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8화 〉 얜 또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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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인간의 성품은 성장할 수 있다고 믿는다.
아무리 타고난 성정이 악하다고 해도 주변의 상황이 그를 선한 방향으로 이끌어 준다면 아무리 악한 성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고 해도 주변의 환경이 반드시 착해져야만 하는 환경으로 형성돼 있다면 사람에 따라서 성품 그 자체가 성장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문제는 그렇게 성장한 인품과는 별도로 천성이라는 건 남아 있다고 생각한다.
결국 인품을 성장시키는 것은 주변의 환경인데 그 환경이 좋은 인품이라는 요소를 필요로 하지 않는 환경이라면 충분히 성장할 수 있다.
여기서 눈여겨 봐야 할 것은 좋은 인품을 필요로 하는 환경이라는 것이다.
'역시 천성은 안 변하나보네.'
아렌이 어릴 때 부터 어느 정도 티가 나긴 했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해서 독점욕을 느끼고 상대를 지배하려고 하는 모습을 보이는 걸 어느 정도 해결했다고 생각했는데 스스로에게 힘이 생기니 그런 제한이 사라진 것 같았다.
"그냥 아렌황녀님을 보고 싶어서 왔습니다."
아직 본성을 완전히 드러낸 것도 아니고 제대로 된 독점욕을 보여주고 있지도 않았지만 언젠가는 터질 거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게 지금이 아니니 상관없어.'
어차피 아렌은 곧 죽을 운명, 이제와서 신경쓴다고 해도 달라지는 건 없겠지.
'방법을 좀 뒤틀어야 겠군.'
아렌이 가지고 있는 힘을 약화시키기 위해서 그녀와 독대를 신청한 것이었지만 그녀의 천성이 천천히 발현되고 있는 걸 본 이상 다른 방법을 사용하면 정말 좋을 것 같았다.
내가 가지고 있는 지성이 어느 정도 힘을 발휘했는지 미리 방법을 생각해 두고 온 것도 아닌데 꽤 쓸만한 방법을 떠올릴 수 있었다.
"아렌 황녀님께 한 가지 부탁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무슨 부탁을 그렇게 어렵게 하십니까? 저는 플레아 아이데스님의 딸이나 마찬 가지입니다. 딸에게 부탁을 하는 대부가 어딨겠습니까."
내가 아렌화녀의 대부 취급을 받는다고 해도 실제로 그녀를 키워 준 것도 아니고 나이 차이도 그렇게 많이 나는 건 아니었다.
그런데 굳이 대부라는 걸 언급한다는 건 나와 그만큼 가까운 관계에 있고 싶다는 그녀의 속마음이 튀어나왔다고 해석해도 되겠지.
"아렌황녀님이 성장하시더라도 저를 가장 중히 써 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아렌의 독점욕이 시동을 걸고 있다는 걸 발견했다면, '아, 독점욕이 발현되고 있구나.' 하고 멍하게 있는 게 아니라 그걸 제대로 써 먹을 방법을 찾아야 한다.
나를 중히 써달라.
이는 내가 명백하게 아렌보다 아래에 있다는 말이었다.
지금까지는 나를 믿어 달라는 식으로 아렌을 조종해 왔지만 이제는 아렌의 머리가 컸으니 그녀의 권력욕을 이용해 역으로 그녀를 지배하는 방식을 사용할 수 있었다.
마치 그녀가 나보다 위에 있는 사람인걸로 착각하게 해서 나에게 더 편하게 일을 맡기게 하는 방식인데 그녀 또한 나한테 독점욕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상당히 잘 써먹을 수 있는 방법이었다.
"그건 당연한 것 아닙니까. 지금의 제가 있는 이유는 플레아 아이데스님 덕분인데 제가 어찌 대부님을 중히 쓰지 않을 수 있습니까."
"죄송합니다... 요즘 아렌님 옆에 다른 이들이 많이 오는 걸 보고 불안감을 느낀 모양입니다."
나는 내 성별인 남성을 최대한 이용했다.
안심했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살짝의 불안감을 섞으면서 그녀로 하여금 나에게 더 큰 동정심을 가지도록 유도했다.
동정심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강력한 힘으로 작용할 수 있었고 내 예상대로 아렌은 굳센 표정을 지으면서 나를 꼭 안았다.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한테는 언제나 대부님이 최우선입니다. 대부님이 원하신다면 제 밑에 있는 이들을 일차적으로 대부님을 거친 뒤 연결되게 할 수도 있습니다."
오호라, 이 것 까지는 바라지도 않았는데.
"아닙니다. 그건 제가 아렌황녀님의 권력을..."
"괜찮습니다. 저와 대부님의 관계 아닙니까."
아렌은 자기가 통이 큰 것 처럼 굴면서 어깨를 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고 나는 알 수 있었다.
다 큰 것 처럼 굴고 있지만 아직 머리는 어린애구나 하고.
저건 허세의 일종이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힘을 제대로 알지도, 계산하지도 못하고 마음에 드는 남성에게 잘보이기 위해서 스스로 손해를 감수하는 짓이다.
그녀의 권력이 실제로어마어마하게 강해서 그런 손해를 보더라도 티도 나지 않는 상황이라면 모를까 그녀가 가지고 있는 힘은 그렇게 강력하지 않다.
아렌과 나의 관계 보다 훨씬 끈끈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시에린한테도 전권을 넘겨 주는 일이 많지 않은데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인사권을 나한테 넘긴다고?
"안됩니다. 이제 슬슬 아렌황녀님도 독립된 모습을 보여주실 필요가 있습니다."
엄처나게 구미가 당기는 제안이었지만 나는 그 제안을 받아 들 수 없었다.
다른 이들에게 의심을 당하는 건 둘째 치고서라도 스스로 나에게 인사권을 넘기는 모습은 아렌세력의 다른 이들로 하여금아렌 황녀가 가지고 있는 힘 그 자체를 낮게 보게 만들 수 있을 정도의 악수기 때문이다.
"그러면 명목상은 제 부하로 하되 실제로는 대부님이 관리하는 방식으로 가시면 되겠네요."
해맑게 웃는 아렌을 보고 생각했다.
'이 새끼 뭔가 꿍꿍이를 피우고 있는 거 아니야?'
아무리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해도 아렌은 이레아 한의 제자였다.
그녀에게 군주로서 철저하게 교육받은 그녀가 이런 뻔한 악수를 저지른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일단 철저하게 조사해야 겠네.'
혹시라도 이상한 짓을 저지르고 있으면 죽을 각오를 해서라도 막아야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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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제국 전체에 부족했던 식량은 시간이 지날 수록 천천히 회복해서 가을이 되자 완벽하게 회복됐다.
각자 자신의 땅에서 수확한 식량을 철저하게 보관해 둬 작년 같은 인재가 찾아올 걱정은 안해도 됐다.
'이제 슬슬 새 전쟁이 터질 때가 됐는데 말이야.'
몇개월 정도 되는 짧은 시간 동안 수많은 세력들이 각자의 크기를 키웠다.
가장 강하다고 평가 받은 세력도 식량을 비축하면서 언제든지 전쟁을 치룰 수 있는 준비를 완료했고 중견 세력들도 언제든지 자신의 이득을 위해서 움직일 준비를 마쳤다.
실제로 많은 세력들이 다시 전쟁을 치룰 정도로 다시 난세의 격전으로 돌아가려고 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나에게 손님이 하나 찾아왔다.
"셰토리아라고 하셨나요?"
"말씀편하게 하셔도 됩니다. 저는 일개 장수일 뿐이니까요."
프레스티아 쪽에서 건너 온 이 여성은 놀랍게도 사신이 아니라 개인으로서 나한테 다가온 것이었다.
한 세력의 장수가 개인 적으로 다른 세력을 찾아오다니.
정말놀라운 일이었다.
'셰토리아? 뭔가 익숙한 이름이긴 한데...'
셰토리아라고 하면 저번 전쟁에 프레스티아의 세력에 들어 온 무장으로서 빠른 성장력과 강인한 정신력으로 유명한 장수였다.
그 성장세를 보면 전쟁 중에 자기 여동생을 잃은 남성 셰톨을 생각하게 했다.
'오빠랑 여동생의 운명이 바뀐 건가?'
이 세계는 남녀역전 세계였으니 두 사람의 역할이 바뀌었다고 해도 크게 이상한 것은 없었다.
"아닙니다. 저는 존댓말이 편해서 말이죠."
고요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그래서 저희 세력에는 왜 찾아오셨습니까?"
"당신의 밑으로 들어가고 싶습니다."
그녀가 다짜고짜 무릎을 꿇었다.
무릎을 꿇어도 의자에 앉은 나 보다 시선이 살짝 높은 게 키 포인트 였다.
"당신은 이미 프레스티아 헬링님께서 낙점 지으신 장수인 걸로 알고 있는데요. 그리고 개인적인 원한도 있다고 하시지 않으셨나요?"
"개인 적인 원한은 해결한지 오래입니다. 저는 더 강한 군주의 밑에서 제실력을 키우고 싶습니다."
그녀의 눈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녀가 셰톨의 운명을 대신 타고 났다면 그녀의 역할이 뭔지 금세 알 수 있었다.
'아무것도 가지지 않고 태어나 황제를 노리는 자.'
강력한 야망과 더불어 다 방면에 두루두루 재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어지간히 시드가 안풀리는 게 아닌 이상 쓸만한 수준의 세력은 키울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게 고작이지.'
그는 가지고 있는 야망이 너무 높았다.
답이 없는 상태에서 다른 이가 황제가 될 것 같은 모습을 보이고 있으면 그에게 충성해서 적당한 자리라도 얻어낼 생각을 해야지 그를 이겨먹고 황제가 되려고 하는 성격 탓에 황제가 되지 못하는 거의 모든 시드에서 목이 잘려 죽였다.
그녀가 셰톨의 운명을 그대로 타고날지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프레스티아를 버리고 내쪽에 붙겠다는 걸 보면 확실히 반골의 기질이 있어보였다.
'죽일 순 없어.'
아무리 먼저 우리 세력으로 찾아왔다고 해도 그녀는 기본적으로 프레스티아의 인재였다.
"돌아가세요. 저는 은혜도 모르고 주군을 배신한 이를 밑에 들이고 싶지 않습니다. 지금 돌아간다면 프레스티아 헬링께는 따로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에프로트는 그만한 은혜가 없었으니까 괜찮다고 자위하며 그녀를 내려다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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