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응접실 안, 제르딘은 지나치게 밝은 커튼을 보며 혀를 찼다. 사르티아 가문은 나름대로 명망이 있지만 저택을 꾸미는 심미안은 없는 모양이었다. 어딜 봐도 지나치게 색이 과하고 장식이 화려했다.
‘정도를 모르는 인간이군.’
제르딘은 사르티아 공작에 대해 별다른 생각이 없었지만 저택의 내부 장식에 대한 인상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마침 하인이 제르딘 앞에 차를 놓아주었다. 제르딘은 마음을 차분하게 잡으며 찻잔을 들었다. 그러나 차를 마시자마자 도로 뱉어 낼 뻔했다.
“맛이 이게…….”
생선뼈를 우린 것처럼 비린내가 났다. 그가 하인에게 눈길을 돌렸을 때였다.
“왕자님!”
커다란 걸로 모자라 격 없이 높은 목소리였다. 제르딘은 귀에 거슬려 눈썹을 확 찌푸렸다. 그가 고개를 돌리자 같이 온 르네윈이 황급히 어머니의 팔을 잡고는 머리를 숙였다.
그러자 뒤늦게 타니안이 인사를 하며 자신의 딸을 소개했다.
“인사드립니다. 저는 타니안 사르티안으로 이쪽은 제 딸인 사르티아 가문의 공녀 르네윈이라고 합니다.”
“다른 공녀는?”
“네?”
타니안과 르네윈이 거의 동시에 대답했다. 놀란 그들에 반해 제르딘은 무감한 목소리로 말했다.
“발레린 공녀를 만나러 왔다.”
그 말에 타니안과 르네윈은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지만 먼저 정신을 차린 것은 타니안이었다.
“왕자님, 발레린 공녀는 아주 악독한 저주를 받아서 만나는 자체도 불길할 겁니다. 거기다…….”
“이미 저주가 걸렸다는 소문은 들었으니 발레린 공녀를 불러와라.”
타니안과 르네윈은 쉽사리 입을 다물지 못했다.
발레린 공녀라니! 자신들이 15년간 죽이기 위해 애썼던 그 발레린이라니! 발레린을 죽이고 유일한 사르티아 공녀로 살아가려고 했던 르네윈은 이 현실이 믿기지 않았다.
“왕자님, 하지만…….”
그때 제르딘 옆에 있던 보좌관이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왕자님의 명령입니다. 거역했다간 목숨을 부지하지 못할 겁니다.”
제 목숨이 중요한 타니안은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아닙니다. 곧장…….”
타니안은 르네윈을 쳐다봤다. 르네윈은 거의 울 것처럼 제 엄마를 보고 있었다. 하지만 타니안은 고개를 돌려 말했다.
“발레린을 불러오겠습니다.”
끝내 ‘공녀’를 붙이지 못했다. 자신의 딸을 사르티아 가문의 유일한 공녀로 만들려고 했건만 발레린은 독을 먹고 잘 크기만 했다.
타니안은 부들거리는 주먹을 겨우 움켜쥐고 집사에게 말했다.
“발레린을 불러와.”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하인이 왕자와 모녀에게 방독면을 주었다. 제르딘이 의아하게 보자 타니안이 재빨리 설명했다.
“왕자님, 발레린은 무서운 저주에 걸렸습니다. 옆에서 같이 숨을 내쉬기만 해도 사람이 쓰러질 정도로 독기가 강하고요.”
제르딘은 흥미롭다는 듯 방독면을 이리저리 돌려 보았다. 이미 타니안와 르네윈은 방독면을 누구보다 빨리 쓴 뒤였다. 제르딘은 피식 웃고는 방독면을 썼다.
잠시 후 집사가 거친 기침을 하며 들어섰다.
타니안과 르네윈은 놀라며 의자 손잡이를 잡고 최대한 멀리 앉았다. 제르딘만 그대로 고개를 돌렸다.
보라색 드레스를 입은 사람이 서 있었다. 방독면을 쓰긴 했지만 오목조목한 코, 그리고 지나치게 생생히 빛나는 눈동자가 눈에 띄었다.
특히 제르딘은 발레린의 눈을 보자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의 눈빛은 마치 신이라도 본 것처럼 황홀한 빛을 띠었다. 그가 눈썹을 살짝 찌푸리자 옆에 있던 보좌관이 발레린에게 말했다.
“왕자님께 예의를 다하십시오.”
그제야 발레린은 황급히 고개를 숙인 뒤 예법에 맞게 인사했다. 그녀의 인사는 50년 전에 유행했던 인사법이었다. 한마디로 너무나 격식 있는 인사였다.
제르딘은 어안이 벙벙했다. 자신을 보좌하는 늙은 귀족조차 저렇게 인사하지는 않았다.
제르딘이 뚫어지게 쳐다보자 르네윈이 외쳤다.
“왜 이렇게 늦게 온 거야? 왕자님께서 기다리시는데…….”
“나가 있어라.”
차분하게 떨어지는 제르딘의 말에 타니안과 르네윈이 놀란 토끼 눈으로 제르딘을 쳐다봤다.
“발레린 공녀와 단둘이 할 이야기가 있다.”
제르딘이 차분히 말하자 그들은 잠시 믿기지 않는 듯 멍하게 있었다. 참다못한 보좌관이 기침을 하며 눈치를 주자 그제야 어정쩡하게 일어났다.
하지만 그들은 나가면서도 발레린을 도끼눈으로 쳐다봤다.
“감히 네가 왕자님을…….”
특히 르네윈은 부들부들 떨며 발레린을 향해 중얼거렸다.
그때 발레린의 드레스 주머니에 있던 그로프가 고개를 비죽 내밀었다. 갑작스레 나온 빨간 독 개구리에 르네윈은 깜짝 놀라서 소리를 내질렀다.
난데없는 높은 소리에 제르딘은 물론 주변에 있던 하인들까지 눈살을 찌푸렸다.
타니안은 갑자기 분위기가 가라앉자 제 딸의 팔을 황급히 붙잡고 연신 어색하게 웃으며 물러났다.
응접실을 완전히 나서자 그들의 발걸음은 방정맞기가 이를 데 없었다. 제르딘은 속으로 혀를 차고는 아직도 자신을 황홀한 듯 쳐다보고 있는 발레린을 돌아봤다.
누구도 자신을 저렇게 쳐다보지 않았다. 몹시 꺼림칙하고 이상했다. 발레린은 계속 자신을 멍하게 봤다. 아니, 넋이 나간 것 같았다.
제르딘은 눈썹을 찌푸린 채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다른 사람들은 나를 그렇게 쳐다보지 않습니다.”
하지만 발레린은 여전히 제르딘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마치 종이라면 눈빛으로 뚫을 기세였다.
보다 못한 보좌관이 큼큼거리며 헛기침을 했다. 그 소리에 이제야 정신이 뜨였는지 발레린이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왕자님.”
제르딘은 고개를 끄덕인 뒤 발레린에게 앞에 있는 의자를 손짓했다.
“앉으세요, 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발레린은 그저 멍하니 제르딘을 쳐다봤다. 그 모습에 제르딘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자 발레린은 황급히 말했다.
“제게는 말씀을 낮추지 않으셔서요.”
“제겐 이 저택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니까요.”
발레린은 놀라서 목소리가 자연히 커졌다.
“중요한 사람이라면…….”
“우선 앉으시죠.”
그러곤 제르딘이 보좌관에게 말했다.
“단둘이 얘기할 것이니 듣는 사람이 없는지 응접실 문을 지키고 있어.”
보좌관은 고개를 끄덕인 뒤 하인을 물러나게 했다. 곧 주변에는 제르딘과 발레린이 남았다.
발레린은 고개를 살짝 숙이고 있었지만 눈은 제르딘에게 향했다. 마치 관성인 것처럼 자연히 향하는 시선에 제르딘은 옅은 한숨을 내쉰 뒤 말했다.
“제 얼굴이 신기합니까?”
“아니요.”
“그럼 왜 그렇게 쳐다봅니까?”
발레린은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황공하오나 왕자님께서 너무 잘생겨서요.”
제르딘은 헛웃음이 나오려던 것을 겨우 참았다. 반면 발레린은 여전히 일어선 채 그를 보고 있었다. 옅은 미소를 머금고. 자세히 보니 손에는 동화책까지 있었다.
제르딘은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리며 다시 바로 앞에 있는 의자에 눈짓했다.
“나는 같은 말을 여러 번 하는 걸 싫어합니다.”
그제야 발레린은 차분히 의자에 앉았다. 발레린의 앉는 모습은 의외였다. 그저 작은 몸짓이었지만 너무나 우아했던 것이다. 드레스가 걸리적거릴 법도 한데 한 번에 의자에 앉는 모습은 제르딘이 여태껏 보지 못한, 매우 보기 드문 행동이었다.
‘예법 교육 하나는 잘 받았나 보군.’
제르딘은 그것만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탑 안에 갇혀 있었어도 사르티아 공작이 발레린 공녀에게 그나마 사람다운 예법을 가르쳐 주었나 싶었다.
“할 이야기가 무엇인가요?”
갑자기 들린 낭랑한 목소리에 제르딘이 고개를 들었다. 웃음을 지으며 살짝 내려간 눈꼬리가 유난히 눈에 띄었다. 마냥 밝은 얼굴이 거슬렸다. 그가 여태껏 주위에서 보지 못한 얼굴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젠 방법이 없었다. 제르딘은 이곳에 온 목적을 상기하며 말했다.
“공녀가 독에 면역이 강하다는 것은 들었습니다.”
발레린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르딘은 그녀의 표정을 무시하고 근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독에 면역이 강하다면 음식에 들어 있는 독도 구별할 줄 아는 겁니까?”
“네, 해인저 모녀가 15년간 다양한 독을 저에게 주어서 이제는 눈을 감고도 독을 구별할 수 있습니다.”
발레린은 활짝 웃었다. 누군가 들으면 불쌍하다며 눈물이라도 짜낼 이야기였지만 오히려 발레린은 그 사실이 자신에게 많은 도움이 된 것처럼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심지어 기분이 좋아 보이기까지 했다.
제르딘은 아무렇지 않은 발레린이 의아했지만 이내 차분히 말했다.
“두 사람이 공녀에게 15년간 독을 먹였다는 게 사실입니까?”
“제가 산증인인걸요.”
제르딘은 잠시 할 말이 없었다. 발레린은 정말이지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그 모습이 도저히 믿기지 않아 제르딘이 물었다.
“괜찮습니까?”
“뭘요?”
“그 두 사람이 그렇게까지 했는데 정말 아무렇지 않습니까?”
발레린은 밝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덕분에 오히려 독을 잘 구분할 수 있게 됐어요. 여태까지 다양한 독을 저에게 줬거든요.”
“…….”
“신기하게도 독마다 각각 맛이 달라요. 저한테 독은 과일 맛과 비슷하거든요.”
뜻밖의 말에 제르딘이 눈썹을 찌푸렸다.
“과일이라고 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