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6화 〉 매력 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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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군주고 당연히 차가워야 하는 사람이고 당연히 냉혈한이어야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생각만으로는 완벽한 군주가 될 수 없었다.
나도 감정이 있고, 죄스럽다는 감정이 있고 죄책감도 있었다.
이전에 아렌을 볼 때 나는 그녀가 불쌍하다고 생각했다.
어릴 때 부모님을 포함한 모든 가족들을 잃고 다른 이에게 의탁해서 살아가는 존재인데 어떻게 불쌍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불쌍하다는 감정을 가진다고 해도 내가 그녀를 죽인다는 전략 자체를 수정할 생각은 없었기에 겉으로 들어내지 않았다.
그녀를 불쌍해 하고 가여워 하면서 그녀를 내 의지대로 사용한다는 것은 말 그대로 위선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런 감정은 그녀가 오늘 나에게 한 행동을 토대로 완전히 바뀌어 버렸다.
욱씬!
아까 아렌에게 꺾였던 팔이 아직까지 아팠다.
뭔놈의 애가 그렇게 힘이 센 건지, 아니면 내가 약한 건지 팔이 덜덜 떨릴 정도였다.
내가 그녀를 불쌍해 하고 가여워 하는 것은 그녀가 운명에 의해 목숨을 잃을 수 밖에 없는 연약한 어린이일 때나 가능한 일이었다.
그녀가 내 팔을 꺾는 순간 그녀는 더 이상 연약한 어린이가 아니었다.
힘으로 다른 사람을 지배하려고 하는 폭군이며 황제의 자리를 노리는 한 마리의 늑대였다.
같은 포식자들 끼리 불쌍하다는 감정을 가질 필요가 어디에 있겠는가.
'오히려 좋은 일일 지도 몰라.'
내 마음속에 있던 일말의 죄책감 마저 없앨 수 있었으니까.
아렌이 내 팔을 꺽은 이후부터 그녀와 개인적인 만남을 가진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그 날 이후 제대로 사과를 한 적도 없고 오히려 자기가 나보다 갑이라는 듯 안하무인으로 구는 성향이 심해져 갔기 때문에 그녀를 만날 때는 반드시 라이넬을 대동했다.
그년 도 참 웃긴 것이 나랑 둘이서 있을 때는 자기가 갑이라는 티를 팍팍 내면서 라이넬이 옆에 있을 때는 그렇게 조신해 질 수 없었다.
역시 여자들 사이에서는 힘의 논리가 강하게 작용하는 모양이었다.
'더 기어오르려고 하지 않아줬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그녀가 죽어줘야 하는 타이밍이 있는데 괜히 나에게 기어 오르려다가 일찍 죽어 버리면 나도, 그녀에게도 손해가 크다.
그녀는 오래 살지 못해서 손해고 나는 최적의 타이밍에 그녀를 죽이지 못해서 손해이니 두 사람의 행복을 위해, 어느 정도 기를 죽여 놓을 필요가 있겠지.
'누군가한테 납치 당하게 해서 자기 위치를 깨닫게 해줄까?'
아니야. 그런 방법을 썼다간 다른 황실파에게 내 이미지만 안 좋아질지도 몰라...
'당분간은 기사들로 제어를 하는 게 고작인가?'
이러한 내 걱정은 그녀가 나에게 먼저 사과를 함으로서 강제로 끊어지게 됐다.
"그 때는 제가 죄송했습니다. 잠시동안 미쳐 있었던 것 같아요."
아침부터 다짜고짜 만나자고 하는 아렌을 라이넬을 대동하고 만났는데 그녀는 나를 보자마자 무릎을 꿇고 땅에 머리를 박았다.
황녀가 땅에 머리를 박는다는 말도 안되는 광경을 본 내 몸은 자연스럽게 움직여서 맞절을 했다.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황녀님, 일단 일어나서 이야기 하시죠."
"아이데스님이 먼저 일어나 주세요."
내가 일어나지 않으면 그녀도 일어나지 않을 것 처럼 단호한 말이었기 때문에 천천히 일어서 바로 앉았다.
"갑자기 왜 이러시는 겁니까?"
"제가 잠깐동안 미쳐 있었어요."
아렌이 일어나자마자 다시 고개를 숙였다.
"아이데스님이 너무 아름다워서, 당신을 제것으로 만들고 싶었어요... 그 마음에 힘을 써서 억압하려고 그러고 이상한 마음도 품었어요."
그녀의 고개가 푹푹 떨어져 들어갔다.
"진짜 죄송해요. 다시는 이상한 생각 안 할 테니까 한 번만 용서해주세요."
그녀는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게 아니였다.
그녀이 목소리에는 분명히 자신을 향한 분노가 가득 들어 있었고 다시는 이런 일을 벌이지 않을 것이라는 강한 신념도 담겨 있었다.
'다시는 이상한 생각 안한다고?'
그래, 분명히 지금은 진심일 거다.
그런데 앞으로도 계속 진심일까?
오늘 술을 끊겠다고 다짐한 사람이 내일 바로 술을 마시는 건 상당히 흔한 일이다.
그가 전날 했던 다짐이 진심이 아니어서 그런걸까?
아니다.
그게 본성이어서 그런 것이다.
사람은 자신의 본성을 바꾸려면 그만한 자극이 필요하다.
술을 끊고 싶다면 그 본성을 바꿀 수 있을 만큼의 강력한 자극이 주어져야 하고 아렌의 말 처럼 더 이상 나에게 이상한 생각을 가지고 싶지 않다면 그 생각을 바꿀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자극이 주어져야 한다.
그런데 그녀한테 그런 자극이 주어질 수있을까?
그녀가 나를 힘으로 억압하게 되면 벌어지는 큰 일이 있을까?
지금이야 내가 그녀를 배신하면 바로 목숨을 잃겠지만 그녀가 황제의 자리에 올라간 다음이라면, 그녀의 본성을 막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지 않을까?
"네, 용서해 드리겠습니다."
일단 미소를 짓고 그녀를 용서했다.
그와 동시에 내가 봤던 그녀의 본성을 기억해 냈다.
자신의 명령을 듣지 않은 아름다운 꽃을 일부 꺾어서 자신의 말을 따르게 하는, 그녀의 본성을 기억했다.
그녀가 이제 와서 달라진 모습을 보인 다고 해도 내가 그녀를 죽일 때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것이 달라지지는 않았다.
"죄송... 합니다."
아렌이 눈물을 주륵주륵 흘렀다.
나는 자연스럽게 그녀를 꼭 안아주고는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꺼냈다.
"사람은 모두 실수를 하는 법입니다. 자신의 실수를 알고 그 흠을 매우기 위해서 노력할 수 있는 자만이 크게 될 수 있는 겁니다. 아렌님은 이제 잘못하신 게 없습니다. 세상을 살면서 반드시 알게 될 수 밖에 없는 자신의 단점을 이렇게 잘 넘기셨으니 말입니다."
"흐윽... 흐끅!"
그녀는 소리를 내어 울었다.
정신 없이 울면서도 과하게 나에게 몸을 비비는 그녀의 모습에 역시 사람은 고쳐 쓸 수 없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체감했다.
*****
"주군, 그 소문 들으셨습니까?"
"플레아 이야기야?"
프레스티아의 말에 가든이 화들짝 놀라며 그녀를 바라봤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가든, 너는 플레아 이야기를 꺼낼 때 마다 나보고 소문을 들은 적이 있냐는 식으로 시작해. 늘 그랬던 건 아니지만 적어도 90%정도는 그렇게 말했으니까 나도 90%정도의 확신을 가지고 물은거지."
프레스티아가 홍차를 호로록 삼키며 말했다.
차를 그리 좋아하지 않던 프레스티아였지만 한 세력의 군주가 되고 나서부터는 차를 상당히 많이 마시기 시작했다.
군주의 자리는 수많은 스트레스가 모이는 자리일 수 밖에 없고 그 스트레스는 프레스티아에게 화가되어서 돌아오는 데 이렇게 홍차를 마시며 마음을 진정하면 그 화를 최대한 줄일 수 있기 때문이었다.
"또 무슨 소문인데 그래? 저번엔 해상으로 나가더니 이번엔 하늘을 지배하겠다고 선포하기라도 했데?"
아무리 플레아여도 하늘을 먹는 건 무리겠지.
프레스티아가 가볍게 생각하며 묻자 가든이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들었다.
"그런 거창한 소문은 아닙니다만... 진짜로 들으신 적 없으신 겁니까?"
가든이 다시 한 번 물었다.
자신의 주군이 플레아에 대한 소문을 듣지 못했을리 없다는 믿음이 강하게 담겨져 있는 물음이었다.
"들어본 적 없다니까? 내가 들은 플레아의 가장 최신 뉴스는 리쿠르트 한테 돈을 빌려줬다는 게 끝이야."
"주군이 아이데스에 대해서 모르는 것도 있으셨군요."
"홍차 다 먹기 전에 빨리 말하는 게 좋을 거야."
"그리 대단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아이데스의 외모가 근래에 들어서 어마어마하게 아름다워 졌다는 군요."
가든의 말에 프레스티아가 콧방귀를 뀌었다.
"근래에 들어서 아름다워 진 게 아니라 원래도 아름다웠어, 늘 가면을 쓰고 다녀서 모르다가 군주가 된 이후에 가면을 벗도 다니니까 이제서야 그 외모가 빛을 발하는 것 뿐이야."
"저도 어지간하면 그렇게 생각하겠지만... 정보의 출저가 아이데스 휘하에 있는 부하들인데다가 근래의 범위가 일주일도 안됩니다. 그가 군주의 자리에 오른지도 벌써 몇달이 됐는데 최근 일주일 만에 몰라볼 정도로 아름다워졌다는 소문이 퍼지는 건 상당히 이상한 일 아닙니까?"
"일주일?"
프레스티아가 미간을 찌푸렸다.
"네, 벌써 부터 천하제일미라고 소문이 자자합니다. 몇몇 귀족은 그의 달라진 외모를 보기 위해서 아리나 영지에 방문하겠다고 한 이도 있으니까요."
프레스티아가 표정을 찡그렸다.
달콤한 꿀에는 잡벌레가 끼기 마련이다.
그 달콤한 꿀이 자신을 계속해서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은 그녀의 마음을 평온하게 했지만 괜히 잡벌레들 때문에 꿀이 상할까봐 걱정이 되었다.
"안되겠다. 한 번 찾아가 봐야지. 적당한 명분을 만들어서 플레아한테 연락을 넣어. 한 동안 얼굴도 못 봤는데 슬슬 만나도 되잖아."
"알겠습니다."
가든이 꾸벅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갔다.
'더 예뻐졌다고?'
이미 상상을 초월 할 정도로 예뻤는데 어떻게 더 예뻐진다는 거지?
프레스티아는 속으로 플레아의 모습을 상상하며 볼을 붉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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