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9화 〉 출전2
* * *
"동부 왕국의 병사들이 우리의 제국에 발을 들였다."
묵직하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 정도로 대규모 병사들 앞에서 연설하는 건 처음이었지만 매력의 보정이 붙었는지 전혀 떨리지 않았다.
"감히 우리의 터전에 발을 들인 자들이다. 절대로 용서해서는 안된다."
가볍게 손을 올려 병사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그리고는 오랜시간 동안 내 얼굴을 가리고 있던 가면을 벗어 던졌다.
갑작스럽게 비춰진 내 얼굴에 병사 몇명이 화들짝 놀라는 모습도 보였지만 대부분의 병사들은 내가 뿜어내는 기세에 눌려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너희는 나의 소중한 병사들이다. 단 한 명도 헛되이 죽도록 내버려 두지 않겠다. 너희가 어떤 상황에 처하더라도 나는 너희를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 할 것이다. 그러니 제군들도! 제국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해줄 것을 부탁한다!"
기세를 슬며시 푸니 함성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연설이 마음에 안드네.'
한 동안 귀족 만나는 일만 하다보니 병사들에게 좋은 연설을 해줄 수 있는 능력을 잃어버린 것만 같았다.
'금세 회복되겠지.'
앞으로 수많은 전장에서 병사들을 이끌테니까.
"그러면 출전하겠다!"
아카데미 출신 기사들이 행군의 앞과 뒤에 섰다.
갑작스런 다른 이들의 공격을 방어하는 용도로 세워둔 것도 있지만 아무래도 행군 자체가 처음인 병사들이다 보니 낙오되는 병사를 최소화하기 위해서 만든 모형이었다.
'생각보다 잘 움직이는데?'
신참들 답지 않게 속도도 일정하고 간격도 잘 유지하고 있다.
아직 출발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지쳐 쓰러지는 자는 당연히 없었지만 처음에 이렇게 제대로 걷는 걸 보면 기대할만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세를 플레이 할때는 병사들 훈련도가 낮으면 이탈하고 속도 느려지고 난리도 아니었거든.
'역시 좋은 인재들을 사용해서 훈련시켜야해.'
제대로 된 인재한테 맡겨놓으니까 이렇게 잘 걷잖아.
참고로 나는 말을 타고 이동하는 중이었다.
몸이 애초부터 약한데다가 흑마법사의 저주 탓에 더이상 강해지려 노력할 수 조차 없는 내가 전선까지 걸어가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으니까.
그렇다고 지휘관이라는 작자가 마차를 타고 움직일 수도 없었다.
내가 데리고 있는 병사가 만명, 10만명이었으면 내가 마차에 타고 있든 말을 타고 가든 라이넬을 타고 가든 알 수 있는 병사들이 얼마 없지만 우리 병사는 고작 천명이었으니까.
병사들의 사기를 위해서라도 말을 타고 가는 것이 맞았다.
'말 타는 법 배우느라 고생 좀 했지.'
같은 이유로 행정직을 맡고 있는 시에린과 라일라도 말을 타고 이동하고 있다.
분명 나랑 비슷한 시기에 말 타는 법을 배웠는 데 나보다 훨씬 말을 잘 다루는 것을 보면 역시 남녀역전세계다.
천천히 말을 이동시켜 미네타가 앞장서 이동하고 있는 마법병단이 있는곳으로 향했다.
"하이네스, 잠깐 이야기 좀 하지."
"알겠습니다."
사석에서는 서로 이름 부르며 편하게 하는 관계였지만 병사들 앞에서도 편한 모습을 보여줄 순 없었다.
지휘관이 병사들 앞에서 편한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선 병사들과 실제로 편한 관계가 되어야만 한다.
동부 왕국과의 전쟁에서 사람다운 모습을 좀 보여주면 간부들과도 편하게 소통하는 모습을 드러내도 되겠지만 아직은 군기를 유지할 필요가 있는 때였다.
"무슨일로 부르셨습니까?"
"마법병단에 대해 물을 것이 있어서 불렀어. 전장에 투입할 수 있을 만큼 실력을 키운 거 맞지?"
"물론이지! 요."
마법병은 이 시기에는 아직 제대로 연구되지 않은 병종이었다.
마법은 기본적으로 귀족들만이 즐길 수 있는 전유물이었고 마법사, 라고 하면 높은 화력을 가지고 있는 강력한 고위 마법사들을 생각하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마법사는 아무리 서클이 낮다고 하더라도 충분히 그 가치를 입증할 수 있는 이들이었다.
2서클만 되도 어지간한 병사의 무력은 뛰어넘고 그들이 한 군데에 뭉쳐 있다면 궁병을 아득히 상회하는 강력한 파괴력이 나온다.
이를 처음 연구한 자가 누구인지는 시드에 따라 다르지만 한 명이 마법병단을 육성하자 1년도 지나지 않아 마법병단은 대세가 됐다.
'이번엔 그 역할을 내가 맡을 뿐이야.'
아무것도 없는 내가 큰 공을 세우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기도 했다.
아직 마법병은 만들어지지 않았고 그 누구도 대처 법을 모르고 있다.
우리가 사용하는 마법병이 효율이 좋은 것 같아서 후발주자로 끼어들려고 해도 적어도 반년 가까이 되는 시간이 필요하다.
마법은 기본적으로 머리를 많이 써야 하는 학문이다 보니 병사 수준의 마법을 만드려고 해도 반년 정도는 투자해야 제대로 된 마법병단을 만들 수 있다.
마법병단만 제 일을 제대로 해준다면 이번 전쟁에서 최고 공훈자가 되는 것도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
걷고 걷고 끝도 없이 걸었다.
때로는 가도, 때로는 산길, 때로는 평지 제도에서 전장까지 가장 빨리 움직일 수 있는 길로 쭉 걸었다.
몇몇 길의 경우 병사들이 들어가지 못하게 막는 경우도 있었지만 내가 훈장을 내밀면서 절대로 다른 시민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을 거라고 확답 하니 대부분의 길을 이용할 수 있었다.
비포장 도로가 아니라 그래도 사람들이 자주 지나다닌 길을 이용한 덕분에 병사들의 피로가 많이 떨어지긴 했지만 역시 이런 대규모 행군은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신병들 특유의 문제점이 곳곳에서 발생하고 있었다.
어떤 병사는 잘 걷다가 갑자기 쓰러지기도 했고 어떤 년은 갑자기 쥐가 나서 다리를 덜덜 떨다가 뒤로 쭉 밀려나고, 그 상태로 속도가 늦어져 낙오할 뻔도 하고 아주 총체적 난국이었다.
'이런걸 보면 왜 군대에서 행군을 하는 지 알 것 같아.'
훈련을 해봐야 실전 상황에서 쓸 노하우를 찾아내지.
우리 병사들은 행군 훈련을 여유가 없었다.
급조한 병력이기도 하고 숨겨서 키운 병사들이었기 때문에 이들을 이끌고 행군을 하는 미친 모습을 보여줄 수도 없었으니까.
상태가 심각한 병사들은 마차에 태우고 상태가 좀 나은 병사들은 다른 병사들에게 부축을 받게 하거나 최대한 걸을 수 있는 데 까지 걷게 했다.
병사 한 두명이 힘들다고 해서 멈춰설 수는 없었으니까.
그렇게 며칠을 걸으니 드디어 전선 근처에 도착할 수 있었다.
'평화롭군.'
실제로 평화로운 것은 아니었다.
적군들이 이곳까지 당도하진 않았지만 코 앞에 적군들이 있다는 것을 모두 알고 있기 때문에 도시 전체가 시끌시끌했고 전쟁 전 특유의 긴장감이 느껴지고 있었으니까.
우리를 공격하겠다고 당당히 선전포고를 한 동부 왕국이었지만 아직 변경백 근처에도 도달하지 못했다.
오랜 시간동안 고이면서 썩은 나라는 제국뿐만이 아니었다.
동부 왕국도 제국의 밑에서 오랫동안 존재하는 동안 지들끼리 내부에서 썩고 난리가 나 있었다.
좀 말도 안되는 설정인 것 같긴 한데 이런 설정이 없으면 플레이어가 전선에 오기도 전에 전쟁이 시작되어 버리는 불상사가 일어날 수 밖에 없는 구조라서 어쩔 수 없었다.
전선 근처의 긴장감 넘치는 도시들을 지나며 작은 마을로 향했다.
처음 출발할 때 부터 그 마을을 경유할 것을 염두해 두고 루트를 짰기 때문에 병사들이 더 고생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정지! 정지!"
아무리 제도쪽에서 왔다고 해도 천 명이나 되는 군인들이 자기들 마을에 다가오는 건 겁을 먹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제대로 전시 체제가 이루어지면 제대로 된 아군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제국이 정상적인 상황이면 몰라도 이렇게 막장화 된 상태에선 제국의 군대라고 해도 언제 자신들을 약탈할 지 모르는 작자들로 비춰질 수 밖에 없었다.
"누구냐!"
경비병의 외침에도 아무말 하지 않고 가만히 서 있으니 곧 마을의 촌장이 앞으로 나왔다.
"너희는 누구지? 누구의 병사들이냐?"
그녀의 목소리는 긴장으로 가득차 있었지만 왠지 모를 기대감도 엿볼 수 있었다.
"플레아 아이데스의 군대입니다. 마을 안에 들어가려는 것이 아니라 저희 지휘관님이 마을의 촌장님과 이야기 하고 싶다고 하셔서 왔습니다."
"오라 해라."
그녀의 말에서 약간의 울음기가 느껴졌다.
"충성."
"그래, 충성."
내가 마을 입구로 다가가자 어머니가 나를 꼭 껴안아 주셨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