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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빛 저주의 공녀님-7화 (7/130)

7화

‘정말로 완벽한 왕자님인데. 사랑은 못 한다니.’

발레린은 속으로 실망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곳에 계속 있을 수는 없었다.

어차피 밖에 나온 이상 다시 탑으로 돌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무엇보다 왕자님 같은 사람은 지금까지 한 번도 보지 못했다.

‘그것도 책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잘생긴 얼굴이니까.’

발레린은 그저 왕자님 옆에만 있어도 행복할 것 같았다. 이미 사랑에 빠져 버렸으니 왕자를 짝사랑이라도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비록 왕자는 그 사랑을 받아 주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어차피 발레린은 멀리서 지켜보는 일에 익숙했다. 15년간 그렇게 살아왔으니까.

비록 지금 제르딘이 사랑을 주지 못한다고 해도 그 사랑은 언제 어디서 나타날지 모르는 일이었다. 발레린도 한순간에 제르딘에게 빠질 줄 몰랐으니까.

그리고 이제는 탑에서 벗어나긴 해야 했다. 15년간 모아 온 증거도 충분했으니 이젠 해인저 모녀가 죗값을 받아야 할 시기임이 분명했다.

발레린은 해인저 모녀의 죗값과 어디로 튈지 모르는 사랑의 불씨에 희망을 걸고서 입을 열었다.

“할게요. 결혼.”

지나치게 활기찬 말이었다. 제르딘은 발레린의 들뜬 기분에 적응이 되지 않았지만 어쨌든 한다고 하니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발레린은 금방이라도 떠나려고 하는 제르딘에게 빠르게 말을 덧붙였다.

“만약 왕자님과 결혼한다면 제 부탁도 들어주셨으면 좋겠어요.”

제르딘이 시선을 돌려 발레린을 쳐다봤다. 그가 말없이 보자 발레린은 서둘러 말을 이었다.

“해인저 모녀에 대한 일을 모조리 밝혀 주셨으면 좋겠어요. 저에게 15년간 독을 먹였거든요. 제 친어머니도 독으로 죽이고요.”

제르딘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렵지 않은 일입니다. 만약 증거가 있다면 더 빠르게 일을 처리할 수 있을 거고요.”

“증거는 충분해요. 제가 그동안 책으로 기록해 놓았거든요.”

“그럼 왕궁으로 가져갈 짐을 챙기도록 하세요. 지금 곧바로 갈 겁니다.”

“지금요?”

제르딘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만약 짐을 옮기기에 불편한 게 있다면 보좌관에게 부탁하면 됩니다.”

말을 마치고 제르딘이 보좌관을 불렀다. 보좌관은 황급히 제르딘에게 다가왔다.

“부르셨습니까?”

“발레린 공녀가 나와의 결혼을 받아들이고 전용 독 감별사가 되기로 했으니 가서 짐 싸는 것을 도와줘. 그리고 해인저 모녀에 대한 일도 알아보고.”

보좌관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발레린에게 말했다.

“가시죠. 제가 도와 드리겠습니다.”

“아니에요. 저는 짐도 별로 없어서 그냥 혼자 짐 싸고 내려올게요.”

발레린은 그렇게 말한 뒤 다시 제르딘을 쳐다봤다. 그녀의 시선은 누구보다 반짝반짝 빛이 났다. 여태껏 제르딘은 사람에게서 저런 눈빛을 본 적이 없어 신기하면서도 어이가 없었다.

그가 물끄러미 쳐다보자 발레린은 싱그럽게 웃으며 말했다.

“그럼 전 짐을 다 싸고 왕자님과 마차를 함께 타고 가나요?”

보좌관이 당황한 듯 발레린에게 다가와 말했다.

“저기, 공녀님. 왕자님께서는 다른 사람과 함께 마차를 타지 않습니다.”

하지만 제르딘이 대답했다.

“네, 제 마차로 오십시오.”

그 말에 보좌관이 놀란 눈으로 제르딘을 쳐다봤다.

“왕자님!”

“어차피 이제 한배를 탄 사이니 이 정도는 대접을 해 줘야겠지. 안 그렇습니까?”

발레린은 활짝 웃으며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제르딘은 그나마 그녀의 예법이 마음에 들어 고개를 끄덕인 뒤 응접실을 나갔다.

제르딘이 응접실을 나가자마자 보좌관이 빠르게 다가와 발레린에게 말했다.

“공녀님, 정말 제가 없어도 되겠습니까?”

“네, 그리고 짐도 금방 싸서 올 테니 걱정하실 필요 없어요.”

그제야 보좌관은 안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청혼서와 함께 계약 서류는 왕궁에서 최종적으로 보시고 서명하도록 준비하겠습니다.”

“네! 고맙습니다.”

발레린은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 보좌관은 활기찬 공녀의 태도에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짓고는 물러났다. 기둥 사이에 숨은 채 몰래 상황을 지켜보던 타니안과 르네윈은 이를 갈았다.

마침 발레린이 저택을 나가자 그들은 잽싸게 발레린 뒤를 쫓았다.

발레린이 거의 탑에 도착할 때쯤이었다. 타니안과 르네윈은 빠르게 달려가 발레린 앞을 막았다.

“감히 우리 동의도 없이 멋대로 나가겠다고?”

발레린의 주머니 속에 들어 있던 그로프가 고개를 삐죽 내밀어 울었다.

“개꿀개꿀.”

르네윈은 그로프를 보며 더욱 이를 갈았다. 그녀가 그로프를 잡으려고 하자 타니안이 르네윈의 손을 때리며 쳐 냈다.

“어머니!”

“르네윈, 아무리 개구리 때문에 놀랐다고 해도 이놈은 독 개구리야! 잘못 만지면 네 소중한 손이 단숨에 못 쓰게 될 거라고.”

그 말에 르네윈이 황급히 놀라며 뒤로 물러났다. 발레린은 그 사이로 부드럽게 빠져나가며 그들에게 인사했다.

“비켜 주셔서 고맙습니다.”

예법에 맞게 인사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타니안과 르네윈은 황급히 발레린을 쫓으려 했지만 차마 그러지 못했다. 자칫 발레린의 독기에 몸이 잘못될까 봐 두려웠던 것이다. 비록 발레린이 방독면을 쓰고 있어도 말이다.

르네윈이 귀족이라는 신분에 맞지 않게 냅다 소리를 질렀다.

“어머니! 어떻게 좀 해 보세요!”

하지만 타니안은 잔뜩 찌푸린 얼굴로 탑을 쳐다볼 뿐이었다.

발레린은 재빨리 탑 위로 올라갔다. 더는 탑 안에 갇힌 채 지내지 않아도 되었다. 심지어 이제는 정식으로 나갈 수 있었다. 해인저 모녀의 죄가 알려질 날이 머지않았고…….

이날을 얼마나 기다려 왔던가!

비록 왕자님과 사랑은 하지 못하지만, 다른 모든 것은 발레린이 여태껏 꿈꿔 왔던 것이다.

발레린은 계단을 올라가는 내내 흥얼흥얼 노래를 불렀다. 책에서 봤던 옛날 노래였다. 그로프는 옆에서 개꿀개꿀 울었다.

그렇게 어느덧 방에 도착했다. 발레린은 노란 튤립이 담긴 꽃병과 벽에 걸려 있던 보라색 드레스와 함께 책장에 있는 두꺼운 책을 챙겼다. 그동안 해인저 모녀가 쓴 독을 기록한 증거물이었다.

발레린은 모두 챙긴 뒤 외쳤다.

“그로프! 이제 우린 여기를 떠나는 거야!”

“그럼 이제 마음껏 돌아다녀도 되는 겁니까?”

“그건 모르겠어. 그래도 분명한 건 왕자님 곁에 있을 수 있다는 거야.”

그 생각만으로도 발레린은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탑 안에서 지낸 15년이 결코 짧은 시간은 아니었다.

발레린은 마지막으로 다시 방을 둘러보며 손에 든 것을 확인했다.

노란 튤립 하나, 보라색 드레스 세 벌, 유일한 친구 그로프 그리고 증거를 기록한 책. 발레린의 재산은 그게 다였다.

그리고 가끔 생각날 그녀의 방. 밝은 연둣빛의 방이었다. 분홍빛과 빨간빛의 사랑표와 노란빛의 별이 그려져 있는, 약간은 기괴하면서도 밝은 벽이었다. 별과 사랑표는 발레린이 사랑이라는 감정이 궁금할 때마다 그린 것이다.

하지만 이제 발레린은 사랑이 궁금하지 않았다. 이미 왕자님과 사랑에 빠졌으니까! 비록 이루어질 수 없는 짝사랑이었지만 그래도 행복했다. 늘 궁금했던 감정을 실제로 느끼기까지 했으니까.

발레린은 멍하니 방을 둘러보다가 이내 눈을 빛내며 몸을 돌렸다. 계단을 내려가는 발레린의 발은 누구보다 빨랐다.

왕자가 마차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여유롭게 있을 순 없었다. 그녀의 긴 곱슬머리가 흔들리며 흩어졌다.

발레린이 탑을 쏜살같이 나오자 멍하게 있던 타니안과 르네윈이 놀라서 뒤로 나자빠졌다.

발레린은 그들에게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곤 정원으로 뛰어갔다.

“저, 저게……!”

르네윈이 주먹을 부들부들 떨며 말하자 타니안은 멍하니 발레린의 뒷모습을 쳐다봤다.

“발레린이 저렇게 달리기가 빨랐니?”

“그게 지금 무슨 상관이에요! 그나저나 발레린을 정말 저렇게 가게 두실 거예요? 저보다 먼저 왕궁에 가게 생겼는데?”

르네윈이 찡그리며 보자 타니안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르네윈의 얼굴 주변에 요란을 떨었다.

“르네윈, 진정하렴! 네가 진정하지 않으면 이 아름다운 얼굴에 주름이 생기잖니?”

그 말에 르네윈은 가까스로 숨을 정리했다. 하지만 그녀의 이마에서는 주름이 사라지지 않았다.

타니안이 고개를 내저으며 이마에 손을 얹으려 하자 르네윈이 신경질적으로 타니안의 손을 내려쳤다.

“어머니, 이렇게 가만히 있을 순 없다고요!”

“하지만 방법이 없잖니. 어쨌든 우리는 독 감별사가 되지 못하니.”

그 말에 르네윈이 발을 구르며 신경질을 냈다.

“그러니까 더 화가 난다고요! 15년이라고요! 어머니가 겨우 발레린의 엄마를 독으로 죽이고 15년이나 저 애에게 독을 먹였는데 저렇게 멀쩡한 게 말이 돼요? 저주를 받았다면서요! 그런데 저건 저주가 아니라…….”

그때 특이한 개구리 소리가 울렸다.

“개꿀개꿀.”

르네윈이 눈썹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리자 의외의 사람이 하나 더 있었다. 보좌관이었다. 옆에서는 발레린이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너, 넌…….”

“생각해 보니 정식으로 인사를 안 한 것 같아서.”

발레린이 본 예법 책에는 ‘마지막 인사는 짧지만 의미 있게 하라’고 적혀 있었다.

발레린은 책에서 읽었던 구절을 생각하고 미소를 지으며 타니안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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