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01. 초록빛 저주
햇살이 내리비치는 창가에서 제르딘이 말했다.
“발레린 사르티아, 공녀를 사랑하는 절대 일은 없을 겁니다.”
“그게 무슨…….”
“정확히 말하면 이 관계는 계약으로 성사되니 제대로 하자는 겁니다.”
“관계라고 한다면 어떤 걸 말씀하시는 건가요?”
“저는 공녀의 저주가 저에게 많은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도움이요?”
“지금 왕궁에서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독살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미 왕궁 주변에는 이에 관한 소문도 무성하고요.”
“그럼 저와 하겠다는 계약이…….”
“단순한 계약 결혼입니다. 저를 도와주는 대가로 말입니다.”
“굳이 그러지 않으셔도 저를 독 감별사로 임명하실 수 있을 텐데 왜 저와 결혼하려고 하시나요?”
“당신 가문이 그나마 도움이 될 것 같아서입니다.”
“…….”
“사르티아 가문은 여태껏 왕족파와 척을 지지 않으면서 나름대로 중립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점점 귀족파의 세력이 강해지는 추세이니 이제라도 제 편을 만들어 볼까 합니다.”
제르딘의 눈빛은 여유가 있으면서도 단호했다. 발레린은 잠시 멍하니 제르딘을 쳐다보다가 이내 정신을 차리고서 말했다.
“하지만 저는 지금도 방독면을 끼고 있는데, 저와 결혼하면 왕자님은 괜찮으신가요?”
제르딘은 고개를 끄덕이며 창문을 바라봤다.
“저는 피를 타고났으니 괜찮습니다. 공녀와 결혼을 한다면 주변에서 저의 평판이 더 나빠지지는 않을 겁니다. 독을 뿜는 저주에 걸린 사람과 결혼을 하니 모든 제국민을 품는다는 인식도 생길 수 있고, 독에 안전한 왕족이라고 알려질 테니 왕족의 위신도 높아질 겁니다.”
“하지만 왕족파들은 오히려 안 좋게 볼 수 있어요. 왕족의 피에 독에 걸린 저주가 묻으니까요.”
“어차피 아이를 가질 생각은 없습니다.”
“네?”
제르딘이 돌아봤다. 그의 눈빛은 꽤 진지하고 단호했다.
“배도스 공작이 몰락하면 이 결혼은 없는 일로 할 테니까요.”
“…….”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발레린이 고개를 들자 제르딘이 이어서 말했다.
“이 탑 안에 계속 갇혀 있을 것인지 아니면 저와 잠시라도 결혼을 해서 완전히 이곳을 벗어날 건지.”
“그럼 제가 이 탑을 나가면 살 곳은 마련해 주시는 건가요?”
“물론입니다. 저와 이혼한 후에도 먹고사는 데 지장 없게끔 해 주겠습니다.”
발레린은 옆에 있는 빨간 개구리 그로프를 쳐다봤다. 그로프의 눈빛도 발레린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어딘가 말이 쉽사리 나오지 않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발레린은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머릿속에는 지난날이 스르륵 스쳐 지나갔다.
사르티아 가문은 예로부터 부유했다. 넓은 영지와 마르지 않는 재산이 있었다. 더군다나 사르티아 부인은 왕국에서 가장 강력한 마법사였으며 미모는 말할 것도 없었다.
모두가 공작 부부를 완벽한 한 쌍이라고 칭하며 앞으로 태어날 아이를 기대했다.
그렇게 2년 후, 햇살이 유난히 밝게 비친 날이었다. 우렁차게 목소리를 울리며 사르티아 공작가에 아이가 태어났다. 사르티아 공작은 아이의 이름을 발레린이라고 붙였다. 햇살이라는 뜻을 가진 옛말을 이용한 이름이었다.
발레린은 태어나자마자 모든 사람의 눈길을 끌었다. 발레린의 아버지는 물론 하인들까지 잔뜩 기대하는 얼굴로 갓 태어난 아기를 보았다.
하지만 그들의 얼굴은 단숨에 굳었다.
“오…….”
“음…….”
“아…….”
모두 발레린을 보며 탄식했다. 어떤 이는 인상을 찌푸리기도 했다. 그중에서 안색이 가장 안 좋은 이는 발레린의 아버지 켄트릭이었다. 그는 발레린을 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기 입술이 초록색이라니.”
잔뜩 찌푸린 아버지의 얼굴과 다르게 발레린은 입을 벌리며 활짝 웃었다. 그러자 초록빛 연기가 나오더니 켄트릭의 얼굴을 덮쳤다. 켄트릭은 말을 할 새도 없이 곧바로 뒤로 넘어갔다. 주변에 있던 하인들은 놀라서 켄트릭을 부축해 방을 나갔다.
“공녀가 공작님을 죽였어!”
어떤 하인은 그렇게 외치기도 했다. 하지만 발레린의 어머니는 아기를 꼭 안기만 했다. 그녀는 어느새 텅 빈 방 안을 보며 중얼거렸다.
“발레린, 두고 보렴. 이건 저주가 아니라 행운이 될 테니까.”
하지만 안타깝게도 발레린의 어머니는 발레린이 다 클 때까지 두고 보지 못했다.
발레린이 일곱 살 때였다. 한창 세상에 궁금할 게 많은 나이였는데, 당시 발레린은 책을 통해서 궁금증을 해결했다. 그럼에도 도저히 머릿속에서 풀리지 않는 것이 있었다. 의문은 오히려 더 요상하게 발레린의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발단은 최근에 발레린이 본 동화책이었는데, 유난히 잘생긴 왕자님이 나왔다. 내용은 간단했다. 탑 안에 갇힌 공주님을 왕자님이 구해 주고 그들은 결혼을 하며 이야기가 끝난다. 늘 마지막은 이랬다.
두 사람은 사랑을 속삭이며 오랫동안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사랑. 왕자님이 공주님을 탑 안에서 구해 준 계기도 사랑이었다. 사랑이 뭘까? 의문은 넘쳤지만 답은 도저히 찾을 수 없었다. 그럴 때 항상 발레린은 따뜻한 어머니의 품속에서 물었다.
“어머니, 사랑은 뭔가요?”
어머니는 늘 다정히 말했다.
“사랑은 아름다운 거란다.”
“아름답다고요?”
“그래.”
“그럼 사랑은 눈에 보이는 건가요?”
“음, 사랑에 빠지는 순간은 눈에 보인단다.”
“어떻게요?”
“온 세상이 반짝이는 것처럼 밝게 빛나지. 아주 아름다워서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하는 경험이야.”
“어머니도 그걸 봤나요?”
발레린은 끊임없이 물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부드럽게 웃으며 발레린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그래, 그러니 네가 태어났지.”
“하지만 아버지는 저를 한 번도 보러 오지 않으시는데요.”
발레린은 어깨를 잔뜩 늘어뜨렸다. 그럼에도 어머니는 발레린을 포기하지 않았다.
“아직 네가 익숙하지 않으셔서 그렇단다. 그리고 넌 저주에 걸린 게 아니야. 이건 분명 저주가 아니라 능력일 테고.”
“그렇지만 하인들은 툭하면 저보고 저주에 걸렸다고 하는걸요.”
“발레린, 그건 모르고 하는 소리란다. 나도 예전에 그런 소리를 들었지만 지금은 멀쩡하잖니? 거기다 강력한 마력까지 가지고 있지.”
하지만 발레린의 어머니는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등졌다.
“독 중독입니다.”
의사의 견해였다. 어머니의 장례식은 성대하게 치러졌지만 발레린의 자리는 없었다. 발레린이 장례식장에 들어서자 하인들은 물론 아버지까지 기겁하며 그녀에게 외쳤다.
“얼른 저 애에게 방독면을 씌워라!”
하지만 어느 누구도 나서지 않았다. 결국 보다 못한 발레린의 아버지가 발레린에게 방독면을 던졌다.
“얼른 써라.”
발레린은 주섬주섬 방독면을 주워서 얼굴에 썼다. 그럼에도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쉬지 않고 말을 했다.
“저기, 초록빛 입술 좀 봐요. 어떻게 사람 입술이 초록색일 수가 있어요?”
“으, 불결하고 금방이라도 전염될 것 같아요.”
“그나저나 왜 여기까지 온 걸까요? 분명 사르티아 부인은 저 애 때문에 돌아가셨을 텐데.”
“그러게 말이에요. 만약 내가 아버지였다면 저 애를 어딘가에 보냈을 거예요.”
모두 사르티아 가문의 가까운 친척이었다. 그럼에도 발레린에게 먼저 다가오는 사람은 없었다. 오히려 그들은 발레린을 손가락질하며 소곤거렸다.
발레린은 이제 자신의 편이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당시 발레린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방독면에 가려져서 소리가 제대로 나가지 않았으니까. 거기다 발음도 새서 제대로 말이 통하지 않았다.
만약 방독면을 벗는다면 당장 내쫓겨서 어머니의 장례식은 참가하지 못할 것이므로, 발레린은 그저 가만히 있어야만 했다.
그리고 발레린은 보았다. 서로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해인저 모녀를.
발레린은 그들을 보자마자 속이 역해서 장례식장을 빠져나왔다. 그동안 모진 말을 들어도 참을 수 있었지만 어머니의 관을 보며 웃는 모습은 참을 수 없었다.
발레린은 방독면을 벗고 훌쩍이며 저택에 있는 호숫가를 걸었다. 사람이 별로 오지 않는 데다 은근한 안개가 낀 을씨년스러운 곳이었다. 거기다 날은 금방이라도 비가 올 것처럼 찌뿌듯했다.
하지만 발레린은 그곳이 좋았다. 가끔 어머니와 산책하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던 기억 때문이었다.
어머니는 항상 발레린이 새로운 것을 접하면 친절히 가르쳐 주었는데, 그곳에서 종종 보는 빨간 개구리를 독 개구리라고 설명했다. 독 개구리는 유일하게 발레린의 손에 닿아도 죽지 않는 생물이었다.
그렇게 발레린은 어머니를 생각하며 멍하니 호숫가를 걸었다. 한참 걷다가 발에 무언가 채었다. 발레린이 고개를 내리자 축축한 땅 위에 무언가 쓰러져 있었다.
평소 호기심이 많던 발레린은 자세히 보기 위해 상체를 숙였다. 다름 아닌 개구리였다. 그것도 하얀 배를 내놓으며 쓰러진 빨간 독 개구리.
‘죽은 건가?’
독 개구리는 발레린이 실수로 찼는데도 미동이 없었다. 하지만 가만히 보니 하얀 배 부분이 미세하게 팔딱거렸다. 발레린은 곧바로 손을 뻗어 개구리를 주웠다. 발레린은 어머니가 하던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발레린, 너는 아주 훌륭한 능력을 갖고 있단다. 넌 독기가 강해서 너와 통하는 생물은 네 덕분에 생명을 얻을 거야. 반면 너와 통하지 않는 생물은 생명을 잃을 수 있지.’
발레린의 어머니는 항상 그렇게 말했다. 발레린이 입김을 불면 식물은 금방 시들어 죽었기 때문이다. 그것 때문에 발레린은 실망하며 매일같이 울었다. 그래서 발레린은 자신을 받아들이는 게 무척이나 힘들었다. 저와 같은 인간은 자신과 맞지 않고 독기 가득한 것만 맞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독 개구리와 자신이 맞는 게 다행이었다.
‘제발 어머니 말씀대로 내 능력이 통해서 개구리가 살기를.’
발레린은 그렇게 속으로 빌면서 개구리의 배에 입을 맞췄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