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0화 〉 은밀한 독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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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렌 세력이 다른 세력과의 전쟁에서 승리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마자 제국의 거의 모든 세력이 우리를 견제하려고 들었다.
아렌 세력은 이미 제국에 있는 모든 세력 중 가장 강한 세력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크게 성장해 있었는데 그런 세력이 제대로 된 중견 세력을 먹어치우니 다른 이들에게는 발등에 불이 떨어진 수준의 충격이 다가왔을 것이다.
지금까지 가만히 있던 것 처럼 우리가 계속 가만히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세력들이많았을 텐데 길지도 않은 전쟁으로 정말 넓은 땅을 먹었다는 것에 대해불안감을 느끼고 있겠지.
거기에 더해서 남쪽에 있는 작은 섬나라를 먹으면서 해상을 거의 완벽하게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한테 느끼는 불안감이 더 클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런지 거의 모든 세력이 우리에게 반대 의사를 표명하고 나섰는데 이 정도면 제국을 모두 장악할 때 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는 헛된 생각이 들 수 밖에 없었다.
'어림 없는 소리지.'
군주들은 바보가 아니다.
제대로 된 정보통이 없는 세력이라면 우리가 선전포고를 먼저 당했고 이를 보복하는 차원에서 적을 섬멸했다는 말을 그대로 믿겠지만 조금이라도 제대로 된 생각을 가지고 있는 세력은 이 전쟁은 우리의 의도를 통해서 일어난 전재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을 것이고 그만큼 우리를 견제하고자 하는 마음이 커졌을 것이다.
"오랜만입니다. 프레스티아 헬링님."
"그래 오랜만이군."
다른 세력들이 우리에게 관심을 많이 보여주는 상황이 되면서 정말 오랜만에 프레스티아와도 독대를 할 수 있었다.
"단 둘이 있을 때에는 편하게 말해도 되지 않을까 싶은데 말이야. 황제가 되고 싶어서 발버둥 치는 모습이 참으로 우스워 보였다네."
"제가 황제가 되고 싶어 한다니 무슨 망발을그렇게 편하게 하십니까?"
우리 사이에는 거의 안부 인사나 다른 없는 말을 나눈 뒤 본론으로 들어갔다.
"아렌황녀님께서 황제로 가는 발걸음이 한 걸음 더 가까워 진 것 같군."
"아렌님께서는 반드시 황제의 자리에 오르실 겁니다. 지금이라도 무릎을 꿇고 아렌님께 복종하는 것이 나중에 백작정도의 자리를 유지할 수 있는 현명한 선택이 될 것입니다."
내가 무슨 말을 하든지 간에 프레스티아가 우리 쪽으로 전향하지는 않을 것임을 알고 있었다.
지금 제국에 존재하는 모든 세력은 스스로 황제가 되고 자 일어난 세력들이었다.
진짜로 아렌이 모든 세력을 누르고 황제가 될 수 있을 것 같은 상황이 다가오지 않는 이상은 다른 이에게 머리를 숙일 수 있는 이가 아무도 존재하지 않는다.
"글쎄, 지금 한참 세력을 키우고 있는 자가 너였다면 머리를 숙일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아렌에게 머리를 숙이고 싶지는 않군."
프레스티아의 말에 심장이 쿵하고 떨어지는 기분이 들었지만 겨우 심장을 잡아 제 자리에 놓을 수 있었다.
프레스티아는 야망가다.
내가 그녀의 세력은 완전히 궤멸시키고 체크메이트를 외치기 전까지는 그녀는 절대로 나한테 복종하지 않을 것이다.
저 말은 그저 나를 놀리려고 한 말일 뿐이다.
"이상한 소리 하시지 마십시오. 저는 아렌황녀님께 충성하는 몸입니다."
"잘도 그러겠군."
프레스티아가 피식하고 웃으며 나를 바라봤다.
"이런 얘기나 하려고 저를 찾아오신 겁니까?"
"그냥 아무런 얘기나 하고 싶었다. 정확히 말하면 네 얼굴을 보고 싶어서 찾아온 거지."
그녀가 누군가한테서 연애에 대한 강의를 받은 것이 분명했다.
다른 이에게 강의를 받은 게 아니라면 그녀가 저런 달콤한 말을 할 수 있을리가 없다.
한숨을 푹 내쉬면서 프레스티아를 바라보고 있으니 그녀가 귀여워서 미치겠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이게 꿈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꿀이 떨어지는 표정이었다.
"우리가 엮이기 위해서는 누구 하나가 무릎을 꿇어야 한다."
"압니다."
두 사람의 목적이 둘 다 통일 제국의 황제였으니 당연한 것이었다.
이 세상에 두 황제가 존재할 수는 없으니까.
"지금까지는 내가 무조건 너를 무릎꿇리고 싶었지만 가끔은 내가 너의 밑으로 들어가는 게 더 좋지 않을 까 싶을 때도 있다."
프레스티아의 말에 나는 겨우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지금 프레스티아는 함정을 파고 있는 것이었다.
그녀를 사랑하는 내 마음을 이용해 나의 방심을 유도하려고 하는 것이다.
프레스티아는 절대로 절대로 남의 밑에 들어간다고 할 인간이 아니었다.
"푸하하하. 농담이다 농담. 여자가 돼서 남자의 밑으로 들어간다니 정말 말도 안되는 일이지... 하지만."
그녀가 진중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이번에는 절대로 장난이 아니라는 것을 나한테 말하고 싶은 듯 보이는 강렬한 눈빛이었다.
"이 넓은 제국의 땅에 너와 나 밖에 남지 않는다면, 그때는 공동 황제의 자리에 올라서 결합하는 게 더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아무래도 서로에게 상처를 강하게 입히면 수하들이 들고 일어설 테니 말이다."
프레스티아의 말은 진심이었다.
"푸흡."
나는 약한 소리를 하는 프레스티아 앞에서 대 놓고 비웃음을 지어보였다.
"우리 프레스티아님이 정말 약해지셨군요. 그런 약한 마음을 가질 거라면 당장 저한테 복종하십시오. 공동 황제? 저는 그 딴 것이 하고 싶어서 출사표를 던진 것이 아닙니다. 저는 당신을 지배하기 위해서 세력을 펼쳐나가고 있는 겁니다. 그런 약한 마음을 가질 거면 대체 왜 군주로 존재하시는 겁니까."
비소가 가득 섞인 말에 프레스티아가 피식하고 웃었다.
"그래, 그래야 내 배우자가 될 수 있는 남자라고 할 수 있지."
우리가 결혼할 수 있는 가능성은 두 가지다.
프레스티아가 황제가 되던가 내가 황제가 되던가.
혹시라도 다른 세력이 황제가 되면 결혼은 꿈으로만 남겨둬야 하겠지만 우리는 그런 미래는 상정해 두지 않았다.
서로의 적이 될 수 있는 건 오로지 적 뿐이다.
"달콤한 말 그만하시고 실무적인 이야기를 좀 나누지 않겠습니까? 수하들한테 해야 할 말이 있으니 말입니다."
"그래, 얼마전에 너희 세력에 찾아간 무인이 하나 있었지?"
셰토리아 입장세는 최대한 안들키게 나한테 찾아왔다고 생각했겠지만 프레스티아는 그녀의 행태를 완벽하게 알고 있는 것 처럼 보였다.
"네, 하나 있었습니다. 셰토리아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소녀였죠."
"네 눈에는 그녀가 어떻게 보이나."
"강한 힘과 야망을 가지고 있지만 아직 그것들을 다루기에는 부족해 보입니다."
"그래도 음지에서 지원해 준다면 충분히 그럴듯할 세력을 가질 수 있겠지."
프레스티아가 씩하고 웃으면서 나를 바라봤다.
일반적인 사람이 봤다면 음흉하고 또 악한 미소일 뿐이었지만 나한테는 천사같은 미소가 따로 없었다.
"나는 그녀를 독립시키고 세력을 쌓도록 할 것이다. 셰토리아는 누군가의 밑에 있을 때 보다 홀로 설 때 더 강한 존재야."
"그 힘으로 다른 세력을 약화 시키고 싶으신 겁니까?"
"정확하다."
셰토리아를 비유하자면 폭탄과 같은 여자였다.
손에 들고 던지면서 사용하면 주군에게도 위험부담과 피해를 주는 존재였지만 아예 멀리 설치하면 주인에게는 피해를 하나도 주지 않고 다른 이들에게만 피해를 줄 수 있는 존재였다.
그 와중에 홀로 세우는 게 훨씬더 성장성이 좋으니 그녀를 손 아래에 두고 쓰는 건 비효율적인 일이었다.
"그걸 저한테 말씀하시는 이유가 뭡니까?"
"셰토리아를 너희 세력과 아주 멀리 떨어진 곳에 배치해 주겠다. 셰토리아가 가지고 있는 성정상 너희가 있는곳 까지세력을 펼칠 수 있을 확률은 없다고 보는 게 맞겠지."
"저한테 대가를 내라고 하시는 겁니까?"
"그렇다."
프레스티아가 팔짱을 끼면서 나를 내려다 봤다.
"만약 대가를 내지 않는다면 저희 바로 옆에 두기라고 하실 겁니까?"
"바로 옆까지는 아니더라도 언제든지 너희를 침공할 수 있는 위치에는 둘 수 있지."
"허허..."
참으로 발칙했다.
자신의 계획을 나한테 그대로 말할 때 부터 어느 정도 눈치를 챘어야 했었는데 저렇게 당당하게 나한테 대가를 내놓으라고 하는 프레스티아의 모습에 자연스럽게 한숨이 나왔다.
"도대체 얼마나 큰 대가를 받아가시려고 하시는 겁니까?"
"그렇게 대단한 대가는 아니다. 적어도 너희 세력에 큰 피해가 가지는 않을 것임을 약속하지."
프레스티아의 표정은 굉장히 당당했지만 상대가 상대다 보니 그런 표정만 보고 믿을 수는 없었다.
'그래도 일단 믿는 척을 해줄까?'
어차피 내 생각보다 더 한 대가를 내밀면 그 때가서 따로 협상을 하면 되는 일이다.
어차피 독대니까 나는 그런 말 한 적 없다고 딱 잡아때면되고.
"알겠습니다. 제안을 받아가죠."
"그러면 대가를 받겠다."
프레스티아는 그대로 나한테 손을 뻗더니 바로 나를 들어서 입술을 내 입술에 박았다.
그녀와의 강렬한 키스는 참으로 달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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