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1화 〉 누명이에요!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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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우..."
내가 깊은 한숨을 내뱉자 플린이 억울하다는 듯 나를 바라봤다.
"저 진짜 강간 같은 거 안했어요! 아이데스님 말만 믿고 어떻게든 멋진 기사가 되려고 노력하고 있었단 말이에요!"
플린이 기사지망생이 되면서 가장 먼저 바뀐 게 나를 향한 말 버릇이었다.
사적인 자리에서야 물론 오빠 동생하지만 지금은 내가 그녀를 벌하려고 부른 자리였기에 그녀는 철저하게 존댓말을 사용해야 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
"그래, 강간을 안했는데 왜 너한테 강간당했다는 피해자가 있을까?"
"저한테 누명을 씌우려고 하는 거 아닐까요?"
플린에 눈에 담긴 억울함은 진심이었다.
사실 플린의 눈빛을 보고 그녀의 억울함을 알아채지 않아도 애초에 플린은 자신의 죄를 숨기려고 하는 성격이 아니다.
지금보다 여성의 위상이 조금 더 떨어지는 원작에서도 플린은 남자를 강제로 강간한 뒤에는 굉장히 뻔뻔한 모습을 유지했다.
내가 플레아 아이데스의 동생인데 평민 남성하나 못 따 먹는 게 뭐가 죄냐는 말은 입에 달고 사는 인간이었다.
그런 인간이 어릴 때 부터 방향을 잘 잡아주고 아렌황녀라는 엄청난 재능과 배경을 가진 이를 옆에 두면서 천천히 겸손해져 지금의 모습까지 왔는데 진짜로 남자를 겁탈하고 저렇게 억울함을 표현하는 건 이상한 일이 맞았다.
"누가 너한테 누명을 씌우는데, 왜?"
플린이 남을 강간했을 리없다는 걸 거의 사실로 받아들이면서도 괜히 그녀를 놀려 먹기 위해 장난을 한 번 쳐 봤다.
일주일에 일정시간을 정해두고 만나기는 하지만 서로 바빠지면서 이야기를 나눌 시간이 급격하게 줄어들었기 때문에 기회가 왔을 때 장난을 좀 쳐놔야 한다.
"그건... 저도 잘 모르겠는데 아무튼 저는 진짜로 남자 겁탈한 적 없어요. 그리고 저 아직 엄청 어리거든요!"
"실제 나이는 어린 데 몸이 안 어리잖아."
어지간한 무인들이 다 성장이 빠른 것 처럼 플린도 제대로 기사 지망생이 되면서 굉장히 빠르게 성장해 지금은 나 보다 더 큰 키를 가지고 있다.
벌써 나보다 머리 하나 이상 더 큰 아렌황녀랑 비교하면 작은 키가 맞았지만 일반적인 남성 입장에서 보면 충분히 자신을 겁탈할 수 있는 키가 나온다.
그리고 피해자의 진술에 따르면 플린은 강간 같은 직접 성행위가 아니라 자신을 유린하고 괴롭히는 모습을 보여줬다고 한다.
"하지만... 그래도..."
플린이 정말 억울하다는 듯 나를 쳐다보는 모습을 보고 더 이상 장난은 그만하기로 마음먹었다.
더 이상 장난쳤다가는 진짜로 울 것 같았으니까.
"알았어. 오빠는 우리 플린 믿어."
"오빠아..."
내가 먼저 오빠라는 단어를 꺼내자 그녀가 눈물을 삼키면서 나를 바라봤다
"상대한테 죄가 있다는 걸 입증하게 만드는 게 원래 법정 매너긴 한데 상황이 상황인 만큼 네 무죄를 입증해야 할 것 같아."
부드러운 얼굴로 말하고 있지만 나는 지금 엄청 화 나 있는 상태다.
차라리 플린이 다른 이를 겁탈했다면 플린을 혼내면 되는 일이지만 누군가가 플린에게 누명을 씌웠다는 생각을 하니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아마 플린을 노린 건 아니겠지.'
플린의 인생을 망치게 하기 위해서 그녀에게 누명을 씌웠다기 보다는 나에게 타격을 입히기 위해서 플린을 건든 것일 확률이 높았다.
내가 아무리 잘한다고 해도 내 동생이 양아치라면 다른 이들에게 보이는 점수가 크게 깎여나갈 수 있었으니까.
게다가 그 시일내에 황실파의 기강을 다지려고 하는 중이었기에 지금 시기에 플린에게 누명을 씌운 것은 정말 타이밍 좋은 공격이라고 할 수 있었다.
"무죄를... 어떻게 입증해? 주변에 아무도 없었다고 했고... 나한테 딱히 알리바이가 있는 것도 아니었는데."
"걱정하지 마라 동생아 이 오라버니가 이런 상황을 충분히 대비하고 있었으니까."
지금이야 플린이 정신을 차린 것 처럼 굴고 있지만 태생이 태생이다 보니 갑자기 폭발해서 이상한 방향으로 가버릴 지 모른다는경계심을 계속 가지고 있었다.
언제 플린이 폭주해서 이상한 일이 발생할 지 모르니 그녀가 범죄를 저릴렀을 때 빼도 박도 못하게 하기 위해서 그녀의 옆에 늘 대기 시켜뒀던 요원이 하나 있었는데 그 요원이 플린의 무죄를 입증해 줄 것이었다.
'물론 내가 플린이 무죄라고 말하면 자기 동생이라고 끼고 도나면서 엄청 뭐라고 하는 존재들이 있겠지.'
그리고 그 존재가 스파이일 것이다.
되도록이면 스파이가 없는 세력이 좋은 세력이지만 수많은 세력에서 들어오는 스파이들을 전부 막을 수는 없다.
플린에게 겁탈당했다는 피해자는 이지역에서 오래 살아온 사람이고 정말 연기를 잘하며 모든 회유가 먹혀 들지 않았다고 하니 스파이를 의심할 수 밖에 없었다.
만약 플린의 무죄를 받아들이지 않는 존재가 없다면 그건 그것 나름 대로 플린이 무죄로 넘어가게 되니 손해도 없다.
'일단 피해자 부터 만나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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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들오들
내가 방 안으로 들어가자 덜덜 떨고 있는 한 남성이 보였다.
나이는 나 보다 살짝 어려보였는데 그 말인 즉 아직 성인은 아니라는 뜻이었다.
"아... 아이데스님..."
내가 그를 잘못 대우하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딱히 어둡고 추운 곳에 가둔 것도 아니었고 난방 충분히 잘 되고 넓고 밝은 방에 그가 있게 했다.
하지만 그는 나를 보고 격한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그가 진짜로 플린에게 겁탈당했다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다.
자기 동생이 잘못을 저질렀지만 그 사건을 뭍으려고 하는 귀족은 어느 사회에서나 있을 법한 일이었으니까.
근데 뭔가 이상했다.
내가 확인한 바로는 플린은 절대로 이상한 짓을 하지 않았는데 왜 저렇게 공포에 떠는 거지?
'뭔가 느낌이 세한데.'
연기가 아닌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누구한테 섭외가 됐든 뭐가 됐든 남자의 정체는 일단 이 지역에서오래 살아온 농민이었다.
그냥 얼굴이 조금 잘생긴 정도의 농민.
나도 군주 짬밥이 있다.
제대로 된 군주로서 거짓말을 연습한 존재들의 진의는 완전히 파악하지 못하는 경우가 간혹있지만 일반인이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 그렇지 않은 지 정도는 쉽게 눈치 챌 수 있다.
그런 내가 보기에 그는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게 아니다.
플린이진짜 그를 겁탈했는지 안했는지를 떠나서 그는 진심으로 플린에게 겁탈당했다고 믿고 있는 것이다.
"너무 긴장하지 마세요. 당신을 탓하려고 온 게 아니니까요."
사실 그를 탓하려고 온 게 맞았다.
내가 여기 들어오기 전까지만 해도 그가 플린에게 누명을 씌웠다는 걸 거의 확신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진심으로 겁에 질려 있는 그의 얼굴을 보고 모든 생각이 바뀌었다.
그에게는 잘못이 없다.
잘못이 있는 존재는 플린인 척 그를 겁탈한 존재지.
"플린이 당신을 겁탈했다고 했었나요?"
"그... 그게..."
그가 나의눈치를 보면서 몸을 덜덜 떨기 시작했다.
그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한 영지의 영주가 와서 묻고 있는 데 당연히 자신을 압박하는 것 처럼 받아들이겠지.
"일단 죄송하다는 말을 먼저 드리고 시작하겠습니다. 당신을 겁탈한 자가 플린이 아니라고 해도 저희 지역의 치안이 그만큼 안 좋았다는 뜻이니까요."
그의 말에 교모한 말장난을 섞었다.
당신이 잘못은 없다.
아마 그는 자신에게 죄를 전가하는 게 아니라 다른 여성에게 누명을 씌우려고 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게 누명이 아니라 진짜 죄라는 걸 제외하면 그의 생각이 거의 맞을 것이다.
"어..."
"당신에게 묻고 싶은 게몇가지 있는데 대답해 주실 수 있겠어요?"
나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매력은 여성과 수하들에게만 통하는 게 아니었다.
그는 내 미소를 보고 아마 이 사람이면 믿을만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가질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내 성격이 착하다는 건 이미 제국 전체에 퍼져 있는 이야기였으니까.
내 얼굴을 보는 순간 그런 소문들을 떠올릴 테고 그 소문들이 그의 생각을 지배하기 시작하면 나에 대한 그의 신뢰는 크게 늘어날 수 밖에 없다.
"네, 대답해 드릴게요."
그가 훨씬 더 나아진 표정을 하고 나를 바라봤다.
내 매력의 대 다수는 귀여움과 부드러움이 차지하고 있었음으로 얼굴만 봐도 어느 정도 안심이 될 것이다.
아마 여자였으면 사랑에 빠졌을지도 모르겠지만 설마 남자가 나한테 사랑에 빠지는 일은 쉽게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무섭겠지만 천천히 기억을 떠올려 주세요. 당신은 상대가 플린인 걸 어떻게 알았나요?"
"제가 반항하려고 했을 때 감히 플레아 아이데스님의 동생인 플린 아이데스에게 반항하냐고 했어요."
"얼굴을 보고 알아 차린 게 아니라요?"
"저는 플린님을 본 적도 없어요."
이거 생각보다 일이 가벼운 문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계획적인 범죄가 아니라 우발적인 범죄일 가능성도 충분히 높아졌다.
"혹시 플린을 데리고 와도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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