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6화 〉 군주의 덕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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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충신 아이데스.
충신하면 아이데스가 떠오르고 아이데스 하면 충신이 떠오르는 이런 위치에 오를 때 까지 나한테는 정말 많은 일이 있었다.
'사실 처음 부터 이쪽으로 오고 싶었던 건 아닌데 말이야.'
나를 충신이라는 강력한 이름을 가진 존재로 이끌어 준 것은 흑마법사들이었다.
미래에 아둔과 공멸할 그 세력은 나에게 작은 영웅이라는 과분한 호칭을 가져다 줬다.
그 영웅이라는 호칭에 더해 프레스티아를 지배하고 제국을 손에 넣겠다는 방향으로 미래를 설계하면서 안정적으로 세력을 키우는 게 중요해졌고 이미 있는 이름 값과 내 주변에 펼쳐져 있는 상황을 잘 사용해서 지금의 자리에 올랐다.
사실 제국의 충신이라는 단어가 가지고 있는 힘이 그렇게 강력한 것은 아니다.
애초에 제국이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니었으니까.
아이작 세력이 1황녀를 계속 살려두고 있긴 하지만 명목적으로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는 황족은 아렌 황녀였다.
제국이 제대로 굴러가는 상황이라면 여러명의 후보를 두고 자기들끼리 싸우는 일은 일어나도 유일한 후계 구도가 형성되어 있는 상황에서는 제국이 하나로 뭉치는 게 옳은 일일텐데 기존에 황실파였던 이들과 기회주의자들을 제외한 다른 세력들은 아렌의 밑으로 들어오려고 하지 않았다.
아이작 처럼 제국을 배신했다고 공언하는 말이 없어서 그렇지 사실상 수많은 세력들이 이미 제국을 버리고 독자 노선을 걸어가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의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제국의 충신이라는 타이틀은 약간의 존경을 담은 표현밖에 되지 못한다.
'제국 전체를 보면 말이지.'
제국 전체가 아니라 황실파 내부에서 보면 제국의 충신, 에다가 진정한을 붙이고 있는 이 단어가 얼마나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는지는 명확했다.
황실파에는 나보다 강력한 세력을 가지고 있는 존재들이 몇몇 있었다.
프로트라인도 그 중 하나인데 그녀가 나를 상사 취급하는 걸 보면 내가 황실파에서 가지고 있는 힘이 얼마나 강력한 지 감이 올 것이다.
황실파의 가장 중요한 가치는 제국에 대한 충성이었고 나만큼 그 충성을 잘 보여준 이가 없기 때문에 내가 사실상황실파의 수장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정작 나는 제국에 전혀 충성하고 있지 않은 데 말이지...'
그 사실을 감각적으로 알아 차린 사람은 이 세상에 단 둘 밖에 없었고 그 중 하나는 사탕발린 말과 연기에 속아 다시 나를 믿게 되었으니 의미 없는 일이었다.
아무튼 나는 사실상 황실파의 수장이었다.
여기서 사실상이라는 단어가 굉장히 중요한 지분을 차지하고 있었는데, 완벽한 황실파의 수장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렌황녀가 명목상으로는 황실파의 수장인 상황이기도 했고, 기회주의자들에게 있어 황실파는 세력이 약해지면 바로 버릴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래서 지금까지는 황실파 세력 전체의 크기를 키우는 데에 어느 정도 심리적인 압박감이 있었다.
황실파는 결국 나에게 도움을 주는 세력이지 내 세력 자체가 아니니까.
내가 아렌황녀의 목을 쳤을 때 얼마나 많은 이들이 내 편을 들어줄지 확실하지 않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그렇게 미적지근하게 움직일 수 없어.'
이제는 황실파 전체가 곧 내 힘이라는 생각으로 움직여야 한다.
아렌 황녀를 달고 있는 내 세력은 대외적인 확장이 힘들다.
황제가 병사를 들고 제도 밖에 있는 다른 이들을 치는 순간 이미 제국에 대한 지배권을 완전히 상실했다고 말하는 것과 동일했으니까.
물론 실제로 상실하긴했지만 그게 겉으로 드러나 버리니 문제인 것이다.
아무튼 그래서 나는 다른 세력을 공격하는 것이 굉장히 힘들었다.
끽해야 먼저 공격해 오는 세력, 그리고 제도를 가지고 있는 세력 밖에 공격할 수가 없었지.
이런 상황에서 내가 가지고 있는 영향력을 확장하는 방법은 황실파를 이용하는 것 밖에 없었다.
프로트라인을 비롯한 황실파의 다른 이들에게 식량을 대여해 준 뒤 그들이 새로 얻은 지역으로 황실파 전체의 영향력을 키운다.
그리고 말이 대여지 사실상 그들은 나에게 마음의 빚을 진 것이나 마찬가지기 때문에 황실파 내부에서 나의 영향력도 빠른 속도로 키울 수 있었다.
'악착같이 세력을 키워야지.'
당장 프레스티아만해도 빠른 속도로 세력을 키워가고 있었고 프리스티스 헬링과 히스토리아도 잠시 휴전을 취하고 다른 쪽으로 세력을 넓히는 중이었다.
기존의 세력이 강해지는 경우도 있었고 다크호스라고 볼 수 있는 세력이 빠르게 성장하기도 했다.
아직은 격변기라서 지금 크게 번성했던 세력이 나중에 찾지도 못할 정도로 작아지거나 지금은 작디 작은 소세력이었던 곳들이 빠르게 성장하기도 했지만 어느 정도 안정기가 찾아오게 되면 지금 시기에 키워놨던 힘만으로 살아가게 될 때가 온다.
그 때를 대비해서 내가 쓸 수 있는 힘을 많이 비축해 둬야 한다.
'아렌을 죽이는 것도 그 때가 되겠지.'
어느 정도 세력들의 틀이 잡히는 안정기가 찾아올 때면 그녀도 충분히 나이가 차서 나를 대부로 모시지 않아도 될 정도의 나이가 될 테고 그녀가 세력을 이끌어도 아무런 불만이 나오지 않을 시기가 될 것이다.
내 권력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그 시기가 되기 전에 아렌을 죽여 버려야지.
"그렇게 앉아 있으니까 되게 흑막같은데?"
"흑막은 무슨."
잠깐 휴식을 취하면서 앉아있는 와중에 시에린이 나에게 말했다.
흑막이라.
아예 틀린 말은 아닐지 모른다.
결국 난세 전체의 흐름을 짜고 있는 사람은 나였으니까.
식량 대란이 일어난 것도 결국 내 휘하의 시에린의 머리에서 나온 일이었고, 적어도 지금까지는 우리의 설계에서 벗어난 것이 많지 않았다.
'꿈같은 소리지.'
그냥 지금까지는 우리가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이 다른 세력이 가고자 하는 방향들고 비슷했기 때문에 큰 충돌 없이 여기까지 올 수 있던 것 뿐이다.
만약 프레스티아가 하이네스의 말을 받아드릴 이유가 없어서 받아드리지 않았다면?
그 순간 우리가 짜놨던 틀이 비틀리는 것이다.
물론 제 2안을 짜 놓긴 했지만.
'앞으로의 일은 아무도 예상할 수 없어.'
당장 근처에 있는 일은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프리스티스 헬링과 히스토리아의 싸움에서 누가 이길 지 예측할 수 없었고 어떤 세력이 새로 떠 오를지도 몰랐다.
아무것도 모르는 이에게 흑막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은 제대로 된 흑막 역할을 할 수 있는 사람에게 실례라고 생각한다.
이런 말들을 시에린에게 그대로 내뱉었더니...
"너 지금 자기 변호하는 거야? 네 작전 때문에 죽거나 손해본 사람이 얼마나 많은 줄은 알고 있는거지? 그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피해를 입혀 놓고 아무런 죄책감도 없을 정도로 뻔뻔한 걸 보면 오히려 흑막의 요소에 잘 부합하는 것 같은데."
시에린의 말에 나는 입가에 작은 미소를 띄웠다.
"나는 흑막이 아니라 군주야. 군주가 자기 세력을 위해 움직일 때 다른 사람이 피해를 보는걸 생각하면 안돼. 그건 당연한 거잖아."
군주는 자신의 세력만을 위해서 움직이는 이다.
내가 식량을 가지고 장난을 치면서 식량을 가지고 있지 못한 세력들이 몰락하고 그들의 병사들이 학살 당하며 영지민들이 새로운 군주의 아래에서 수탈당한다고 해도 그것은 내가 신경써야 할 일이 아니다.
언젠가 그것이 업보로서 나에게 돌아올 수 있지만 업보가 무서워서 움직이지 못하는 군주라면 그건 군주라는 이름이 아까운 겁쟁이에 불과하다.
'어차피 업보는 패배자가 지는 거야.'
결국 승자가 돼서 역사를 다시 쓰면 승리자는 업보따위 지지 않는다.
"나는 네 그런 모습이 좋더라."
"유유상종이라고 비슷한 사람들끼리 만나는 거지."
내 말에 시에린이 씩하고 미소 지었다.
군주된 자는 다른 사람의 신음 소리에 관심을 가져서는 안된다.
군주의 아래에 있는 참모도 마찬가지였다.
다른 사람의 신음 소리에 관심을 가지고 다른 인간들의 피해를 막기 위해서 무른 전략을 제시한다면 그것은 참모로서 존중받을 가치가 없는 머저리에 불과하다.
그런 의미에서 나도, 시에린도 이 난세를 극복할 방법을 잘 알고 있는 인간들이었다.
"나는 내 세력의 이득을 위해서라면 어떤 일도 할 자신이 있어."
피식피식 웃고 있는 시에린을 지긋이 바라봤다.
"너도 나를 위해서 무슨 일이든 할 각오를 하고 살아, 그렇게 승리를 얻은 끝에 찾아오는 건 업보가 아니라 화려한 미래일 테니까."
"패배하면 찾아오는 건?"
시에린의 말에 피식 웃으며 답해줬다.
"끝없는 절망과 악명이지. 하지만 제국을 지배하겠다는 원대한 꿈이 있다면 패배했을 때의 패널티 따위는 아예 신경쓰지 말아야 하는 거 아니야?"
"그게 옳지."
그렇게 햇살이 따스하게 빛추는 집무실에서 나와 시에린은 서로를 바라보며 차갑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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