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3화 〉 서막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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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힘대 힘의 싸움이 아니다.
이 세상에 세력이 단 둘 밖에 없다면 순수한 힘대 힘의 싸움을 볼 수 있을 지도 모르지만 이 세상에는 정말 어마어마한 수의 세력들의 존재한다.
'아마 세상에 세력이 둘 이어도 힘 싸움으로 모든 게 결정나진 않겠지.'
그 사실을 여실히 느낄 수 있는 게 이번에 벌어지고 있는 반 프레스티아 연합과 프레스티아의 전쟁이었다.
아직 병사들과 병사들이 맞붙지는 않았지만 반프레스티아 연합군이 진군하는 중에도 어마어마한 물 밑작업들이 오갔다.
나는 직적 전쟁에 참여하는 존재는 아니어도 막대한 양의 식량으로 전쟁에 강하게 개입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이리저리 많이 불려 나갔다.
프레스티아는 물론이 아이작이랑 히스토리아 쪽에서도 사람이 찾아와서 식량을 구매하겠다고 하는데 그 조건이 너무 세서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프레스티아가 주기로 했던 화양의 지배권이 너무 달콤해서 계속 거부하니까 프레스티아가 내민 것 보다 더 큰 가치를 내밀길래 깜짝 놀랐다.
'결국 프레스티아 쪽에서 황야에다가 골드를 잔뜩 얹어주는 쪽으로 합의를 보긴 했지만...'
앉아서 때 돈을 번 셈이니 왜 무기 장사를 하는 지 알 것 같았다.
줄타기 몇번한 걸로 어지간한 전쟁보다 더 큰 성과를 냈는데.
"이쯤 되면 아이작이랑 히스토리아가 아예 프레스티아를 공격하지 않을 수도 있어."
반 프레스티아 연합이 지금 당장 프레스티아를 공격해 들어가면 정말 어마어마한 손해를 볼 것이다.
최악의 경우에는 병사 수만이 굶어죽는 끔찍한 일이 벌어질 수도 있지.
그렇게 해서라도 프레스티아의 세력을 깎는 다는 것이 굉장히 큰 의미가 있는 일이긴 했지만 내가 반 프레스티아 연합의 제안을 계속 반대하면서 그들도 깨달은 것이 있을 것이다.
내가 프레스티아한테 무언가를 단단히 받아 챙겼구나.
자신들이 준 것을 통해서 계산해 보면 내가 프레스티아에게 받은 게 대충 예상이 갈 텐데 그 정도 대가를 내가 받았다는 것만으로도 프레스티아의 세력은 크게 약해질 수 있다.
반대 급부로 내가 세지긴 하지만 아직 내 세력은 명예만 높지 확장성이 그렇게 높은 세력이 아니다.
'게다가 아렌황녀를 등에 엎고 있기도 하고.'
아렌 황녀가 대단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뜻이 아니라 황녀가 자기 나라의 땅을 지배한다고 움직이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니까.
그리고 혹시라도 패배했을 때의 리스크도 훨씬 적다.
프레스티아가 황제가 된다면 그녀의 언니인 프리스티스는 죽임 당할 것이다.
그리고 제국은 완전히 뒤 바껴 버리겠지.
그런데아렌 황녀가 황제의 자리에 오르면?
자신을 따른이들을 많이 챙겨주기도 하고 자신에게 깝친 이들에게 벌을 가하기도 하겠지만 기본적인 제국의 근간은 바뀌지 않을 확률이 높았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프레스티아 보다 내쪽 세력이 다른 이들에게 견제를 덜 받을 수 있었다.
완전히 같은 이유로 다른 이들을 공격하지 못한다는 단점을 충분히 상쇄할 수 있는 장점이지.
그래서 내가 아렌황녀를 안 죽이고 있는 거고.
"이번 전쟁은 아마 정보전이 가장 치열하게 돌아가는 전쟁이 될거야."
"그 정보전을 우리가 안 해도 된다는 게 참 기분 좋아."
우리는 이 파국의 승자가 누가 될지 이득만 먹으면서 보고 있으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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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우우우..."
가든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머리가 깨질듯이 아팠다.
반 프레스티아 연맹이 프레스티아의 진영으로 다가오는 동안 가든은 엄청나게 머리를 굴려댔다.
상대는 어떻게 움직일 것인가.
그리고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세력과 세력간의 제대로 된 심리전이 펼쳐지자 머리가 빠게지는 게 싶을 정도로 아팠다.
그녀가 그런 부담감을 가지면서도 최선을 다해서 머리를 굴리는 이유는 프레스티아의 세력이 어떻게 하면 더 커질 수 있을 까에 대한 충심의 마음 때문이었다.
물론 그녀가 우수한 성과를 내면 프레스티아가 최상급 노예를 제공해 준다고 했기 때문에 의욕이 더 나는 것도 있었지만 근본적인 이유는 프레스티아 세력의 성장을 위해서였다.
'이대로 가면 처음 목표한 피해보다 훨씬 덜한 피해로 상황을 막을 수 있어...'
반 프레스티아 연합에 잔뜩 성장한 프레스티아의 뚝 배기를 깨려고 달려드는 상황에서 이 정도 방어해낸 거면 정말 잘 해낸 거다.
황야와 상당한 양의 자금을 플레아한테 넘기게 되긴 하겠지만 그래도 식량은 추가로 받을 수도 있었고, 반 프레스티아 연합한테 제대로 공격당한 것 보다는 이쪽의 손해가 훨씬 덜했다.
이 정도만 해도 무난하게 잘막아 냈다면서 프레스티아에게 칭찬을 받을 것이다.
프레스티아 역시 성장한 자신의 세력을 다른 세력이 공격해 오는 것은 필연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근데 반 프레스티아 세력쪽 세력의 피해가 너무 적어...'
그들이 아예 프레스티아를 공격했다면 프레스티아가 손해를 조금 더 봤을 지언정 그들에게 엄청난 피해를 입힐 수 있었을 텐데 식량이 없는 그들은 플레아에게 이미 뜯길대로 뜯긴 프레스티아 세력을 더 공격하고 싶지 않아할 것이다.
다른 식량 공급망이 있지 않는이상 일단 프레스티아의 세력권 내부로 들어오면 바로 손해를 입힐 수 있으니 그녀 입장에서는 상대가 공격해 온다면 오히려 기뻐하면서 받아줄 수 있었다.
'플레아 쪽 세력한테 배신을 때릴까?'
그쪽에게 주려고 했던 황야를 주지 않으면 프레스티아에게 충분한 피해를 주지 못했다고 생각한 반 프레스티아 연합이 프레스티아를 충분히 제압하지 못했다고 생각해 그들을 다시 공격해 올 수도 있었다.
어떻게 하면 프레스티아의 세력에 더 큰 이득을 줄 수 있을 지 고민하던 그녀의 앞에 커피 잔 하나가 내려앉았다.
"이것 좀 드시고 하세요."
밝은 웃음을 짓고 커피를 주는 자신의 노예를 바라보는 가든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그래, 내가 이맛에 일하지.'
귀여운 미소를 봐서 그런지 괜히 몸에 기력이 도는 것 같았다.
'결국 반 프레스티아 세력한테 손해를 입히면 되는 거 아니야?'
노예가 준 커피를 마시니 그녀의 머리가 핑핑 돌기 시작했다.
한 번 뇌를 쉬어줬기 때문일까?
하나로 모아져 있던 그녀의 발상이 점점 퍼져나갔다.
"그래, 그렇게 하면 되겠네."
가든이 미소를 지으면서 그녀의 노예를 쓰다듬었다.
"덕분에 좋은 생각 났어. 너 한테는 체벌 방지 권을 하나 주마."
처벌 방지권이라고 해봤자 진짜 빡쳤을 때는 아무런 쓸 모 없고 기분 좋을 때 엉덩이 조금 만져지는 걸 피할 수 있는 것 뿐이었지만 노예는 고맙다는 의사를 표시하면서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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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 이게 누구야? 가든 아니니? 오랜만이다."
"오랜만에 봽습니다. 헬링 후작님."
프레스티스가 가든을 바라보면서 표정을 굳혔다.
프레스티아와 프레스티스는 어릴 때 부터 서로를 적으롤 여기며 자라왔고 그 만큼 상대쪽 진영에 있는 인물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가든은 프레스티아 세력에서 제일 가는 참모장으로서 프레스티아와는 어릴 때 부터 사이 좋게 지내기도 했던 년이었다.
그런 년이 갑자기 자신한테 찾아왔다는 건 프레스티아 쪽에서 프리스티스에게 빅딜을 걸러 왔다는 뜻이다.
서로에게 윈윈이 되는, 하지만 프레스티아 세력이 더 이득을 보는 일 말이다.
"우리 사이에 무슨 존댓말이야. 편하게 언니라고 불러."
가든은 태어나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프리스티스에게 반말을 써 본 적이 없었지만 프리스티스는 괜한 의리를 강조하면서 가든을 바라봤다.
"공적인 자리니까요. 나중에 남자들이나 만지면서 얘기할 때 언님이라고 부르겠습니다."
"그래, 너 남자 좋아한다고 했지? 언니 밑에 있는 애들이 진짜 끝장나거든? 너도 아마 만족할거야."
프리스티스가 음산하게 웃고 있을 때 가든역시 비슷한 미소를 지으면서 입을 열었다.
"제가 헬링 후작님께 찾아온 이유는 한 가지 제안이 있기 때문입니다."
"무슨 제안이길래 우리 동생 급 정도 되는 친구가 여기까지 혼자 찾아왔을까?"
"저희와 힘을 합쳐 히스토리아와 아이작을 몰락시키지 않겠습니까?"
몰락.
단순히 견제를 위한 공격이 아닌 상대방을 완전히 망가뜨릴 의지가 가득 느껴지는 그 험악한 단어에 프리스티스가 미소를 지었다.
"몰락 좋지. 그런데 그년놈들이 절대 만만한 애들이 아니거든? 한참 싸우다가 우리 세력까지 같이 몰락하게 될 확률이 높은데 말이야."
"저희한테는 상당한 양의 식량이 있습니다. 반면에 상대가 가지고 있는 건 배 곪고 있는 병사들 뿐이고요."
가든의 말에 프리스티스가 옅은 미솔르 지었다.
"그리고 그들의 병령은 저희 세력쪽으로 집중되어 있습니다. 지금 공격하시면 쏠쏠하게 이득을 볼 수 있을 것 같은데 어떠십니까?"
가든의 덤덤하고도 굳센 말에 프리스티스가 입꼬리를 올렸다.
"그래, 한 번 해보지 아이작은 몰라도 히스토리아 그년은 끝장을 내고 싶으니까."
정말 드물게도 헬링가의 두 자매가 손을 잡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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