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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빛 저주의 공녀님-3화 (3/130)

3화

“내 생각도 비슷해. 다만 나는 여기에 르카티아 독을 더 섞은 것 같아. 아마 두 방울 정도?”

발레린이 말하자 그로프는 펄쩍 뛰어 『모든 독에 관하여』 책장을 혀를 이용해 이리저리 펼쳤다. 정신없이 책장을 넘기던 그로프가 문득 혀를 완전히 뗐다.

“주인님 말이 맞습니다. 여기에 망고 맛이 섞인 걸 보면 아마도 르카티아 독도 섞은 것 같습니다.”

책에는 그저 ‘르카티아는 사람의 얼굴을 노랗게 만드는 독성 물질’이라고만 적혀 있었지만 발레린은 거기에 맛을 느꼈다.

“맞지? 역시 르카티아 독이 들어가면 맛이 더 상큼해지고 좋다니까.”

“확실히 이번에는 잘 섞은 것 같습니다. 이전보다 맛이 아주 좋으니까요.”

그 말을 끝으로 발레린과 그로프는 허겁지겁 멀건 수프를 먹었다. 발레린의 손놀림과 그로프의 혀 놀림은 경쟁하듯 빨랐다.

그렇게 마지막 한 술이 남았을 때였다. 발레린은 잠시 손을 들고서 그로프의 혀를 막았다. 그로프는 뒤로 물러났고 발레린은 숟가락으로 그릇을 박박 긁었다. 숟가락에는 겨우 찰 정도의 멀건 수프가 남았다.

발레린은 먼저 그로프에게 주었다. 그로프는 날름 혀를 내밀었다. 그런 뒤 그로프가 뒤로 물러나 발레린을 봤다. 발레린은 곧바로 숟가락을 입으로 가져가 야무지게 먹었다.

“역시 이 맛이야!”

발레린은 만족스럽게 웃었다. 탑 안에서 망고나 사과, 바나나처럼 다양한 과일은 먹기 어려웠다. 게다가 이런 과일은 발레린이 일곱 살 때 먹고 유일하게 기억하는 맛이었다.

특이하게도 멀건 수프에서는 과일 맛이 났는데 다름 아닌 독 때문이었다. 이상하게도 발레린은 독마다 고유한 맛을 느꼈다. 대부분 상큼했다. 과일처럼.

15년 전부터 해인저 모녀는 발레린을 제거하겠다는 의지로 가득한 사람들이었다. 발레린의 온몸에 독이 퍼져 있는 것을 알면서도 온갖 독을 더 먹였다. 발레린은 그들이 그렇게 하는 이유를 한 가지로 추측했다.

‘다른 종류의 독은 통하지 않을까 싶어서겠지.’

그렇게 자그마치 15년이었다. 어머니는 비록 그들의 독으로 죽었지만 발레린은 쉽사리 죽지 않았다. 잔인한 그들의 욕망을 오히려 발레린은 즐겼다.

“역시 해인저 모녀가 만든 독은 맛있어. 애피타이저로 딱이야!”

그로프도 동의하듯 울었다.

“개꿀개꿀.”

발레린은 상쾌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낡은 책장에서 책 한 권을 꺼내서 아까 먹은 독을 착실히 기록했다. 책의 쪽수는 방대했다. 그동안 발레린이 먹은 독을 기록한 내용이었다.

‘이 정도면 이제 증거로 충분한데.’

하지만 나갈 방도는 없었다. 탑을 탈출하려 해도 높이 때문에 엄두가 나지 않았고 나가는 문은 모두 기사들이 무장을 한 채 지키고 있었다.

가장 걸리는 점은 독이었다. 애석하게도 발레린은 자신의 독기 때문에 탑 안에 갇힌 것이기에 방독면도 쓰지 않고 나갔다간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칠 수 있었다.

만약 방독면을 쓰더라도 사람들은 발레린을 그리 반기지 않을 것이다. 이미 어머니를 죽인 공녀라고 소문난 마당에 탑까지 탈출한다면…….

발레린은 시무룩한 얼굴로 여태껏 읽은 동화를 떠올렸다.

‘동화 속의 왕자님이라도 등장했으면.’

그럼 이곳에서 바라던 꿈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만약 왕자가 나타난다면 동화 속처럼 사랑을 이루고, 이 탑도 나갈 수 있을지 모른다.

발레린은 속으로 작은 희망을 간직한 채 책을 덮어 책장에 다시 넣었다. 그러곤 곧바로 창가로 걸어갔다.

창가 근처에는 발레린이 관리한 식물이 많았다. 애피타이저로 입맛을 돌게 했으니 이제 아침을 먹을 차례였다.

발레린은 낡은 상자에 담긴 블루베리 나무에서 블루베리를 따고, 양배추 잎을 따서 빗물을 모아 놓은 곳에서 씻었다.

그리고 근처에 있는 토마토를 따서 이가 빠진 그릇에 잘게 잘라 넣었다. 그러자 꽤 풍성한 샐러드가 완성되었다.

발레린은 창턱에 커다란 그릇을 놓고는 밖을 보며 먹었다.

그때 하인 한 명이 잔뜩 찌푸린 채 저택으로 걸어갔다. 항상 저택에 출근하는 하인은 저런 얼굴이었다. 억지로 끌려가는 듯 전혀 기쁘지 않은 얼굴.

어쩔 땐 정신이 어디에 있는지 멍한 표정뿐이었다. 대부분 하인들은 거의 같은 얼굴이었다.

“해인저 부인은 왜 잘생긴 하인을 뽑지 않을까? 그냥 얼굴이 잘생겼다고 뽑으면 어디 덧나나.”

발레린은 매일 같은 얼굴만 봐서 지겨웠다. 동화책에서 보던 잘생긴 왕자의 얼굴은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 없었다.

‘책에서 본 미남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걸까?’

발레린은 옅은 한숨을 내쉬며 우적우적 샐러드를 씹었다. 그렇게 발레린이 실망을 느끼며 정원을 보던 때였다. 멋진 마차가 멈춰 서더니 누군가 내렸다.

그때 발레린은 무언가 빛나는 것을 보았다. 일부러 거울로 햇빛을 반사해 만드는 인위적인 빛은 아니었다. 자연스레 시선을 끄는, 아니, 볼 수밖에 없는 얼굴이었다.

발레린은 멍하니 그 사람을 쳐다봤다. 유난히 밝은 금발이었는데 주변에 빛이 났다. 그것도 잔물결에 비치는 빛처럼, 보석같이 찬란했다.

어머니가 죽기 전 말했다. 사랑에 빠지면 온 세상이 별이 뜬 것처럼 밝아 보인다고.

발레린은 분명 느꼈다. 아니, 보았다. 그 남자 주변은 별이 뜬 것처럼 밝아 보였다.

발레린은 저도 모르게 넋을 놓았다. 여전히 남자의 주변에는 찬란한 빛이 둥둥 떠다녔다.

‘분명 사랑이야……. 어머니가 말한 사랑.’

발레린은 멍하게 쳐다보다가 문득 궁금해졌다.

‘누굴까?’

그 생각이 들자마자 남자는 곧 사라졌다. 저택에 들어간 모양이었다. 발레린의 심장은 미친 듯이 두근거렸다. 발레린은 곧바로 옆에 있는 그로프에게 물었다.

“그로프, 아까 그 사람 봤어?”

“인상을 잔뜩 찌푸린 사람을 말합니까?”

“아니! 그 사람이 저택으로 들어가고 한참 뒤에 온 사람 말이야!”

그로프는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말했다.

“금발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 금색 머리였어!”

발레린은 그 말을 하자마자 몸을 돌려서 책이 잔뜩 꽂힌 책장을 뒤적거렸다. 이리저리 책을 뒤적이던 발레린은 곧 그로프에게 뛰어와 책 한쪽을 보여 주었다.

“여기 보이지? 분명 이렇게 생겼었어!”

발레린이 보여 준 책장에는 한 남자의 옆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금발에 하늘빛이 도는 눈동자, 부드러운 입술 선에 날카로운 콧대. 그리고 그윽한 눈매는 전형적인 ‘잘생긴 왕자님’의 모습이었다.

“왕자님이 틀림없어!”

발레린은 확신했다. 이런 얼굴은 왕자님밖에 없다고.

세 시간 전, 왕자의 집무실에 보좌관이 들어왔다. 보좌관은 잔뜩 굳은 얼굴로 제르딘 앞에 고개를 조아렸다.

제르딘은 그가 무슨 일 때문에 온 건지 예상한 듯 날카로운 목소리로 물었다.

“또 죽었나?”

보좌관은 잠시 뜸 들였다가 입을 열었다.

“이번에는 포세든 백작이 딸기 셰이크 크림이 든 머핀을 먹다가 그렇게 되었다고 합니다.”

“가지가지 하는군.”

제르딘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요즘 들어 왕궁에서 독으로 죽는 사람이 늘어났다. 마치 유행처럼 사람이 죽어 갔다.

“내 최측근은 이번이 세 번째야. 안 그래도 하인들이 날마다 독으로 죽어 가는 마당에 이렇게 계속 가다간 독살국이라는 오명이 붙을 판이고.”

보좌관은 고개를 숙였다.

“면목이 없습니다.”

제르딘은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

“나를 조금이라도 옹호하면 다 죽으니.”

“아마도 배도스 공작 짓이 아닌가 합니다. 이번에 유명을 달리한 포세든 백작은 유일하게 왕자님의 피 검사를 미뤄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렇긴 하지만 그놈들이 늘 말하는 ‘증거’가 없어서 문제지. 분명 이렇게 일을 저지른 것을 보면 주변에 있던 증거를 모두 없애고 완벽히 꾸민 것 같은데. 내 말이 틀린가?”

“아니요, 왕자님 말씀이 맞습니다.”

“증거가 있으면 모르겠지만 아예 증거조차 인멸하니 더 교묘해졌어.”

제르딘은 주먹을 움켜쥔 채 겨우 화를 삭였다.

이렇게 막무가내로 일을 벌이는 이는 배도스 공작이었다. 제르딘의 유일한 친척으로 외숙부였다.

하지만 하는 짓이라곤 왕좌를 차지하기 위해 제르딘 측 사람을 제거하는 게 일상이었다.

“젠장!”

그 말에 보좌관이 놀라서 급히 말했다.

“왕자님, 이곳은 왕궁입니다.”

“아는데, 상황이 이렇게 됐는데 좋은 말이 나오겠어?”

보좌관은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제르딘은 그를 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배도스 공작은 예전부터 날 죽이려고 했으니 이런 건 모두 나를 고립시키기 위한 것이겠지. 경고이기도 하겠고.”

보좌관은 그저 난처한 얼굴로 제르딘을 살폈다. 제르딘은 잔뜩 굳은 얼굴로 말을 이었다.

“나를 옹호하는 사람들을 이렇게 만들겠다고.”

“배도스 공작이 독을 이용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대체로 독을 사용하면 칼로 직접 죽이는 것보다 증거도 거의 남지 않을뿐더러 조용하니까요.”

제르딘은 눈썹을 찌푸리며 이마를 만지작거렸다.

“독에 안 죽는 사람이면 모를까, 독에 다들 죽으니.”

그 말에 보좌관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는 잠시 생각하는 듯 가만히 있다가 말을 꺼냈다.

“사르티아 가문의 발레린 공녀가 독에 강하다고 들었습니다. 심지어 독을 가까이 해도 죽지 않는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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