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6화 〉 스승의 선물
* * *
라일라의 목 울대가 떨리고 어깨가 덜덜 떨리는 게 느껴졌다.
말로는 자신의 스승을 죽여야 한다고 했지만 진짜로 이레아한이 죽기를 원하는 것 같진 않았다.
'상황이 복잡해 지네...'
차라리 라일라가 이런 말을 하지 않고 그냥 이레아한의 위험성을 모르는 상태로 넘어갔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자기 스승을 죽여야 한다고 말하는 라일라의 용기는 가상했고 정말냉혈한적인 모습이었지만...
'이러면 맘 편하게 못 죽이잖아.'
아무리 제자인 라일라가 죽여야 한다고 해도 저렇게 덜덜 떨고 있으면 나중에 무슨 문제가 발생할지 모른다.
지금이야 비장한 각오로 이레아한을 죽여야한다고 말했지만 나중엔 최종 결정을 한 나를 증오할지도 모르지 않는가.
'후우...'
얘를 어떻게 해야하지?
"이레아 한을 왜 죽여야 하지?"
"저희 스승님이 주군이 가시는 방향에 방해가 되기 때문입니다."
"죽이지 않으면 막는 게 불가능할 정도로?"
내 말에 라일라의 눈이 덜덜떨리기 시작하더니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몇 번을 계산해봤습니다. 제 입으로 이런 말을 하기 싫어서 스승님을 죽이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을 수도 없이 찾아봤지만 그런 방법은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라일라의 목소리는 어울리지 않게 울먹거렸다.
함부로 이레아한을 죽였다가는 부작용이 있을 수 밖에 없는 목소리였다.
"후우..."
'어떻게 해야하지?'
일단 이레아한을 죽여서 얻을 수 있는 이득과 손해를 따져봐야 한다.
이레아 한을 죽여서얻을 수 있는 이득이 라일라의 불안정성이라는 커다란 손해를 가지고 갈 수 있을 정도라면 이레아 한을 죽이는 데 딱히 제한을 걸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그 반대라면?
라일라의 불안정성 이레아 한을 죽여서 얻는 이득 보다 크다면?
이레아 한을 죽이지 않는 게 오히려 장기적인 관점에서 볼 때 좋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건 너무 쫄보 같은 일이야.'
어차피 이레아한을 죽였을 때 얻을 수 있는 이득을 더 키우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렇다면 라일라의 불안정성을 줄이면 되는 일 아닌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라일라에게 다가갔다.
나보다 머리 하나 정도 큰 그녀가 서글픈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나와 만난 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약한 모습을 보인 적 없던 그녀가 이렇게 처량한 표정을 짓고 있는 걸 보면 이레아 한을 죽인다는 것이 그녀의 인생에서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일인지 알 수 있었다.
"라일라."
별다른 말 하지 않고 라일라는 꼭 안았다.
"주군된 입장에서 수하에게 수하의 스승을 죽이라는 말을 하고 싶진 않아."
거짓말이다.
그런 말을 돌려해서 오히려 라일라에게 부담을 지게 하는 방식으로 대화를 이어나가고 있다.
"다시 한 번 계산해봐. 이레아 한 경을 죽이는 게 최선이야?"
"... 최선입니다. 저희 스승님을 살려서 데려갔을 때 저희가 얻을 수 있는 이득이 더 이상 없습니다. 저희 스승님은 존재만으로도 손해가 되는 사람입니다."
"그건 네 관점에서 봤을 때나 그런거고."
나는 온 힘을 다해서 라일라를 안았다.
흑마법사에 의한 저주가 아직도 남아있는데다가 내가 가지고 있는 힘 자체가 그렇게 대단한 편이 아니라서 제대로 된 압박을 느끼진 못했겠지만 그래도 주군으로서 수하를 걱정하고 있다는 티 정도는 내줘야 하지 않겠는가.
"네가 괜찮겠어? 이레아 한 경을 죽임으로서 네 정신이 불안정해지고 자꾸 죄책감을 가진다면 나는 네가이레아한 경을 죽이자고 몇번을 말해도 거절할 수 밖에 없어. 나도 이레아 한 경을 죽이는 게 조금 껄끄롭기도 하고."
문장 전체가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거짓말 보다 진실인 걸 더 찾기 힘들 정도로 거짓말 범벆인 문장이었지만 내 인생 전체가 거짓말이었기 때문에 양심의 가책이 밀려온다거나 하진 않았다.
오히려 당당했다.
내 마음까지 한 번에 속여 버리면 되는 일이었으니까.
"..."
라일라의 눈빛이 복잡해졌다.
"조금 생각해 볼 시간을 주시겠습니까?"
나는 라일라의 등을 툭툭 두드려준 뒤 그녀에서 떨어졌다.
이제 결론은 라일라가 낼 것이다.
자신의 마음을 이기지 못해서 이레아한을 죽이지 말라고 한다면 그녀의 말에 따라서 최대한 온건하게 이레아 한을 다루면 되는 일이고 마음을 다잡고 이레아한을 죽이고자 한다면 그에 따르면 되는 일이었다.
나는 라일라를 믿었다.
그녀는강한 사람이니 한 번 선택한 것을 무르진 않을 것이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스승을 자신의 손으로 죽이는 것이니 그 양심의 가책을 이겨낼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이 없다면 애초에 죽이자는 말을 하지도 않았겠지.
"주군."
아니나 다를까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았을 때 결연한 표정을 지으면서 다시 찾아왔다.
아까와는 달랐다.
어깨를 떠는 것도 아니었고 근심과 걱정이 차 있는 것도 아니었다.
마음을 독하게 먹고 자신의 스승을 죽이고자 하는 결연한 의지가 돋보였다.
'난세는 난세네...'
자기가 황제가 되기 위해서도 아니고 주군을 황제의 자리에 올리기 위해서 스승을 죽이는 미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레아한을 죽여야 할 것 같습니다."
나는 그녀의 결연한 의지를 이기지 못하겠다는 듯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 연기는 이미 생활연기로 자리 잡은 지 오래라서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바로 튀어나왔다.
"알았다... 이레아 한을 죽일 수 있는 최선의 방안을 연구해보지."
이레아 한은 죽었다.
라일라가 그녀의 스승인 이레아 한을 죽이자고 첨언한지 4일만의 일이었다.
나는 마법재해가 일어날 것이 분명한 장소에 이레아한을 보냈고 이레아 한은 마법 재해에 휩쓸려 죽었다.
얼마 전 나와 이레아 한이 독대를 나눴다는 것을 근거로 사람들이 나를 의심하기도 했지만 한낱 인간한테 마법 재해를 일으킬 수 있는 능력이 있을 수도 없고, 하다 못해 재해를 읽는 것도 분명할 테니 의심정도는 여유롭게 흘려 넘길 수 있었다.
"이레아 한경..."
나는 그녀가 죽은 장소까지 직접 찾아가 무릎을 꿇고 그녀의 죽음에 대해 눈물을 흘렸다.
전혀 충성하지 않았던 황제의 죽음에도 꺼이꺼이 울 수 있던 나였는데 그래도 같은 세력에서 지낸 이의 죽음에 눈물을 흘리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눈물을 줄줄흘리면서 고인의 명복을 비는 내 모습에 내가 이레아 한을 고의적으로 죽였다는 헛소문은 쏙하고 내려갔다.
"흐윽... 흐끄으윽..."
내가 엉엉 울고 있자 나를 따라온 라일라 역시 꺽꺽 거리면서 울기 시작했다.
그 눈물이 너무 서러워서 내가 울기 더 쉬워지기도 했다.
사람의 감정이라는 것은 생각보다 전염이 쉬운 물건이니까.
아무튼 그렇게 한바탕 울어주고 이레아 한을 영지에서 가장 좋은 곳에 묻어줬다.
아렌을 가르친 스승이니 대우가 박하지는 않아야 했다.
아렌 역시 스승의 죽음에 눈물을 흘렸지만 아렌은 이레아 한 보다는 나에 대한 의존도가 더 높았기 때문에 우리처럼 꺼이 꺼이 울진 않았다.
"후우... 후우..."
라일라는 생각보다 빨리 정신을 차렸다.
아니 정신을 차렸다기 보다는 슬픔을 빨리 이겨냈다.
오히려 강인한 눈빛을 지으면서 그 의지를 불태웠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내가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그저 수하가 의지를 불 태우고 있다는 것을 흡족하게 바라볼 뿐.
*******
이레아한이 다른 지역으로 파견나가기 하루 전, 누군가가 그녀의 방문을 두들겼다.
똑똑
"들어오거라."
노크 소리만으로 상대의 정체를 알아낸 이레아한이 낮게 읍조렸다.
"저 인줄 아셨습니까?"
문을 열리자 라일라가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애제자의 발소리도 모른다면 스승 실격 아니겠느냐. 이 늦은 밤엔 왠 일이냐?"
"그냥 스승님이 보고 싶어서 왔습니다. 내일 부터 다른 곳으로 발령받으시지 않습니까."
이레아 한이 라일라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내가 죽을 때가 됐나 보구나."
이레아 한의 말에 라일라가 무심코 떨리려는 자신의 몸을 꾸욱 하고 눌러 막았다.
"그게 무슨 소리십니까? 스승님은 아직 정정하시지 않습니까?"
"누가 자연사로 죽는다고 했느냐? 자기 스승을 죽이려는 년이 혀가 길구나."
이레아 한의 말에 라일라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괜히 이레아 한을 찾아와서 들킨걸까?
주군한테는 뭐라고 말하지?
"너무 걱정하지 마라. 네 생각대로 순순히 죽어 줄테니."
"네?"
라일라가 당황해서 이레아를 바라보니 그녀는 평화롭게 웃으며 라일라를 바라봤다.
"내 제자가 야망 없는 자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는 다는 건 알고 있다. 아이데스 그자의 능력이라면 슬슬 아렌님께 권력을옮겨야 할 타이밍이라는 걸 모르지 않았을 테니 아마 스스로 황제가 되길 원하겠지. 긴 역사를 가진 황실의 역사가 끊어지겠어."
이레아 한이 혀를 끌끌 찼다.
"그런데 왜..."
"지금 까지 네가 하고 싶었던 걸 다 막은 못난 스승 아니냐. 내가 없어도 아렌님은 잘할 수 있으실 거다. 방심하면 안될걸?"
라일라는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저를 도와주실 거면 죽으시지 말고 지금이라도 주군의 밑에..."
"말도 안되는 소리 하지 마라!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너를 위해서 죽어주는 것 뿐이지 황실을 버리고 아이데스의 밑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니."
잔뜩 일그러진 이레아의 모습에 그녀는 더 이상 말을 이어갈 수 없었다.
"스승의 마지막 선물이라고 생각하라."
라일라의 눈에선 어느새 눈물이 질질 흐르고 있었다.
어쩌다가 자신이 이런 상황에 처하게 됐을까?
차라리 플레아를 배신할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또 이상한 생각을 하는 구나."
이레아 한이 라일라에게 다가가 그녀를 꼬옥 안아 줬다.
라일라가 무심코 그녀를 밀어 내려고 했지만 이레아 한은 자연스럽게 라일라는 자신의 품 안에 완벽하게 고정했다.
"스승이 마지막으로 제자를 안아 보겠다는 데 그렇게 거부해서 쓰겠느냐?"
이레아 한이 라일라를 꼭 안았다.
"내가 죽는다고 해도 죄책감을 가지지 마라. 나를 죽인 것은 네가 아니라 나다. 내 제자를 위해서 단 한 번 스스로 목숨을 끊길 선택한 것 뿐이다."
이레아한이 라일라의 등을 쓰다듬었다.
"그러니 너는 나의 죽음은 잊고 네 주군에게 최선을 다해 봉사해라. 그게 내가 알려준 참모의 역할이다."
부드럽게 등을 쓰다듬어 주는 이레아한의 모습에 라일라는 눈물을 터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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