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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빛 저주의 공녀님-4화 (4/130)

4화

“무슨 말이지? 독이란 사람을 죽게 만드는 것이 당연한데 살다니.”

“외람되오나 최근 마법 상점에서 유독 독을 많이 사 간 사람을 추적했는데 발레린 공녀 저택이 나왔습니다.”

최근 왕국 내 마법 상점에서 독을 사기 위해선 반드시 본인 이름과 독을 쓰는 목적을 적어야 했다.

독을 이용한 암살이 증가하면서 겨우 생긴 제도였다. 이 제도를 만드는 데 누구보다 배도스 공작이 많이 방해하기도 했다.

제르딘은 가만히 생각하다가 보좌관에게 물었다.

“사르티아 가문에 마법사라도 있는가?”

“아닙니다. 그저 저주받은 공녀만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까 그 공녀는 독을 아무리 가까이 해도 죽지 않는 저주에 걸렸다는 건가?”

“네, 그렇긴 하지만 아무래도 공녀에겐 독기가 많아서 일반 사람도 옆에 가면 죽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하인들은 공녀를 만날 때 방독면을 쓴다고 하더군요.”

“별난 일이군. 그런 사람이 있다니.”

제르딘은 한참 생각하다가 문득 입을 열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오히려 우리 쪽에선 별난 일이 아니지.”

“예? 무슨 말씀이신지…….”

“이참에 귀족파들이 그렇게 노래를 부르는 결혼이라는 것도 한꺼번에 해치울 수 있겠어.”

“결혼이라니요! 왕자님 설마…….”

“배도스 공작이 말하는 가문과 정략결혼을 하는 것보다, 사르티아 가문과 연을 맺는다면 내 세력도 넓어질 것 아닌가?”

보좌관은 잠시 말없이 서 있었다. 그의 눈은 좀처럼 작아지지 않았다.

“하지만 배도스 공작이 가만히 있겠습니까? 왕국의 결혼은…….”

“어차피 최종적인 결혼 권한은 나에게 있는데 뭐가 걱정이지? 왕세자가 안 되었어도 지금 왕위 계승 1위는 나인데.”

“…….”

“왕국법상 왕이 되지 않은 상태라도 왕위 계승 1위이니 지금 내가 대리 정치를 하고 있는 것 아닌가.”

“그건 그렇지만 예전처럼 배도스 공작 측에서 다시 독살을 하면 왕자님만 난처해지시지 않습니까?”

“발레린 공녀는 독에 강하다고 하지 않았나?”

“그렇긴 합니다. 하지만…….”

보좌관이 말을 끝맺기도 전에 제르딘이 일어났다.

“발레린 공녀를 직접 만나야겠다.”

“왕자님, 지금은 귀족 회의를 가셔야 하지 않습니까?”

그 말에 제르딘은 어이가 없는 듯 피식 웃었다.

“어차피 왕정 회의도 아니고 귀족 회의는 배도스 공작이 알아서 하는데. 내가 가 봤자 저들끼리 떠들 테지. 안 그래도 주변 사람이 자꾸 죽는 게 거슬렸는데 이참에 그 공녀와 결혼하고 독 감별사로 둬야겠다.”

“왕자님, 그건…….”

“그러고 보면 내 음식의 독을 감별하는 사람도 이번이 여섯 번째야. 모두 독의 미약한 반응으로 몸져누워 있지 않은가?”

이미 죽음은 왕자 앞에 다다랐다. 제르딘은 침착한 얼굴로 보좌관을 보았다.

“더는 내 주변에 죽음을 두고 싶지 않아.”

“하지만 발레린 공녀가 독을 감별할 수 있을지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그저 독에 멀쩡할 뿐이지 그것을 구별하는 능력은 없을 수도 있잖습니까?”

“그건 내가 직접 보고 판단할 테니 마차를 준비해.”

보좌관은 할 수 없이 물러났다. 제르딘은 곧장 집무실을 나갔다.

그가 복도를 나서서 막 계단으로 내려가던 참이었다. 무리를 이룬 인영이 계단을 올라오고 있었다.

제르딘은 가까이 보지 않아도 그들이 누군지 벌써 알아차렸다. 제르딘의 얼굴이 더러운 것이라도 본 듯이 일그러졌다.

점점 무리가 가까워졌다. 이윽고 선두에 선 사람이 웃으며 제르딘에게 다가왔다.

“왕자님, 어디 가십니까? 조금 있으면 귀족 회의가 있습니다.”

“알아볼 게 있어서 귀족 회의는 부득이하게 빠지겠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꾸 빠지시면 됩니까?”

배도스 공작은 제르딘을 보며 묘한 미소를 지었다. 제르딘은 그 모습을 보며 겨우 화를 누르고 주변을 둘러봤다.

배도스 공작 옆에는 늙은 원로원 귀족과 그를 따르는 지겨운 귀족만 있을 뿐 그의 아들은 보이지 않았다. 이미 왕궁의 요직을 차지하고 있으면서 자주 회의에 나오지 않는 인간은 다름 아닌 그의 아들 헬릭스였다.

안 봐도 뻔했다. 어딘가에서 여자와 함께 늦잠을 자고 있을 게 분명했다.

제르딘은 뻔한 장면을 생각하며 배도스 공작에게 한마디 했다.

“그러고 보면 공작의 아들인 헬릭스도 없는데 무슨 문제가 있는가?”

그 말에 배도스 공작은 붉게 타오른 얼굴로 헛기침을 했다. 가까스로 화를 참고 있는 것처럼 얼굴이 말이 아니었다.

제르딘은 그를 구경하며 느긋하게 미소를 지었다. 배도스 공작은 제르딘을 날카로운 눈매로 쳐다보며 입술을 뗐다.

“지금 헬릭스는 몸이 많이 아픕니다. 그러니 말을 삼가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러지. 지금까지 안 나온 것을 보면 심각한 병이 아닌가 걱정도 된다만.”

“큼, 그나저나 이렇게 귀족 회의에 왕자님께서 자주 불참하시면 왕족의 체면이 서지 않으실 텐데요.”

“어차피 자네 마음대로 할 게 아닌가. 내 주변 사람을 모두 죽이려는 게 자네인 걸 모를 줄 아는가?”

그 말에 배도스 공작이 가까이 다가왔다. 그는 뱀 같은 혀를 놀리며 입꼬리를 올렸다.

“증거가 있으십니까?”

“…….”

“증거도 없는데 저를 함부로 의심하시다니. 참으로 명예롭지 못하십니다.”

제르딘은 배도스 공작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자네야말로 명예롭지 못한 것 아닌가? 그런 말이 떠도는 것 자체가 문제가 있다는 건데.”

“문제가 있다니요. 저를 싫어하는 무리가 퍼뜨리는 질 낮은 소문일 뿐이겠지요.”

제르딘은 여유롭게 배도스 공작을 보았다.

“언젠가 그 소문의 진상이 밝혀질 텐데.”

“저도 하루빨리 전하 주변의 사람을 죽인 자를 찾고 싶은 건 마찬가지입니다.”

제르딘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배도스 공작은 여전히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숙였다.

“그럼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귀족 회의 때문에 바빠서요.”

곧 그의 무리가 완전히 사라졌다. 제르딘은 그의 등 뒤로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독사 같은 노인네.”

제르딘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짙었다.

한편, 사르티아 저택의 탑 밑. 하녀가 쪼르르 달려와 자칭 사르티아 부인이자 발레린의 새어머니인 타니안 앞에 고개를 숙였다.

“그래, 죽었더냐?”

하지만 하녀는 잔뜩 굳은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오히려 과일 맛이 난다며 독 성분까지 분석하고 있었습니다.”

그 말에 옆에 있던 타니안의 친딸 르네윈이 발을 굴렀다.

“대체 어떤 독을 써야 통하는 거야!”

하녀는 놀라서 뒤로 물러났지만 르네윈의 화는 쉽사리 가라앉지 않았다. 타니안이 겨우 르네윈의 팔을 잡았지만 르네윈은 잔뜩 찌푸린 얼굴로 불만을 토로했다.

“발레린 때문에 머리가 돌 지경이에요! 원래 못하는 공부인데! 독성분 때문에 밤새우면서 공부해서 이제는 논문까지 써도 될 정도라고요!”

그 말에 타니안은 탄식하며 제 딸을 끌어안았다.

“휴, 그래. 르네윈. 네가 얼마나 고생이 많니? 머리 아픈 공부를 하다니.”

타니안의 품속에서 르네윈의 말이 웅웅 울렸다.

“분명 발레린은 일부러 우리를 약 올리는 거라고요. 발레린 때문에 무도회에 가면 사람들이 저를 알은척도 하지 않아요. 저를 보고 독이 옮을까 하는 거죠. 걔가 없어져야 저도 어머니도 사람대접을 받을 텐데.”

“그래, 발레린 때문에 우리가 무슨 고생이니? 거기다 발레린이 뭘 알겠어? 무식하게 아무것도 모르고 분석하는 흉내만 내겠지.”

“그러니까요! 탑 안에 갇혀 있는 주제에 뭘 안다고. 어렵게 조합한 독을 알 리가 없겠죠.”

르네윈이 이를 갈며 말하자 타니안은 제 딸의 얼굴을 보더니 등을 토닥여 주었다.

“르네윈, 그렇게 인상 쓰지 말렴. 네 예쁜 얼굴이 망가지잖니.”

“더 망가질 것도 없어요. 어느 독이 더 강할까 생각하다가 밤을 새우는 날도 많으니까요.”

“휴, 어느 드레스가 가장 예쁜지 연구해야 할 아이가 독 연구라니. 정말 세상이 말세구나.”

“그러니까요, 어머니. 이렇게 제 인생이 기구할 수 없어요.”

“그래도 분명 발레린에게 통하는 독이 있을 거다. 우리 희망을 잃지 말자꾸나.”

타니안이 르네윈을 꼭 안았다. 르네윈은 제 어머니의 품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이번에는 다를 거라고요.”

르네윈이 입꼬리를 올리는 사이 집사가 급하게 그들에게 뛰어왔다. 타니안이 도끼눈을 뜨자 집사가 황급히 말했다.

“마님, 왕자님이 오셨…….”

집사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타니안은 르네윈을 보며 소리를 질렀다.

“왕자라니!”

“그게 사실이야?”

르네윈이 집사에게 말하자 집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타니안은 곧바로 르네윈의 손을 잡았다.

“어서 가자꾸나. 왕자님이 오시다니. 이건 분명 기회야. 분명 하늘이 도와주시는 게 틀림없어!”

타니안은 눈에 띄게 기뻐했다. 왕자가 찾아왔다는 것은 르네윈을 보러 왔다는 의미도 있었다. 사교계 시즌이었기에 타니안과 르네윈의 얼굴은 놀랄 정도로 환했다.

타니안은 서두르며 집사에게 말했다.

“왕자님은 응접실에 모셨겠지?”

“네, 지금 기다리고 계십니다.”

타니안은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바쁘게 걸음을 재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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