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0화 〉 저를 못 믿어요?2
* * *
"네, 들어오세요."
최대한 아무런 티도 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이 보였지만 나를 바라보는 아렌황녀의 눈빛에는 명백한 경계가 담겨 있었다.
나를 힘으로 누르려고 했던 여자아이가 왜 나한테 이런 눈빛을 보이게 됐는지는 잘 모른다.
내가 가지고 있는 진짜 힘과 저력을 알아서 저런 눈빛을 보내는 걸 수도 있고,그녀의 자리에 위협을 느껴서 그런걸지도 모른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아렌황녀가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이전과는 상당히 달라졌다는 사실이었다.
"제도의 일이 바빠서 한동안 만나지 못했는데, 그 동안 잘 지내셨나요?"
나는 최대한 딱딱한 문체를 사용하지 않기 위해서 노력했다.
내가 이 자리에 온 것은 결국 아렌황녀의 믿음을 다시 얻어 내기 위함이었기 때문에 굳이 날카로운 말투를 사용할 필요가 그 어디에도 없었다.
"네, 잘 지냈습니다. 아이데스님은 잘 지내셨습니까?"
부드럽게 말을 이어나가는 나와 다르게 아렌 황녀는 상당히 경직되어 있는 모습으로 나에게 말했다.
그녀의 눈에는 숨길 수 없는 경계가 들어 있었으며 왜 나를 찾아 왔는가에 대한 불아감이 엿 보였다.
'일단 분위기를 좀 풀어 줄까?'
"저는 잘 지냈습니다. 잘 못지낼 이유가 없죠. 아렌황녀님의 세력이 이렇게 성장하고 있는데 말이에요."
"제 세력, 말이군요."
그녀의 짧은 한 마디를 통해 그녀가 왜 나한테 경계심을 가지고 있는지를 깨달았다.
'내 충성을 의심하는 건가?'
어떤 계기로서 이런 일이 발생한 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는 내 충성을 의심하고 있는 것 같다.
정확히 말하면 나를 믿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녀를 향한 충성을 져버리면 그녀에게 다가오는 타격이 너무 컸기 때문에 그녀 스스로 살아 남기 위해서 각종 장치들을 마련해 놓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 옳아 보였다.
나를 통하지 않고 그녀와 직속으로 연결되어 있는 수하를 만드려고 하고, 군주로서의 위엄을 보이기 위해서 외부의 활동을 늘려가는 것은 모두 그녀의 세력에서 나의 비중을 줄이기 위함일 것이다.
내가 이렇게 확신할 수 있는 이유는 내가 아렌황녀에게 보여줬던 모습은 정말 헌신적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어디를 가든 내 세력이 아니라 아렌 황녀를 강조했고, 애초에 내가 가지고 있던 세력 전부를 아렌황녀에게 바친 듯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이렇게 까지 하고 있는데 나한테 의심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기 보다는, 그 위험을 걱정하고 있다고 보는게...
"지금 제 밑에 있는 세력이 진짜 제 세력이라고 볼 수 있을까요?"
냉소적인 모습으로 말하는 아렌 황녀의 모습에 나는 지금까지의 생각을 고칠 수 밖에 없었다.
아주 짧은 문장이었짐나 그 문장 사이에는 나를 향한 명백한 의심이 들어 있었다.
나에게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냐고 묻는 듯한 그 목소리에 나는 아렌황녀에 대한 평가를 조금 조절했다.
'그래도 어느 정도의 눈치는 있는 놈이군.'
내 야망을 알고 있는 사람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히스토리아의 참모장은 나에게 야망이 있다는 것을 한 눈에 알아 봤다.
아렌 황녀는 그 동안 계속 내 옆에 있었으니 내가 아무리 잘 처신했다고 해도 그녀의 눈치가 매우 빠르다면 내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 정도는 충분히 해볼 수 있을 것이다.
"무엇이 그렇게 걱정되시나요?"
"아이데스님의 세력은 제 세력이 아닌 것 같습니다. 저를 이렇게 지켜주시고 키워주신 아이데스님께 말씀드리기에는 정말 죄송한 말씀이지만, 저는 이제 아이데스님을 믿을 수 없습니다."
'직설적으로 나오는데?'
아무리 나에대한 의심이 있어도 이렇게 까지 직설적으로 나올 줄은 몰랐다.
'어린애의 치기냐, 아니면 전략이냐.'
단순히 나이가 어려서 어떻게 말을 꺼낼지 몰라 이렇게 말하고 있는 거라면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나를 뒤흔들고 대화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서 저렇게 말을 시작하는 거라면, 그 때부터는 생각을 복잡하게 할 필요가 있었다.
지금 아렌황녀와 내가 독대하고 있는 상황이었으니까.
내 매력 수치가 100을 찍은 만큼 압도적인 카리스마를 발휘할 수 있긴 했지만 그녀 역시 황녀로서 카리스마를 발휘할 수 있었으며 순수한 육체의 우위에서 나를 찍어 누르려고 할 수도 있었다.
어린애한테 무력으로 딸린다는게 좀 이상해 보일 수도 있지만 무인과 무인이 아닌자의 무력 차이가 이정도로 나는 것은 그렇게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왜 저를 믿지 못하시는 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나는 화를내지 않았다.
그녀의 뜻을 들어 보겠다는 듯 최대한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이데스님이 저에게 충성을 다하고 있다는 사실이, 머리로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아렌황녀가 나를 똑바로 쳐다봤다.
"아이데스님이 가지고 있는 세력은 이전에 가지고 있던 세력과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커다란 세력입니다. 아이데스님이 아무리 황실에 충성을 하시는 분이라고 해도 아무런 대가없이 저에게 충성을 하는 게 마음으로는 이해가 되지만 머리로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아렌황녀가 나를 굳은 얼굴로 바라보고 있을 때, 나는 승리를 확신했다.
아렌 황녀는 지금 철저하게 계산되어 있는 상태로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자신의 생각을 나에게 털어 놓는 것 뿐이었다.
지금 상황이라면 그냥 그녀가 듣고 싶은 말을 몇마디 해주는 것 만으로도 그녀의 마음을 다시 돌려 놓을 수 있을 가능성이 컸다.
"프레스티아 헬링이 언니에게 다가간 뒤 밑에서 지내고 있다가 1황녀를 암살함으로서 그 위세를 얻어낸다는 전략을 들은 수 부터, 저는 아이데스님께 의심을 가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제가 아렌황녀님께 믿음을 드리지 못했군요."
아렌황녀가 짧게 고개를 저었다.
"아이데스님이 저에게 보여주신 모습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냥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저에게 진짜 모든 것을 바치려고 하는 존재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 보다 그 존재가 저를 치고 제 힘을 이용해 먹으려고 움직인다고 생각하는 게 훨씬 더 확률이 높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이데스님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결국 내가 잘못한 건 아니라고 말하는 구나.
'그래, 그게 군주로서 옳은 말이지.'
언제나 최악을 상정해야지.
심지어 그 최악이 자신의 죽음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면 말이야.
"정말... 다행이네요."
진짜 다행스럽게도 나는 군주로서 살면서 꽤 뛰어난 정도의 연기 능력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목소리는 덜덜 떨리고 있었고 약간의 울음기 또한 담겨 있는 것이 상대를 완벽하게 속일 수 있는 근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아... 아이데스님?"
이곳은 남녀역전 세계였다.
원래 세상의 남자가 여자의 눈물에 약한 것 처럼 이 세계의 여자는 남자의 눈물에 약했다.
내가 우려는 모습을 보이자 아렌황녀가 잔뜩 당황해서는 내 눈치를 봤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저는 아렌황녀님이 저를 의심하시는 줄 알았습니다. 저를 의심하시고 믿지 못하셔서 저를 내치시려는 줄 알았습니다."
"아닙니다! 그냥 만약을 대비해서..."
사실 그냥 울면서 미인계를 적당히 섞어 아렌황녀의 마음을 돌리는 것도 그렇게 나쁜 수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게 했다가는 아렌황녀가 나중에 가서 나를 다시 의심하게 될 지도 몰랐다.
'지금해야 하는 건 오히려 그녀에게 확실한 믿음을 주는 거지."
"아닙니다. 저는 괜찮습니다. 군주로서 최악을 가정하는 것은 당연한 일. 저는 진짜 괜찮습니다."
목소리를 떨었다.
섭섭한 감정을 억지로 숨기는 듯한 목소리를 냈다.
그녀가 나에게 의심을 가지지 못하도록,
그녀가 나에게 최책감을 가질 수 있도록.
"그런 이유 때문에 아렌황녀님이, 저를 멀리하시고 아렌황녀님의 수족을 늘리시는 거라면 저는 더 이상 신경쓰지 않겠습니다. 아렌황녀님이 하실 수 있으신 대로 최선을 다해서 세력을 키워주세요."
내가 슬픔을 참고 억지로 말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자 아렌 황녀는제대로 갈피를 잡지 못했다.
계속해서 내 눈치를 보면서 덜덜 떠는 모습을 보여줬다.
솔직히 나 정도 생긴 인간이 이 정도로 연기하고 있는데 안 넘어올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생각한다.
"... 제가 잘못 생각 한 것 같습니다. 아이데스님은 진정한 충신이십니다."
최악을 가정하고 나를 의심하고 대비하고 있다면, 제대로 된 충성심을 보이면 되는 일이었다.
사실 제대로 된 충성심이 아니라 꾸며진 충성심이긴 하지만 그렇게 꾸며진 충성심으로라도 완벽에 가까운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면 아직 어린 군주를 속이는 일은 그렇게 어려운 게 아니었다.
"제가 성인이 되고 문무를 갈고 닦을 때 까지, 저를 대신해서 세력을 키워주십쇼."
"아닙..."
"부탁드립니다!"
내 말을 끊으면서 까지 이르는 그 절박한 모습에 나는 속으로 미소를 짓지 않을 수 없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