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9화 〉 라이트 리쿠르트3
* * *
"오랜만이야?"
"오랜만은 무슨 일주일 전에 봤으면서."
라이트와 정식적으로 군신의 관계를 맺는 일은 정말 빠르게 진행됐다.
라이트의 세력은 라이트에게 거의 모든 권력이 몰려 있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가 갑자기 내 밑으로 들어온다고 말해도 거부하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
물론 그의 수하 중 갑작스러운 라이트의 말에 거부하는 사람이 아예 없었던 이유는 아무래도 내가 그 만큼 잘난 세력을 가지고 있어서라고 생각한다.
내가 가지고 있는 세력이 별 볼 일 없는 수준이었다면 아무리 라이트가 가지고 있는 지배력이 공고하다고 해도 내 밑으로 절대 들어가서는 안될거라는 이들이 많았을 테니까.
저번에 비공식적으로 이루어진 만남과는 다르게 이번에는 서로의 부하를 옆에 대동하고 만났다.
내 뒤에는 시에린과 라이넬이 라이트의 옆에는 마이테스와 필리엣이 있었는데 나를 그렇게 보고 싶었지만 기사의 마음으로 겨우 참아냈다는 그녀들에게 보상을 해주기 위함으로 보였다.
'이것도 좀 장관이네.'
일반인에 비하면 거인이라고 볼 수 있는 여성 무인들 사이에서 남자 군주 둘 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니 남녀역전 세계에서는 정말 보기 힘든 장면일 지도몰랐다.
"오랜만입니다. 마이테스경, 필리엣경, 라이트형 한테 보복은 제대로 하셨습니까?"
"보... 보복이라뇨! 당치도 않습니다!"
필리엣은 작게 움찔하는 정도에서 멈췄지만 마이테스는 절대 그러지 않았다는 듯 그 큰 손을 마구 흔들었다.
그렇게 격하게 부정하는 것이 오히려 긍정적인 시그널을 보낸다는 것을 그녀도 모르는 것이 아닐 텐데 아무래도 무의식 적인 영역에서의움직임은 제어하기 쉽지 않은 것 같았다
"맞아. 보복같은 거 안당했으니까 걱정하지 마... 아이구 삭신이야."
다들 아니라곤 하지만 아마 엄청 두들겨 맞았을 것이다.
라이트의 세력은 기본적으로 가족같은 분위기를 가지고 있는 곳인데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러 간다길래 기사의 정신을 발휘해서 겨우 참은 와중에 밑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만남을 가졌던 거라고 말하는 순간 아마 난리가 났겠지.
아마 우리 세력에서도 라이넬한테 비슷한 짓을 했으면 딱밤정도는 맞을 것이다.
"아무튼 자세한 이야기나 좀 해보자고."
마이테스와 필리엣이 나를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긴 했지만 그 사실을 알고 있다고 해서 내가 그녀들에게 무언가를 해줘야 할 이유는 없었다.
애초에 같은 지역에 있는 세력이 아니라 나를 만날 기회가 굉장히적을 텐데 그냥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의 밑에서 일을 한다는 것에 의미를 가지고 일하겠지.
어쩌면 내가 제국을 모두 통일한 이후에 첩 중에서도 말석의 자리에 그녀들의 자리를 마련할 지도 모르지만... 아마 그럴 일은 없을 확률이 대단히 높았다.
"이미 다 회의했으면서 무슨 자세한 이야기를해?"
그와 나 사이의 군신 관계를 어떻게 해야 할지는 이미 서로의 참모진들이 거의 다 짜놓았고 우리는 그 위에 도장만 찍으면 됐었다.
각자의 세력에서 이미 결제까지 완료된 서류였기 때문에 그의 말 처럼 굳이 여기서 이야기를 더 나눌 필요는 없었다.
"나는 할 말 많아. 조항 중에서 진짜 마음에 안 드는 조항이 하나 있거든."
"무슨 조항인데?"
라이트가 무슨 조항인지 알겠다는 듯 웃으면서 나를 바라봤다.
"사석에서는 반말을 쓰겠다는 말을 굳이 박아 넣을 필요가 있어? 내가 공식적인 자리도 아니고 사석에서 반말하는 것 까지 안된다고 할 것 같아?"
"내가 우리 동생을 못 믿겠다는 건 아닌데~ 그래도 말이야. 너 완전 원칙 주의자잖아. 전장은 공식적인 자리라고 나한테 따박따박 존댓말했던 걸 이 머리로 똑똑히 기어하고 있는데 대비를 해놔야 하지 않겠나."
"그거 나 스스로한테 하는 거니까 깐깐하게 군 거지 내가 설마 남한테도 깐깐하게 굴 것 같아?"
물론 다른 이들이 보고 있는 제대로 된 공적인 자리에서 나에게 반말을 한다면 솔직히 나도 어떻게 대처할 지잘 모르겠지만 그와 나 단 둘이 있거나 서로의 부하들만 있는 자리에서는 그가 나에게 반말을 하든 욕을 하든 크게 신경 쓸 생각 없었다.
"그럴 자신이 있으면 그냥 박아놔도 문제 없는 조항 아니야?"
"이 조항을 참모들이 다 돌려 보는데 그러면 애들이 나를 뭐라고 생각하겠어?"
"에이~ 천하의 플레아 아이데스가 설마 고작 참모진들 시선이 두렵다는 건 아니겠지?"
은근하게 바라보면서 웃는 그의 모습에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알았어... 형 마음대로 해."
키득 웃으면서 나를 바라보고 있는 라이트를 보고 있으니 열불이 치솟아 오르긴 했지만 확실히 분위기는 유해진 것 같았다.
애초에 우리 둘이 서로 티격거리면서 싸우는 세력은 아니었으니 험악한 분위기가 조성되는 것도 웃긴 일이었지만.
"여기 온 김에 아렌 황녀님 한 번 만나 뵐 수 있어?"
"만나기 싫다고 해도 만나게 할 거야. 내 신하라는 건 곧 아렌황녀님의 휘하에 있다는 것과 같은 소리니까."
"주군의 주군님이시니까 눈도장 확실하게 찍고 가야지."
"너무 과하게 행동하지 마. 그냥 형의 존재 정도만 알리고 간 다는 생각으로 움직여."
"알겠습니다요."
과장해서 움직이는 그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한숨만 나왔다.
'이 형은 분명 처음 만났을 때는 엄근진이었는데 그 사이에 어떻게 돼버린 건지...'
그가 이상해 졌다고 생각하는 것 보단 우리가 그만큼 친해졌다고 생각하는 게 맞으려나?
"바로 안내해줄 수 있어?"
"어. 미리 말씀 드려 놨거든."
나 혼자찾아가는 것 정도는 짧게 양해를 구하면 바로 찾아갈 수 있었지만 다른 손님과 함께 찾아가는 데 미리 동의를 구하지 않는 것은 예의가 아니었다.
물론 아렌 황녀는 내가 그 정도 예의를 지키지 않는 것으로는 화내지 않을 정도로 나를 철썩같이 믿고 있는 중이긴 했지만 다른 이들에게 쓸 데 없는 공격을 당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그녀에게 지킬 수 있는 모든 예의를 다 지켜야만 했다.
"따라와."
라이트를 데리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순간 시에린이 신호를 보내는 게 보였다.
아마 아렌황녀한테 언질을 준 거겠지.
지금 가겠다고.
아렌황녀가 나에게 상당히 칭얼거렸기에 그녀의 개인 실은 내 집무실의 근처로 이동해 있었다.
그리고 내 집무실은 손님을 받는 접대실의 근처에 지어져 있었기 때문에 금방 아렌황녀가 있는 곳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
똑똑
"아렌황녀님, 이번에 저희 세력에 새로 들어온 라이트 리쿠르트 백작을 소개 시켜드리기 위해서 찾아왔습니다."
"들어오세요."
미리 언질은 줘서 그런걸까? 아렌황녀는 침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조심스럽게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책을 읽고 있는 아렌 황녀의 모습을 보였다.
공부 할 때는 정말 열심히 읽지만 홀로 있는 시간 동안에는 책을 아예 안 읽는 걸로 알고 있었는데 갑자기 저렇게 책을 읽는 걸 보면 새로 들어온 이한테 멋진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모양이다.
하긴 무인이라서 키도 크고 벌써부터 발육이 잡혀 나가고 있긴하지만 나이로 따지면 아직 어린이니까 저런 겉 멋을 보이고 싶을 법도 하지.
"반갑습니다."
아렌황녀가 읽고 있던 책을 덮고 우리쪽으로 다가왔다.
"리쿠르트 백작님이라고 하셨죠?"
"네, 라이트 리쿠르트라고 합니다. 편하게 불러주시죠."
라이트가 예의 바른 몸짓으로 아렌황녀에게 인사했다.
"부족한 몸이지만 잘 따라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할 말이죠."
그렇게 서로 입에 발린 덕담을 한참 나누다가 아렌황녀의 집무실을 빠져나왔다.
"내가 뭔가를 잘 못 알고 있었나?"
의문 부호를 잔뜩 띄우고 나를 바라보고 있는 라이트의 모습에 마이테스도 같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뭔가 이상한게 있었어? 요?"
"내가 알기로는 아렌 황녀님의 나이가 상당히 어린 걸로 알고 있었는데 이렇게 보니까 10대 중후반은 돼 보이시는 거 같아서..."
"형이 알고 있던 대로가 맞아. 무예수련이 상당하셔서 빠르게 성장하신 것 뿐이지 실제 나이는 꽤 어리셔. 적어도 형 보다 10살 이상 어릴걸? 어쩌면 두 배 이상 차이날지도 모르겠네."
"아무리 황녀님이라고 해도 나 보다 10살 이상 어린 사람보다 작다는 건 좀... 자존심 상하네..."
침울한 척 연기하고 있는 라이트를 바라보며 속에서 끌어오르는 장난기를 참지 않고 말을 내뱉었다.
"말 제대로 해. 10살이 문제가 아니라 형이 작은 게 문제인 거지."
그가 흔히 짓는 웃음인 키득 대는 웃음을 지으며 말하자 그의 표정이 팍하고 굳었다.
"너는 큰 줄 알아?"
"형 보다는 조금 큰 것 같은데?"
라이트와 내가 쓸데 없는 키 얘기에 목소리를 높이고 있을 때 뒤에 서 있었던 필리엣이 가벼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도토리 키 재기입니다."
그 압도적인 팩폭에 나와 라이트는 소리 없이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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