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6화 〉 플린 아이데스
* * *
"어머니!"
"우리 아들!"
어머니가 내 몸을 안고 몇바퀴 빙빙 도셨다.
전쟁 전이었다면 이 장면을 바라보고 있는 군사들의 군기가 떨어진다는 이유로 어머니에 대한 실례를 무릅쓰고 거절했겠지만 이제는 전쟁도 완전히 끝났고, 군사들이랑도 어느정도 친밀한 관계를 가지게 되었기 때문에 전쟁에서 무사히 돌아온 아들을 반기며 안아 주는 정도로 군기가 빠지거나 하지는 않았다.
"네가 정말 자랑스럽다. 우리 아들."
어머니가 나를 꽉 끌어안아 주셨다.
"제가 잘난 게 아니에요. 병사들이 열심히 해줬으니 저도 이렇게 전공을 세울 수 있던 거죠."
"전공에 대해 말한 게 아니라 남자의 몸으로 고향을 지키기 위해 군사를 이끌고 내려온 것을 말한거다. 여자도 하기 힘든 일인데 너는 훌륭하게 해주었으니."
어머니가 나를 꽉 껴안으시니 플린이 조심스럽게 다가와서 나와 어머니를 같이 안았다.
그렇게 한참동안의 회포를 푼 후 어머니가 나에게 조심스럽게 물어오셨다.
"이제 제도로 가는 거냐?"
"네, 제도로 갈 것 같아요."
"아카데미엔 더 이상 다니지 않겠구나."
"그럴 것 같아요."
제도에 들어가면 이제 내 영지가 생길 확률이 높은데 아마 그곳에서 지내게 되겠지.
"제도에 간 다음엔 새로운 영지에 임명이 될거라고 생각하는 데 내 생각이 맞니 아들?"
"그럴 것 같아요. 공을 많이 새웠으니까요."
"내가 이 마을을 이끄는 촌장이 아니었다면 아무런 미련없이 너를 따라 갔을 텐데..."
어머니가 슬픈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벌써부터 낙심하지 마세요. 제가 이 근처로 오게 될 수도 있고 언제든 원하면 왕래하면 되는 일이니까요."
"그래...알았다."
어머니가 나를 꼭 안아주셨다.
"플린, 물건 가져오렴."
"이미 가져왔죠!"
플린이 저 멀리에 떨어져 있는 가방을 순식간에 가져오며 말했다.
"플린, 진짜로 엄마랑 안 있고 나 따라올거야?"
"응! 나도 오빠한테 힘이 되고 싶어!"
플린은 기사로 그럭저럭 쓸만한 인재다.
일단 여동생이라는 혈연으로 묶여 있기 때문에 배신할 가능성이 현저하게 낮았고 여긴 남녀역전 세계니 만큼 무력도 상승해서 그럭저럭 재미볼 수 있을 정도의 무력은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플린을 냅다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가 뭐냐면 플린은 플레아를 플레이해본 사람이라면 모두 알 수 있을 정도의 망나니라는 것이었다.
나나 어머니 앞에선 천사가 따로 없는 플린이었지만 어른이되면 남자를 엄청 밝히는 데다가 망나니라는 말에 걸맞은 방향으로 자라난다.
어떻게 키워도 게임에서 그렇게 정했기 때문에 남자를 강간하고 다니는 개 망나니로 크는 아주 당연한 일이었다.
지금도 내 앞에서야 착하지 마을에선 골목 대장 수준이 아니라 어린애들의 지배자 수준으로 활동하고 있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때리고 괴롭히는 건 예사일이고 갑질도 엄청많이 하니는 걸로 알고 있다.
그런애가 남녀역전까지 됐으니 소설 속의 망나니랑 똑같이 활동하겠지.
그렇다고 해서 플린이 플레아 입장에서 아무런 가치가 없는 애는 아니었다.
얘가 큰 잘못을 했을 때 망설이지 않고 목을 배어서 읍참마속의 주인공이 될 수도 있고 적당히 자기세력이랑 가까이 붙어먹고 싶은 세력한테 보내서 정략결혼을 통한 동맹의 초석으로 삼을 수도 있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하나 뿐인 혈연이기도 하고 나도 플레아로 오래 살면서 플린과 정이 들었으니 얘 목을 잘라서 내가 얼마나 칼 같은 사람인지 알리는 데 쓰는 것 보다는 적당한 세력에 넘겨줘서 동맹을 위한 초석으로 삼는 것이 훨씬 좋게 느껴졌다.
"왜 그렇게 봐?"
"그냥, 플린이 나랑 같이 해준다는 게 좋아서 그랬지."
플린을 바라보며 웃으며 한가지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플레아가 플린을 자기 세력으로 집어넣는 타이밍은 늘 지금 타이밍이다.
동부왕국과의 전쟁을 알고 준비를 해둔 플레이어라면 지금 타이밍에 플린을 자신의 세력에 받아드릴 수 밖에 없다.
개발사가 설계를 그렇게 해뒀다.
게임에선 플린을 데리고 다닐 때 플레아 아이데스의 여동생이라는 신분으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근데 여긴 게임이 아닌데?
내가 플린을 진짜 기사 지망생으로 대한다면 망나니 같은 소녀의 성격이 제어될 수 있지 않을까?
"플린, 너 내 기사가 되고 싶은거지?"
"응! 나는 오빠의 기사가 되고 싶어!"
"기사와 여동생은 양립할 수 없는 개념이야. 내 여동생이야. 아니면 기사야. 하나만 선택해."
"... 기사면서 여동생일 수는 없는거야?"
"어, 그럴 수는 없어. 군주된 자로서 자신의 혈연 이라는 이유로 기사 한 명을 띄워준다면 세력이 제대로 돌아갈리가 없으니까."
"하지만 변경백님은 자기 여동생을 기사로 쓰신다는 말을 들었는데..."
플린이 말을 흐리며 땅을 바라봤다.
늘 천사 같던 오빠가 엄한 목소리에 굳은 얼굴로 이야기를 하니 겁을 먹을 수 밖에 없겠지.
"리하트 리쿠르트는 그 만한 실력이 있으니까 가까이에 두는 거야. 내가 둘을 직접 본 적이 있는데 공적인 자리에선 절대로 남매같은 모습 안 보여줘, 네가 내 여동생이라는 자리를 포기하고 내 기사가 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다면, 나는 너를 내 기사로 삼아줄게. 참고로 말하지만 네가 기사를 선택하면 나는 철저히 너를 기사 지망생으로 대할거야. 우리세력의 기사를 육성하는 곳으로 보내서 거기서 철저하게 네 힘으로 배우라고 할거고."
플린이 잔뜩 고민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끙끙앓다가 눈물을 살짝 흘리다가 마침내 결연한 표정을 짓더니 눈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낸 뒤 똑바로 나를 쳐다봤다.
"기사 지망생 플린 아이데스라고 합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기본기는 됐군."
여동생한테 하는 살가운 말이 아니라 군사를 대하는 딱딱한 말을 함으로서 플린에게 내가 어떤 존재인지 다시 각인시켰다.
"군사들이 있을 장소는 저곳이다. 너는 아직 군장이 없으니 짐을 들라는 말은 하지 않겠지만 군사들 속에서 잘 따라오도록."
"알겠습니다!"
플린이 크게 소리치고 군사들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병사들이 내 눈치를 보다가 일단 자기들 곁에 붙여 데리고 다니기로 결정한 듯 그녀를 옆에 딱 붙였다.
"플레아야."
"네, 어머니."
"진짜 잘 생각했다."
너는 자기 동생을 병사들 속에 넣다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거냐며 호통들을 각오를 하고 있었는데 뜬금없이 칭찬이 들어왔다.
"플린은 세상의 쓴맛을 맛봐야 하는 아이야. 마을에선 촌장의 딸로 살다보니 애들을 괴롭히는 아이로 성장했지만 네 세력안에서 만큼은 제대로 된 어른으로 성장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어미가 잘 키우지 못한걸 아들한테 맡기는 것 같아 미안하구나."
"괜찮아요. 어머니."
아버지 없는 가정에서 어머니도 자주 집밖에서 일하시는 가정에서 자랐으니 플린이 삐뚫게 자란 것도 이해가 된다.
어린나이부터 군대라는 체계에서 구르면 금방 철이 들겠지.
물론 플린에게 제대로 된 군대의 세계가 펼쳐져 있을 거라고 생각하긴 힘들었다.
그녀는 내 동생이었으니까.
내가 다른 병사들이랑 똑같이 대하라고 명령한다고 해도 그게 잘 시행될리가 없었다.
막말로 훈련중에 다치면 내가 가만히 있을지 어떡할지 알 수가 없잖아.
병사들 입장에선 내가 두려워서라도 플린에게 함부로 하지 못하겠지.
그래서 기사들을 배치할 거다.
애초에 플린의 꿈이 기사가 되는 거기도 하고 기사는 고급인력인데다가 신념이 있는 자들이라서 자기 주군이 굴리라고 하면 아무리 주군 동생이라도 사정없이 굴려버리는 이들이니까.
지금이야 여유 공간이 없어서 병사한테 맡기는 거지 내 영지 지으면 바로 기사 훈련소에 처 박을 거다.
난세는 적어도 십수년간 이어지니 지금부터 키운 기사도 충분히 전장에서 써먹을 수 있다.
내가 처음 난세를 플레이 할 때 기사 하나 육성하는 데 5년씩 걸린 다는 말을 보고 '기사는 역시 고용하는거구나!' 하고 기사 육성 시스템을 하나도 안 키웠다가 호되게 당했지.
'이래도 달라지지 않는다면 그냥 천성이 쓰레기인 거겠지.'
그 경우엔 그냥 다른 세력으로보내버리면 된다.
하지만 만약 제대로된 인간으로 성장한다면, 나는 플린이 바라는 삶을 그대로 만들어줄 자신이 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