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3화 〉 아리나 성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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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부터 아리나 성은 참으로 분주했다.
기사들은 조폭들을 쫓아내기 위해서 움직이고 새로 고용한 시종들은 손님을 맡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손님이 아니라 손년이라는 말을 써도 좋고 임이라는 말을 써도 좋았다.
무려 프레스티아가 찾아오는 일이었으니까.
아이데스 남작의 입장에서 보면 자기가 오기 전에 영지에 난장판을 피워 놓은 손년이었고 플레아의 입장에서 보면 마침내 다시 만날 수 있는 임이었으니까.
'꼭 성대하게 맡을 필요는 없지.'
내가 라이트의 성에 찾아갔을 때도 대단한 환대를 받은 기억은 없다.
다만 손님이랑 같이 먹을 식사니까 식사 정도는 제대로 준비해야겠지.
손님실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창 밖으로 멋들어지게 꾸며진 마차가 성으로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벌써 왔군.'
지금 시간은 12시 30분, 약속시간이 12시라는 것을 생각하면 고작 30분 밖에 늦지 않은 시간이었다.
초면에 기선제압한다고 3시간은 늦게 올 줄 알았는데 고작 30분 늦게 온 거면 그녀도 나를 만나지 못해서 애가 많이 탄 모양이었다.
"아이데스님, 손님이 오셨습니다."
"들라해라."
아직 상인들을 전부 설득하지 못해서 성에 발이 묶여있는 안나가 당분간 나의 개인 시종을 맡았다.
"알겠습니다."
그녀가 나간 뒤 잠시 뒤, 상당한 풍채를 가지고 있는 여성이 손님 실 안으로 들어왔다.
앉아서 손님을 맡는 것은 예의가 아닌 법, 자리에서 일어나니 그녀의 명치조차 보이지 않았다.
"잘 오셨습니다. 프레스티아 헬링님."
"그래, 잘 왔다."
그녀가 내 머리에 손을 툭 올려 인사 한 뒤 손님 자리에 앉았다.
등을 푹 기대고 다리를 거만하게 꼬는 모습을 보니 기선제압을 하려고 작정하고 온 모양이다.
'이렇게 나온다 이거지?'
자신보다 밑이라고 생각되면 거만한 모습을 취하며 상대를 깔 보는 건.
이는 난세에서 부터 이어져 내려온 그녀의 외교 습관이었다.
어느 정도 법의 논리에 따르는 개인 대 개인의 관계와는 다르게 세력과 세력간의 관계에는 힘의 논리가 강하게 작용한다.
상대가 자신에게 아무리 무례하게 굴어도 힘이 부족하다면 복종할 수 밖에 없었다.
당장 나만해도 그녀가 내 머리에 손을 올림으로서 인사를 대체했다고 해도 그녀에게 반항할 수는 없었다.
내가 더 약한 세력이었으니까.
"내가 왜 찾왔는지는 알고 있겠지?"
그녀가 오만한 표정으로 발을 탁자 위에 올려놨다.
내가 어지간히 약한 세력을 가지고 있는 모양이다.
이렇게 까지 무시 당하는 걸 보면.
'진짜 약한 세력은 발까지 핥으라고 시켰다는 걸 들으면 그래도 최악은 아닌가?'
"제가 보낸 편지때문에 찾아오신 것 아닙니까."
"멍청한 놈."
'이야 거칠다 거칠어.'
아무리 힘의 논리를 알려주려고 한다지만 공식적으로 처음 외교적인 자리를 갖는 군주한테 멍청한 놈이라고 하는 건 너무 당당한 거 아니야?
"네가 보낸 편지로 내가 무슨 마음을 가졌길래 너한테 왔는지를 말하라는 뜻이다."
오른발로 가볍게 땅을 쳤다.
이 신호는 섀도스탭에게 보내는 신호였다. 은신을 하고 그녀에게 따라붙은 자가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한 신호였다.
톡
아주 작은 소리가 내 귀에 들렸다.
한 번은 부정, 두 번은 긍정이었다.
'아무도 없다는 말이지.'
조금 강하게 두 발을 땅에 쿵 찍었다.
미안하지만 섀도스탭은 잠깐 나가있을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당돌하군. 내 말에 이렇게 까지 오래 대답하지 않다니 말이야."
그녀의 발이 위협적으로 내 앞을 오갔다.
나를 지배하시려고 아주 필사적이신데 그래?
섀도스탭이 방 밖으로 나갔을 시간이 되자 가볍게 잽을 날렸다.
"저를 보고 싶어서 오신 거 아니십니까?"
어차피 서로의 마음도 깐 거 당당하게 가자고.
내가 설마 외교적인 이유가 아니라 개인적인 이유를 꺼낼 건지 예상하지 못한 건지 그녀의 얼굴이 팍하고 찡그려졌다.
"그래, 너에게 할 이야기가 있었지."
"그게 아니라, 저희가 지금 거진 반년만에 만나는 것인데 지난 시간 동안 만나지 못했다는 것을 이유로 저를 만나러 오신 건 아니신지 묻는 겁니다."
그녀의 얼굴에 홍조가 돌았다.
'이야 역시 쑥맥 아가씨, 연애 쪽 이야기로 밀어붙이면 참 편하단 말이야.'
"혹시 저를 한 번 밟기 위해 오신 거라면 말씀만 하십쇼. 맞아도 좋고 발을 핥아도 좋습니다. 당장 할까요?"
내가 그녀의 발 쪽으로 얼굴을 가까히 하니 그녀가 화들짝 놀라며 발을 회수했다.
'귀여워.'
"후우... 장난은 이만하지 아이데스 남작."
"저는 장난이 아닙니다. 툭 까놓고 말해봅시다. 헬링님은 저를 밟기 위해서 오신 거 아닙니까? 반년이나 먼저 이 근처에서 세력을 키우고 계시던 헬링님에게 새로 들어온 제가 눈에 걸려 말 잘들으라고 명령하기 위해서 오신 거 아닙니까."
"그렇다고 발을 핥을 필요는 없다."
다른 인간한텐 시켰으면서.
"그러면 무얼 시키렵니까. 볼뽀뽀?"
실실 웃으면서 이야기 하니 그녀의 얼굴이 빨개졌다.
사랑이야기에는 참 약한 프레스티아에게 사랑을 이용해 공격하는 것,
이는 지극히 개인적인 공격이었지만 세력의 입장에서도 가장 완벽한 공격이었다.
"입, 닫아라."
입을 닫고 입술을 쭉 하고 내미니 그녀가 이마를 부여잡고 끄응 앓는 소리를 냈다.
"알았습니다. 장난은 이제 그만하도록 하죠. 그래서, 진짜 왜 오신 겁니까?"
이런 와중에 내가 맞추라는 소리는 못하겠지.
똑같은 짓을 또 할게 뻔했으니까.
"후우... 너희 성에서 나오는 수익의 일부를 나에게 바쳐라. 그렇다면 위험으로 부터 너희를 보호해주지."
프레스티아가 이곳에 온 이유라도 제대로 달성하기 위해 진정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무슨 위험 말입니까? 이 근처에서 힘 좀 쓰는 세력은 콜리오 영지밖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 잘 알았군. 나의 위험에서 보호해주겠다."
대놓고 깡패짓을 한다는 소리구만.
'원래 프레스티아가 이렇게 격했나?'
아무리 아리나 영지를 지배한 애가 좆밥이라고 해도 이렇게 까지 과격하게 움직이는 건 한번도 못 본 것 같은데.
'작정하고 자기가 이기려고 드는 구만.'
제국의 패권을 차지한 자가 상대를 지배한다.
그것이 우리의 약속이었으니까.
이기기 위해서 무슨 짓을 못하겠어.
'아니 못하는 게 있네.'
그녀가 진정으로 나를 이기고 싶었다면 그냥 이자리에서 나에게 큰 상처를 입히고 자신의 영지로 납치하면 된다.
엄청난 지탄을 받긴 할테지만 그녀는 원래 그런걸 신경쓰면서 세력을 키우는 인물이 아니었으니까.
그러지 않는 이유는 나에게 가지고 있는 애정과 자신을 이기려 드는 남자라는 특수성 때문이겠지.
"알겠습니다. 상납금을 바치죠."
"상납금이라니 보호금이다."
나는 내 주머니에서 1브론즈 짜리 동전을 꺼내 들어 그녀의 앞에 놓았다.
"금년의 보호금입니다. 잘 받으시지요."
얼토당토 않는 말에 그녀의 얼굴에 짜증이 담기기 시작했다.
"금년? 지랄하고 자빠졌군. 너희 영지에서 나오는 수익, 그 수익의 20%를 나에게 바쳐라."
"저는 이미 그것보다 더 한 것을 당신께 바치고 있습니다. 바로 제 마음이죠."
능글맞게 웃으며 그녀를 바라보자. 이제는 체념을 한 듯한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 봤다.
"더 이상 장난하지 마라. 한 번만 더 장난 치면 다음엔 군대를 끌고 너희 영지를 공격할테니까."
"헬링님이나 장난 치지 마십쇼. 영지 수익의 20%를 때가시면 어떻게 영지를 운영합니까?"
"20%를 때고도 운영 가능한 것이 아리나 영지라는 걸 안다."
이제 슬슬 머리를 굴려볼까?
프레스티아는 내 장난질에도 굴하지 않고 어떻게든 내 수익을 뜯어가실 것 같으니 제대로 된 방법을 생각해 내야지.
"조건이 있습니다. 영지 수익의 무려 20%를 때 가시니 가벼운 조건 정도는 받아주시겠죠?"
"그래, 말해보라. 듣고나서 판단하지."
"저희 상단이 콜리오 영지를 지나갈 수 있게 해주십쇼."
그녀가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상단에게 독점 권한을 주는 것도 아니고 영지를 지나가게 하는 것 뿐이다.
물론 영지안에서 장사를 하는 행위도 포함이 되어 있긴 하지만 이쪽은 영지 수익의 20%를 때어주는 데 들어주지 못할 만한 조건은 아니었다.
"그래, 허가해 주마."
마음속 깊은 곳에서 크게 미소지었다.
나에게 세계 제일의 상재를 가지고 있는 두 남매가 있다는 걸 알았다면 과연 그녀는 같은 대답을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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