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9화 〉 매력 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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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스티아와의 대화는 아주 격렬했다.
그녀에게 나도 모르는 낮져밤이의 기질이 있던 것인지 아까 이야기 할 때는 나에게 쭉쭉 밀렸던 그녀가 잠자리에 같이 드니 한마리의 야수와 같이 변해 있었다.
"벌써 가시렵니까?"
"그래, 더 이상 이곳에 남아있을 이유가 없으니까."
어제밤의 전투에서 승리를 차지했기 때문일까? 그녀의 얼굴은 참으로 여유로웠다.
자기가 나한테서 승리했다는걸, 알리기 위해서 저런 표정을 짓는 것 같은데... 글쎄?
'내가 져 줬다는 생각은 안 하는 걸까?'
어떻게 됐든 다음에 다시 만날 날이 참으로 기대됐다.
"한 바탕 폭풍이 왔다 갔네."
프레스티아가 왔을 땐 내 근처에도 오지 않았던 시에린이 그녀가 떠나자마자 나에게 찰싹 붙었다.
'시에린 일도 슬슬 끝장을 봐야지.'
그녀가 나에게 가까이 붙기 시작한 것이 매력 100을 찍은 이후라면 이야기가 좀 편할텐데 시에린이 나에게 다가오기 시작한 것은 그보다 살짝 앞선 타이밍이었다.
"시에린, 나랑 이야기 좀 나누지 않겠어?"
"물론이지~"
시에린이 콧소리를 담아서 대답하는 데 왠지 모를 꺼림직함이 느껴졌다.
"요즘 나한테 많이 다가오던데 원하는 거라도 있는거야?"
내가 시에린한테 묻자 시에린은 그걸 이제야 알았냐는 듯 한심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내려다 봤다.
'이제 안 게 아니라 지금까지 애써 무시하고 있던 거거든?'
"설마 몰라서 물어보는 건 아니지?"
"아예 모르진 않아. 네가 나한테 무슨 감정을 가지고 있는지는 우리가 처음 만났을때 부터 대충 예상하고 있었거든."
시에린이 키득대면서 나를 내려다봤다.
"그래, 그걸 잘 알고 있는 양반이 그런 질문을 대체 왜 하는 걸까? 네가 아는 그대로 인데 말이야?"
"한 동안은 가까이 다가오지 않다가 갑자기 나한테 붙기 시작하는데 무슨 일이 있던건 아닌지 의문을 가지는 건 당연한 일 아닐까?"
시에린이 깊은 미소를 지었다.
"네가 프레스티아를 좋아하는 걸 안 순간 부터 나는 너에게로 떨어지기로 마음 먹었어. 솔직히 한 남자를 사랑했던 여자의 마음으로는 복수하고 싶은 생각도 있었는데 플레아 아이데스라는 군주를 따르는 시에린 마디안의 심정으로는 도저히너를 배신할 수가 없더라."
"그래서? 한 동안은 옆에서 바라만 보고 있었다?"
시에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런 시에린의 마음을 이렇게 적극적으로 만든 계기가 뭐야?"
"플레아, 너는 황제의 자리를 노리고 있지?"
"물론이지. 너도 잘 알고 있잖아."
시에린이 깊게 미소를 지었다.
'왜 저래?'
나는 아직 시에린의 뜻을 알지 못했기에 시에린이 짓는 미소를 그저 멍하니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황제가 정실 하나만 들이는 거 봤어?"
그녀가 입을 여는 순간 나는 시에린이 왜 나한테 가깝게 다가오기 시작했는지.
그녀가 진실로 원하는 것이 뭔지 한 번에 다 알 수 있었다.
"정실은 당연히 프레스티아 헬링이 되겠지만, 설마 첩의 자리에도 못 들어가지는 않을 거 아니야."
"그건... 그런데..."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곳은 남녀역전 세계였다.
우리 세계에서도 만약 정말 뛰어난 여황이 있었다면 남편을 당연히 여럿 거느렸겠지만 지금까지 이 세계에서 남자가 황제가 된 것은 아둔 한 번 밖에 없었으며 그는 결혼도 못하고 죽었다.
애초에 이런 세계에서 여자가 남자의 첩으로 들어갈 수 있을 거라는 발상을 하는 것 자체가 굉장히 신기한 일이었다.
이 세계 출신이 아닌 나조차 이제는 남녀역전 세계에 익숙해져 있어서 시에린을 첩으로 들이는 생각 자체를 안하고 있었는데 그녀 스스로 먼저 이야기를 꺼낸 것이다.
"내가 너의 첩이 될 수 있다면 프레스티아 헬링만큼은 아니더라도 그만큰 사랑을 받는 자리에는 갈 수 있다는 거잖아? 결혼한 다음에 잘 대우받으려면 지금부터 이쁨받을 준비를 해야하지 않겠어?"
나에 대한 시에린의 사랑을 성별을 바꿔서 로맨스판타지 느낌으로 내면 여자들에게도 인기가 좀 있지 않을까?
여자가 남자한테 이쁨 받을 준비를 한다.
우리 세계에선 당연한 말이지만 남녀역전세계에선 쉽게 쓸 수 없는 말이었다.
"진짜로 내 첩이 될 생각이야?"
"당연하지. 공작겸 황제의 첩, 참 멋진 자리 아니야?"
시에린에게는 미안했지만 그녀를 첩으로 삼으면 정말 정말 많은 문제가 생긴다.
일단 내가 황제가 되면 그녀는 프레스티아 보다 강력한 권력을 가진다.
표면적으로는 프레스티아가 더 높은 자리에 있겠지만 그녀는 일단 다른 세력에서 온 이고 시에린은 개국 공신인데 당연히 시에린이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나와 프레스티아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보다 그녀와 나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이 당연하게도 더 많은 지원을 받을 확률이 높다는 뜻이었다.
이런 뜻을 그녀에게 전하니 시에린은 그게 뭐가 문제냐는 듯 고개를 갸웃 거렸다.
"내가 아이를 안 나으면 되는 거잖아. 피임이 어려운 것 도 아니고 뭐가 문제야."
"그러면 마디안 공작위는 누가 이을 건데."
내 말에 시에린이 입을 벌렸다.
똑똑한 시에린도 이런 방면으로는 생각을 해 본적 이 없었는지 갑자기 튀어나오는 문제들에 제대로 대비를 못한 듯 보였다.
"황제의 첩이 다른 첩을 들인다는 건 말도 안되는 소리라는 걸 알고 있지?"
"어... 알고 있어..."
시에린이 이를 앙 다물었다.
"하아... 하다못해 언니 하나만 있었어도 언니의 자식한테 공작위를 맡겼을 텐데..."
그녀의 오빠에게서 나온 자식은 아무래도 어머니쪽 입김이 강하게 들어갈 수 밖에 없을 터였다.
"나는 둘 다 포기 못해. 공작위도, 에 대한 사랑도."
시에린이 결단하는 표정을 지으며 나를 바라봤다.
"너와 나 사이에서 자식이 나오면 황족 취급하지 말고 공작가의 자식 취급을 해줘. 내 자식이 황권을 노리는 일은 절대로 없을 거야."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야."
내 말에 시에린도 알고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알아. 공작가의 피에 황제의 피가 섞인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황가의 정통성에 문제가 되겠지. 황제의 피가 섞인 자는 무조건 황족으로 대우받아야지 다른 대우를 받으면 문제가 일어난다는 거 나도 알아."
그녀가 이를 까득! 하고 깨물었다.
"어떻게 해야하지? 진짜 방법이 없나?"
해맑고 밝았던 시에린의 얼굴이 순식간에 어두워 졌다.
명확한 목표를 향해 걷고 있었는데 그 목표가 한 순간에 뒤집어 엎어지니 참을 수가 없는 듯 보였다.
"아직 생각해볼 시간은 많아."
전부다 미래의 일이다.
지금의 나는 황제는 커녕, 황제 후보자의 자리에도 오르지 못하는 몸이다.
그녀 역시 아직 공작이 아니라 내 가신 중 하나일 뿐이다.
그럴리는 없겠지만 내가 황제의 자리에 오르지 못한다면 이런 고민은 아무런 쓸모가 없게 되는 것이고, 역시나 그럴리 없겠지만 그녀가 큰 죄를 짓거나 실수를 해서 귀족의 자리에도 오르지 못할 정도가 된다면 역시 의미가 없는 고민이된다.
우리한테는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아있다.
"그래... 시간을 두고 생각하자..."
시에린이 터덜터덜 바깥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래도 생각은 해보고 있을게, 결국 권력과 사랑,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하는 순간이 올테니까..."
"그래."
터덜터덜 밖으로 걸어나가는 시에린을 보며 나는 그 어떤 조언도 해줄 수가 없었다.
"후우..."
시에린이 밖으로 나간 걸 확인하자마자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첩이라...'
상상도 하지 못한 개념이었다.
나도 남녀역전세상에 많이 찌들어서 절대 생각못한 개념이었는데 시에린이 생각해 내다니...
"후우우..."
시에린도 시에린이었지만 내 가신중에는 나에게 적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는 이가 몇명 더 있었다.
라이넬은 나를 철저하게 기사와 주군의 관계로 대하지만 그건 아마 프레스티아의 존재 때문일 테고, 자기가 첩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면 어떻게 될 지 모른다.
미네타는 나를 사랑했던 것이 분명하다.
지금이야 어쩔지 모르겠지만 처음 보고 반해서 남자 공포증까지 사라져 버렸으니까.
안나도 있었다.
그녀또한 나를 사랑하는 것이 확실했다.
지금까지는 그녀들에 대해 일종의 불안감을 가지고 있었다.
내가 그녀들의 사랑을 충족시켜줄 수 없기 때문에 그녀들이 나를 배신할 가능성도 부정할 수가 없었다.
내가 황제의 자리에 오르게 되면 그녀들이 나에 대한 사랑을 실현할 수 있는 길을 막게 되는 거니까.
하지만 그녀 모두를 첩의 자리에 앉힌다고 약속한다면?
그렇게 되면 우리 세력이 훨씬 안정화 될 수 있지 않을까?
그 충직한 시에린 조차 여자로서는 나를 배신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고 했다.
그녀의 충성심이 나를 배신하는 걸 막았지만, 그녀의 충성심이 더 약했다면?
다른 여자애들도 시에린 만한 충성심을 가질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한다면 그녀들을 첩으로서 묶어 두는 것이 정치적으로나 그녀들을 위해서나 더 좋아보였다.
나는 지체하지 않고 몸을 일으켜 미네타에게 찾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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