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1화 〉 아리나 성1
* * *
나는 과연 도덕적으로 올바른 사람인가.
라는 질문을 할 여유는 없었다.
난세에 들어오게 되면서 내 성격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얼마나 차가워졌는지.
그런 질문을 왜 하고 도대체 왜 답을 내려야 한단 말인가.
'군주가 됐으니 당연히 도덕적으로 올바르지 않겠지.'
아직은 내 이득을 위해 수많은 사람을 학살할 수 있는 깡은 없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다.
그런 일이 진짜로 찾아오면 나는 내 이득을 위해서 손을 흔드는 것만으로 죄없는 사람들을 학살할지도 모르니까.
"하아아..."
지금 나에게 중요한 것은 나에게 죽을 수많은 죄 없는 사람들이 아니라 한숨을 깊게 내쉬고 있는 우리 교수님을 달래는 일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계약 안 했지..."
우리 교수님의 말투는 축 쳐져 있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평화로운 세력인줄 알아서 내 세력에 들어온다고 하신 건데 이번 전쟁을 지난 우리 세력은 제대로 된 영지까지 있는 큰 세력으로 거듭났으니까.
"전쟁에 나설 때 부터 눈치깠어야 했어..."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스승님, 저희가 가는 도시는 아리나라고 불리는 평화로운 무역도시에요."
"네타야. 결국 제도를 떠난다는 건 변하지 않잖니."
축 쳐져 있는 우리 교수님의 케어는 미네타에게 맡기고 나는 이번에 새로 우리 세력에 합류한 여자에게 붙어 입을 열었다.
"새로운 영지에 가는 기분은 어때 샤카 언니?"
"색다른 기분이야. 내 고향은 북부고 지금까지 있던 곳은 제도니까. 남부로 간다고 하니 느낌이 쎄하긴 하네."
"다른 기사들이 뭐라고 안했어? 자기 기사단을 버리고 내 밑으로 들어온 거잖아."
내 말에 샤카가 웃기다는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 봤다.
"너, 한 가지 까먹은 게 있는 데 아무리 명예라고 해도 너는 청기사단의 부기사단장이야. 부기기사단장을 따라서 간건데 다른 사람들이 뭐라고 하겠냐? 네가 부기사단장이 아니더라도 지금까지 쌓아놓은 평판이 있어서 따라가도 다들 축하해 줬을 건데 무슨... 오히려 잘 갔다고 하는 애들도 많아. 청기사단 내에서는 차별이 아예 없었지만 외부인이 북부라고 눈치주는 경우가 가끔있었거든."
근래에 북부와 내전을 치뤘다 보니 제도내에서 북부인들의 이미지가 상당히 안좋아졌다.
같은 청기사단원들은 샤카를 잘 알고 있다 보니 차벌없이 대할 수 있었겠지만 외부인의 입장에선 감히 반란을 저지른 북부인이 충성의 상징인 청기사단에 들어가 있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겠지.
"앞으로 우리 세력에서 잘 지내. 라이넬 실력이 정말 많이 늘었어. 아마 언니한테도 충분한 상대가 될 거야."
"그럴 것 같더라."
라이넬의 무력은 어느새 67이라는 수치에 올라와 있었다.
조금만 더 정진해 나가면 70이라는 수치를 뚫을 수 있게 되고 그 때가 되면 상급 기사라는 말을 붙일 수 있을 정도의 수준에 도달하게 된다.
샤카는 그 동안 무슨짓을 했는지 이미 무력이 70을 넘어 있었지만 적당히 봐주면서 싸운다면 서로에게 좋은 대련 상대가 될 것이 분명했다.
"내 얘기해?"
라이넬이 의문스러운 표정을 하고 우리에게 가까이 붙었을 때 나는 샤카도 라이넬에게 떠넘길 수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얘는 덩치크고 순한 인상에 걸맞게 다른 사람이랑 이야기하는 걸 매우 좋아하거든.
둘이서 붙여 놓으면 검술에 대해서 한참을 이야기 할테니 나는 자연스럽게 떨어져도 좋았다.
그녀들이 나를 붙잡을 명분도 없는 것이 기사 둘이서 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데 검이라곤 한번도 쥐어본 적 없는 남자를 옆에 붙여놓을 이유가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덕분에 나는 자연스럽게 그녀들에게서 떨어질 수 있었다.
"이제는 말 타는 게 아주 익숙해 졌나봐?"
홀로 남은 나에게 이번엔 시에린이 다가왔다.
"익숙해 진건 아니지만 앞으로 계속 익숙해 져야 할 필요가 있어서 타고 있는 거야. 앞으로 전장에 나서면 무조건 말을 타야 할텐데 그때 고생하는 것 보다는 지금 아파서 고생하는 걸 아무도 모르는 게 낫지. 그리고 다른 수하들이 다 말을 타고 있다 보니 마차에 있는 것 보다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서 더 좋고."
"나도 그것 때문에 말타지, 라일라를 봐, 혼자서 말을 못타니까 다른 사람들이랑 얘기도 못하잖아. 지금느끼고 있는 설렘과 긴장을 밥 먹을 때마다 다른 사람들한테 늘어놓는데 그 모습이 얼마나 웃긴지 몰라."
시에린이 킥킥대며 웃다가 갑자기 표정을 굳혔다.
"또 무슨 장난이야?"
"반은 장난이지만 반은 진지한 이야기를 하려고 표정을 굳힌 거야. 황실이랑 너만 알고 있는 알 수 없는 집단에서 요구하는 액수가 꽤 큰데 그걸 그대로 줄 거야? 처음 부터 이렇게 큰 금액을 말한 걸 보니 줄이려면 한참은 더 줄일 수 있을 것 같은데 말이야."
"어, 그대로 줄거야."
시에린이 언급한 알 수 없는 집단이라는 것은 청십자가 연맹을 말하는 것이었다.
시에린은 청십자가 연맹을 알지 못하다 보니 내가 따로 빼 놓은 금액을 보고 어떤 집단에 지원하는 거겠구나 싶어서 찍어 맞추는 것이었다.
"나는 황실에 충성하는 사람이니까."
과장된 몸짓으로 말하자 시에린이 학을 때며 몸을 떨었다.
"그래, 네 충성심 진짜 대단하다."
내가 황실과 청십자가연맹에 제공하는 돈은 공짜가 아니다.
그들이 나에게 해 준 이득에 대한 대가기도 하지만 돈으로 신뢰를 살 수 있는 일이기도 했다.
어디선가 이런 말을 주워들은 적이 있다.
평생 거짓말을 하지 않은 사람의 가장 큰 무기는 단 한 번 거짓말 했을 때 그 누구든 속일 수 있는 것이라고.
마찬가지였다.
절대적인 충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의 가장 큰 무기는 단 한 번 배신했을 때 그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것이었다.
내가 황실과 청십자가 연맹에게 돈을 지원하는 것은 내가 가지고 있는 가장 훌륭한 무기를 더욱 날카롭게 단련하는 것과 다름 없었다.
"거의 다 도착했어. 이제 슬슬 엉덩이 아픈 것도 끝이야."
"불행 중 다행이네."
"애들 논공행상은 어떻게 할지 생각했어?"
제대로 된 논공행상은 아리나 영지로 이동한 다음에 생각하기로 했다.
진짜 큰 공을 세운 사람들이나 최측근들한테는 성이나 마을을 나눠줘야 할 확률이 높았는데 그를 위해서는 일단 아리나 영지의 실상을 알아야 했기 때문이다.
정말 다행스럽게 내 수하들은 나에게 무한한 신뢰를 보내고 있었기 때문에 월급을 한 달 미루는 것과 다름 없는 내 말에도 믿고 따라줬다.
"어, 생각해 놨어. 누누히 말했다시피 이번 전쟁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의 공을 종합적으로 평가해서 주는 논공행상이니까 시에린 너도 기대해도 좋아."
"마디안가에서 처음으로 자기 마을이나 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는거야?"
"꿈이 너무 애매한 거 아니야? 너 정도 공이면 당연히 성을 가질 거라고 생각해야지."
"크으, 성이라 군침이 싹 도는 말이구만."
그녀가 진짜로 군침이 도는 것 처럼 입가를 손으로 쓸었다.
그녀의 반응이 이상한 것이 아닌 것이 다른 곳도 아니고 아리나 영지에 속해 있는 성이라면 각종 세금과 이용료로 나오는 금액이 어마어마할 것이 분명했다.
상인들이 말을 잘 듣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는 아주 사소한 문제점이 있지만 어차피 시에린은 자기 성 보다는 아리나 성에서 일할 가능성이 매우 높았기 때문에 어차피 성에서 나오는 돈만 받아 먹을 것이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상인이 말을 듣지 않는다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다른 시키는 건 전부 듣지 않아도 세금 내라는 말은 아주 잘 지키는 인간들이니까.
개발자들이 꿀의땅으로 만들었다는 추론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돈 벌면 부모님께 돈 부터 부쳐야지."
히히 웃으며 달콤한 꿈을 꾸고 있는 시에린에게 현실을 알려줬다.
"돈 벌면 일단 부모님을 네 성으로 모셔야지. 제도가 개판이 될 때까지 이제 진짜 얼마 남지 않았거든."
"알았어. 플레아 말이니까 믿고 따라야지."
그렇게 잡담을 나누며 계속 걷다 보니 작지만 꽤 단단해 보이는 성이 나타났다.
저곳에 이제 부터 내 영지의 중심의 될 성, 아리나 성이었다.
지금 아리나를 지배하고 있는 아리나라는 가문은 없었지만 오래전에는 아리나 가문의 지배를 받고 있던 곳이었기 때문에 영지와 성 모두 아리나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너희는 누구냐?"
"오늘 부터 이곳을 지배하게 될 플레아 아이데스다. 문을 열도록."
병사가 내려와서 황제의 직인이 담긴 문서를 읽더니 성벽으로 올라가 문을 열어 주었다.
성문을 지나 들어간 우리에게 가장 먼저 보인 것은 긴장감이 감돌고 있는 도시의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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