 알아듣는 건가요?”

“그건…… 왕족의 피가 흐르기 때문입니다.”

그 말만 하고선 제르딘은 고개를 돌렸다. 발레린은 제르딘의 얼굴을 보고자 했으나 제르딘은 결코 발레린에게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발레린은 다소 시무룩한 얼굴로 그로프를 쳐다봤다. 그로프는 발레린을 보며 울었다.

“개꿀개꿀.”

그 소리에 제르딘이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발레린이 웃으며 제르딘을 쳐다봤다. 환한 얼굴에 제르딘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그로프에게 눈짓했다.

“이 개구리는 왜 이렇게 우는 겁니까?”

“태어날 때부터 이랬대요. 그래서 다른 독 개구리에게 무시도 많이 받았고요.”

그 말에 그로프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개구리가 태어나서부터 이루어야 할 번식도 하지 못했습니다. 자연히 짝짓기도 못 했고요.”

그로프의 말에 제르딘은 눈썹을 찌푸렸다.

“그건 나에게 굳이 설명할 필요 없다.”

“개꿀개꿀.”

그로프가 울자 제르딘은 다시 인상을 썼다. 반면 발레린은 활짝 웃으며 그로프를 자신의 손에 올라오게 했다. 그로프가 눈을 끔뻑거리며 울었다.

“개꿀개꿀.”

“귀엽지 않나요?”

발레린이 그로프를 들면서 제르딘과 눈을 맞췄다. 제르딘은 과연 이 상황에서 자신이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이상하게 우는 빨간 개구리에 그 개구리가 귀엽다고 말하는 독기 가득한 공녀에, 그리고 그런 공녀와 계약 결혼까지 하며 데려가는 자신도.

하지만 제르딘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믿을 수 없게도 그는 그렇게 해야겠다고 느꼈다. 지금 상황에서 최선의 행동인 듯 본능적으로 느낀 것이다.

발레린은 제르딘의 동의에 기분이 좋아져 그로프에 대해 설명을 늘어놓았다.

“그로프는 독 개구리예요. 원래 탑 근처 디디카 호수에 쓰러져 있었는데 제 도움을 받고 살게 됐죠. 그땐 제 나이가 일곱 살이었는데 저도 마침 혼자였거든요.”

“…….”

제르딘은 말이 없었다. 발레린은 조심스럽게 그에게 물었다.

“혹시 지루하시지는 않나요?”

“아닙니다.”

그 말에 발레린은 미소를 짓고는 계속 말을 이었다.

“그럼 제가 가져온 저의 소중한 가족도 소개할게요. 이쪽은 제 한숨에도 유일하게 시들지 않는 이상한 노란 튤립이에요.”

발레린은 제르딘에게 노란 튤립이 담긴 꽃병을 들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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