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네! 어떤 독을 먹으면 사과 맛이 나고 어떤 독은 포도 맛이 나며 다른 어떤 독은 여러 과일을 섞은 듯 아주 맛있어요. 독성이 강한 독은 신맛이 강한 과일 맛이 나고요.”
“그렇다면 공녀는 그런 독을 아무리 먹어도 죽지 않는단 말입니까?”
“네!”
발레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녀의 긴 곱슬머리가 살짝 흔들렸다. 그때 이상한 개구리 소리가 들렸다.
“개꿀개꿀.”
제르딘은 단숨에 눈썹을 찌푸리며 주변을 둘러봤다. 발레린은 미소를 지으며 그로프를 자신의 손바닥에 놓았다. 그로프가 제르딘을 똑바로 쳐다보며 다시 울었다.
“개꿀개꿀.”
제르딘은 설명을 필요하다는 듯 굳은 얼굴로 발레린을 보았다. 발레린은 그로프를 보며 차분히 말했다.
“제 친구인 빨간 독 개구리 그로프예요. 참고로 원래 울음소리가 특이한 편이에요.”
제르딘은 머릿속이 더 복잡해지는 것 같았다. 15년간 제게 독을 먹인 상황에 오히려 기쁜 듯 말하는 발레린, 그리고 이상하게 우는 독 개구리까지.
거기다 지금 발레린 공녀는 독 개구리와 대화라도 하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소곤거리고 있었다.
제르딘은 고개를 내저었다. 하지만 그는 다시 이곳에 온 목적을 되짚었다. 그가 스스로 와서 만든 자리였다. 아니, 이제 피할 구석도 없었다. 뱀 같은 늙은 외삼촌이 제 자리를 탐하고 있었다.
거기다 발레린 공녀만이 유일하게 독을 아무렇지 않아 한다. 누군가는 그저 한 방울만 먹어도 얼굴이 퍼렇게 변해서 죽어 버리는데 아무렇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과일 맛이 난다니.
“괜찮으세요?”
발레린은 언제 제르딘을 봤는지 걱정스레 살폈다. 제르딘은 손을 내저었다. 그는 곧바로 발레린을 쳐다봤다. 갑작스럽게 눈이 마주치자 발레린은 깜짝 놀라며 눈을 깜빡였다.
제르딘은 개의치 않으며 입을 열었다.
“사실 발레린 공녀에게 부탁할 게 있어서 이곳에 왔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발레린은 침을 삼키며 저도 모르게 동화책을 꼭 쥐었다.
제르딘은 생각을 환기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잠시 창가를 보더니 발레린에게 고개를 돌렸다.
“저와 결혼해 주세요.”
발레린은 잠시 말이 나오지 않았다. 순간 주변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머릿속이 멍했다.
발레린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보는 사이 제르딘이 말을 이었다.
“하지만 공녀를 사랑하는 일은 절대 없을 겁니다.”
“그게 무슨…….”
“정확히 말하면 이 관계는 계약으로 성사된다는 말입니다.”
“관계라고 한다면 어떤 걸 말씀하시는 건가요?”
“저는 공녀의 저주가 저에게 많은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도움이요?”
“지금 왕궁에서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독살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미 왕궁 주변에는 이에 관한 소문도 무성하고요.”
“그럼 저와 하겠다는 계약이…….”
“단순한 계약 결혼입니다. 저를 도와주는 대가로 말입니다.”
발레린은 그제야 정신이 제대로 돌아오는 듯했다.
‘계약 결혼이라니!’
생각지도 못한 것이었다. 순간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그저 왕자를 보고 한눈에 반했을 뿐이었다. 사랑이 없는 결혼은 쉽사리 받아들일 수 없었다.
제르딘은 이 왕국의 하나밖에 없는 왕자였다. 곧 왕위를 이을 사람이었고.
그런데 굳이 사랑이 없는 결혼이라니.
발레린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어서 물었다.
“굳이 그러지 않으셔도 저를 독 감별사로 임명하실 수 있을 텐데 왜 저와 결혼하려고 하시나요?”
“당신 가문이 그나마 도움이 될 것 같아서입니다.”
“…….”
“사르티아 가문은 여태껏 왕족파와 척을 지지 않으면서 나름대로 중립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점점 귀족파의 세력이 강해지니 이제라도 제 편으로 만들어 볼까 합니다.”
제르딘의 눈빛은 여유가 있으면서도 단호했다. 발레린은 잠시 멍하니 제르딘을 쳐다보다가 이내 정신을 차리고서 말했다.
“하지만 저는 지금도 방독면을 끼고 있는데 저와 결혼하면 왕자님은 괜찮으신가요?”
제르딘은 고개를 끄덕이며 창문을 바라봤다.
“저는 피를 타고났으니 괜찮습니다. 공녀와 결혼을 한다고 주변에서 제 평판이 더 나빠지지는 않을 겁니다. 독을 뿜는 저주에 걸린 사람과 결혼을 하니 모든 제국민을 품는다는 인식도 생길 수 있고, 독에 안전한 왕족이라고 알려질 테니 왕족의 위신도 높아질 겁니다.”
“하지만 왕족파들은 오히려 안 좋게 볼 수 있어요. 왕족의 피에 독에 걸린 저주가 묻으니까요.”
“어차피 아이를 가질 생각은 없습니다.”
“네?”
제르딘이 돌아봤다. 그의 눈빛은 꽤 진지하고 단호했다.
“배도스 공작이 몰락하면 이 결혼은 없는 일로 할 테니까요.”
“…….”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발레린이 고개를 들자 제르딘이 이어서 말했다.
“이곳에 계속 갇혀 있을 것인지 아니면 저와 잠시라도 결혼을 해서 이곳을 완전히 벗어날 건지.”
“그럼 제가 이곳을 나가면 살 곳은 마련해 주시는 건가요?”
“물론입니다. 저와 이혼한 후에도 먹고사는 데 지장 없게끔 해 주겠습니다.”
발레린은 옆에 있는 빨간 개구리 그로프를 쳐다봤다. 그로프의 눈빛도 발레린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어딘가 말이 쉽사리 나오지 않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발레린은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머릿속에는 지난날이 스쳐 지나갔다. 그동안 발레린은 나름대로 탑 안에서 잘 적응하고 살아왔다.
하지만 어쩔 수 없어서 그랬던 것뿐이었다.
발레린은 자신이 가져온 동화책을 보았다. 왕자는 공주가 있는 곳으로 와서 적을 없앤 뒤 탑 안에서 꺼내 준다. 그리고 둘은 결혼을 하고 이야기는 행복하게 끝난다.
지금 발레린의 상황은 동화와 영 달랐다. 왕자와 결혼은 할 수 있을지언정 행복은 장담할 수 없었다.
‘동화책에 나오는 게 이루어지나 싶었는데.’
발레린은 고개를 숙인 채 한숨을 내쉬었다.
“공녀.”
낮게 부르는 목소리였다. 발레린이 시선을 들자 제르딘이 그녀와 눈을 똑바로 맞추었다. 하늘빛 눈동자가 무척이나 맑아 보였다.
발레린은 저도 모르게 제르딘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그 시선에도 제르딘은 개의치 않고 말했다.
“공녀에겐 꽤 좋은 조건일 겁니다. 나중에 저와 이혼을 하게 되겠지만 그래도 그동안 탑 안에서 갇혀 지내는 것보다는 나은 생활을 할 테니까요.”
“하지만 아버지가 허락하실까요?”
발레린은 켄트릭을 잘 알았다. 그녀의 아버지는 발레린에게 그다지 좋은 말은 해 주지 않았다.
“그건 걱정 마세요. 사르티아 공작은 제 말에 따르게 될 겁니다.”
“따르게 된다는 건…….”
“제가 섭섭지 않게 해 줄 예정이니까요.”
제르딘은 싱긋 웃었다. 발레린은 멍하게 쳐다보다가 이내 고개를 내렸다. 얼굴이 붉게 타오르는 것 같았다. 발레린은 두 볼을 손으로 감싸며 제르딘에게 물었다.
“왜 사랑에 대해선 선을 그으시는지 알 수 있을까요?”
“제가 공녀에게 그런 감정을 줄 수 없으니까요. 괜히 기대하지 말라는 겁니다.”
“기대하지 말라는 건 왕자님께서 그런 감정을 느끼지 못하신다는 말씀인가요?”
“어렸을 때부터 누군가를 좋아해 본 적 없습니다. 그리고 굳이 그런 감정을 느끼고 싶지도 않고요.”
“무슨 일이 있었나요?”
제르딘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지금 공녀에게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제 사적인 일이기도 하고.”
선을 긋는 태도에 발레린은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죄송해요. 제가 괜히…….”
“아닙니다.”
발레린은 잠시 생각하다가 제르딘에게 물었다.
“그럼 제가 짝사랑하는 건 막지 않으실 거죠?”
제르딘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대로 하세요. 제게 굳이 남의 마음까지 막을 권한은 없으니.”
발레린은 그제야 밝게 웃었다. 제르딘은 그 모습이 왠지 모르게 눈에 들어왔다. 누군가는 그 말을 듣고 주눅 들었지만 오히려 발레린은 밝은 모습을 보이니 자신이 이상한 건가 싶었다.
제르딘은 발레린을 물끄러미 보다가 말했다.
“그리고 저와 결혼한다면 제 독 감별사가 되어 주셔야 합니다.”
“독 감별사라면 왕자님이 식사하실 때나 중요한 회의에 참석하실 때 미리 음식을 먹어서 독이 있는지 없는지 살피는 거죠?”
제르딘은 고개를 끄덕이며 발레린을 쳐다봤다.
“잘 아시네요.”
“17대 왕부터 내려오는 전통이니까요.”
독 감별사라면 발레린이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여태껏 독을 먹을 때 과일 맛을 느끼면서 행복도 같이 느꼈으니까.
발레린은 제르딘을 슬쩍 쳐다봤다. 순간 시선이 마주쳤다. 발레린이 눈을 깜빡이기도 전에 제르딘이 말했다.
“제 계약을 받아들이시겠습니까?”
다시 발레린에게 날아 들어온 질문이었다. 발레린은 잠시 제르딘을 보다가 이내 그로프를 쳐다봤다. 그로프는 눈이 마주치자마자 울었다.
“개꿀개꿀.”
그 울음소리에 발레린은 재빨리 제르딘에게 물었다.
“독 감별사로 일하는 동시에 왕자님과 결혼할 수 있는 거죠?”
제르딘은 고개를 끄덕였다. 발레린은 조심스레 제르딘을 쳐다봤다. 그의 미모는 다른 말이 필요 없을 정도로 수려했다.
이마까지 살짝 내려온 황금 같은 금발은 나른하면서도 부드러운 인상을 주었고 눈빛에는 단호한 빛이 언뜻 서려 있었다. 날카로운 콧대와 더불어 조화로운 턱 선이 눈에 띄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