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6화 〉 몸집 불리기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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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난세에서 황실과 연계된 플레이를 그리 많이 해 보지 않았다.
가끔 황실과 연계를 한다고 해도 지금 하는 것 처럼 겉으로는 황실에 충성하는 척 이득을 얻고 나중에 황실이 완벽히 몰락한 뒤 본색을 보여주는 식으로 플레이 했지 제대로 황가 사람이랑 얼굴을 트고 인연을 튼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 마저도 황녀 하나와만 친해지는 것으로 끝낼 줄 알았는데 이번에 새로운 인연이 생겼다.
아데스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황실의 막내와 친분을 쌓게 됐는데 이를 어떻게 이용할지는 생각해 두지 않았다.
그녀의 포텐이 터지려면 아무리 적어도 몇년은 있어야 하고 아무리 난세를 많이 플레이 해 온 나라고 해도 수년에 해당하는 시간이 흐르면 무슨일이 발생할지 확신할 수가 없다.
남녀역전 세계인 만큼 여자라는 이점을 가지고 더 나대다가 빠르게 암살 당할 수도 있고, 황자로 위장하면서 천천히 힘을 키워서 손윗 자매들을 전부 죽여 버릴 수도 있다.
어제 대화한 내용을 토대로 생각해 보면 그녀는 황위에는 전혀 관심을 가지지 않는 것 처럼 보였지만 인생이란 원래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르는 거니까.
내가 해야할 건 그녀와 간간히 만남을 가지면서 그녀가 어떻게 성장할 지 간을 보는 것 뿐.
그렇게 내부적으로는 세력의 몸집을 불리고 외부적으로는 다양한 사람과 만나고 다니니, 아카데미에서 수업을 제대로 듣는 일도 많이 없어졌다.
반드시 들어야만 하는 과목은 열심히 듣고, 이해가 안되는 게 있으면 시간을 억지로 짜내서 공부했지만 군주와 상관이 없는 과목들은 아예 듣지도 않은 채 지냈다.
"플레아, 우리 교수님이 부르시던데?"
"우리 교수님?"
미네타의 말을 듣고 한참을 생각해야 했다.
내가 우리 교수님이라고 부를 정도로 친한 교수님이 계셨나?
대략 1분 정도를 멍 때리듯 기억을 더듬은 뒤에야 우리 교수님이 작년 1학기 때 나에게 교양 마법을 알려주신 교수님이라는 사실을 기억해 냈다.
미네타가 그 분을 우리 교수님이라고 부르는 것도 당연했다.
그 교수님 성함이 우리, 였으니까.
그 분이 갑자기 왜 나를 부르는 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녀는 하이네스 뿐 만 아니라 미네타또한 반 정도 수제자로 삼으시고 가르쳐 주시는 분이셨기 때문에 가기 싫다고 뺄 수는 없었다.
1학년 때 인연이 있기도 했고.
미네타에게 들은 우리 교수님의 교수실로 이동해 문을 두두렸다.
"플레아냐?"
"네, 플레아 아이데스입니다. 교수님."
"들어와."
문을 열고 들어가니 교수님이 소파에 누워서 쉬고 계셨다.
그녀의 교수실에는 다른 교수님들과는 다르게 자신의 실험에 대한 내용은 하나도 없고 구석에 작은 매트리스 하나와 책장 정도를 제외하면 마땅한 물건 조차 없는 곳이었다.
"저는 갑자기 왜 부르셨어요?"
1학년 때 교수님의 수업을 들었다는 걸 제외하면 아주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다.
그 수업조차 하이네스가 진행할 때가 많았고, 그녀는 나 같이교양 목적으로 마법을 배우는 사람 보다는 미네타나 하이네스 처럼 마법에 뼈를 묻는 이들에게 관심이 더 많았다.
물론 그녀에게 감사한 것도 있다.
내가 예전에 감히 나에게 주어진 은급 훈장을 받아도 되는 지 고민하고, 꼬마 영웅 같은 대단한 칭호를 벌써 받아도 되나 하고 걱정하고 있는 걸로 착각하셔서 나를 위로도 해주셨고, 그녀가 가르쳐준 마법도 유용하게 잘 써 먹고 있었다.
참고로 내가 훈장을 받기 전에 고민했던 이유는 훈장을 받음으로서 나에게 가해지는 지나친 관심이 걱정된 것 뿐이지 내 가치에 대해서 고민 한 적은 없었다.
"요즘 이곳저곳 많이 돌아다닌다고 들었다. 세력을 늘리려나 보지?"
"네."
숨길 생각은 없었다.
누가 뭐라고 해도 나는 아무리 황실파라고 해도 최소한의 무력은 가지고 있어야 황제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는 논리로 맞받아 칠 생각이었으니까.
그래서 일반적인 황실파의 관료들이 전혀 사용하지 않은 방법으로 인재를 영입하고 이를 황실에 넘기는 게 아니라 내가 키우면서 내 세력을 키우고 있는 것이다.
"내가 널 왜 불렀을 것 같아?"
"잘 모르겠습니다."
"너희 세력에 남는 자리 있냐?"
"예?"
"네 밑으로 들어가고 싶다고."
한 번에 이해가 되지 않는 소리였다.
내 이미지 속의 우리 교수님은 귀차니즘이 심하고 무뚝뚝 하긴 해도 다른 사람한테 지고 들어가는 이미지는 아니었다.
그런 사람이 갑자기 내 밑으로 들어오겠다는 데 당연히 벙찔 수 밖에 없지.
물론 우리 교수님이 내 밑으로 들어오신다면 나야 당연히 환영할 수 밖에 없었다.
우리 교수님은 교수님 치고 나이가 많은 편은 아니시고, 기성세대들이 싸그리 몰락해 버리는 전쟁에 참여하지 못하게만 막는다면 대륙 통일을 할 때 까지 쓸 수 있는 병력이었다.
미네타 처럼 높은 고점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당장 뛰어난 실력을 발휘할 수 있는 사람이니 내 입장에서는 제발 와 주십사하고 빌어야 하는 상황이라는 의미가.
그런데도 내가 바로 '네.' 라고 대답하지 못한 건 그녀가 왜 내 밑으로 들어오려 하는 지 감을 잡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아카데미의 교수였다.
매사에 귀차니즘에 빠져 살면서도 교수직을 유지할 수 있을 정도의 실력자였고 그에 따라 보수도 많고 복지도 빵빵하고 자기 연구도 마음껏 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런 그녀가, 나같은 조막만한 세력에 들어오려고 한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백 번 정도 양보해서 그녀가 다른 세력의 밑으로 들어가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게 됐다고 해보자.
그러면 당장 사모아 공작가나 프레스티아 밑으로 가려고 하면 아이고, 교수님 하면서 반겨 줄거다.
많은 서클을 가진 마법사는 그만한 가치가 있었다.
내가 알기로 그녀가 가지고 있는 서클이 8개라고 들었는데 이는 소드 마스터랑 동급이었다.
"대체 왜요?"
"요즘 제도 분위기가 뒤숭숭 하잖냐. 가뜩이나 학장이 이상한 일을 꾸미고 있어서 교수들 사이에서도 말이 많은 데 이렇게 가다가는 아카데미가 하나의 파벌 느낌으로 형성될 것 같거든? 그런데 나는 죽어도 그런 짓 못해. 그렇다고 고향으로 돌아가서 유유자적하게 사느니 돈 나올 구석이 없고... 그래서 너 같이 작은 세력 밑으로 들어가면 세상에 흔들리지 않고 편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아서 부탁하는 거야. 싫으면 안 받아도 돼."
"아닙니다. 저는 절대 싫지 않습니다."
거절하는 게 병신이었다.
우리 세력이 그녀가 상상하는 것만큼 작지 않고, 제국을 하나로 통일하는 것을 최종적인 목표로 두고 있다고 해도 이걸 지금 당장 밝힐 필요는 없었다.
허락보다 용서가 쉽다는 말이 있다.
일단 우리 세력에 들어온 뒤 그 우리 세력을 체험시키고 천천히 적응 시켜나가는 것이 저희 세력이 이런 세력인데 그래도 들어오시겠어요? 하고 불안감 부터 주는 것 보다 훨씬 좋았다.
"좋아. 그러면 이번 년도 끝나면 들어갈게, 나도 아카데미랑 계약이 있어서 말이야."
"계약서 쓰죠."
1년이면 무슨 일이 일어날 지 모르는 시간이다.
우리 세력이 갑자기 커밍아웃해서 사건의 중심으로 들어갈 수도 있고 우리 교수님이 갑자기 야망뽕이 차셔서 프레스티아의 밑으로 들어갈 수도 있으며 학장이 죽고 다음 학장이 임명됐는데 그 학장이 아주 겁쟁이라서 아카데미가 우리 교수님이 살기 좋은 곳으로 변할 수도 있었다.
지금부터 약 8개월 뒤, 아카데미와 교수님의 계약이 끝날 때 우리 교수님이 내 세력으로 들어온다는 계약서를 적었다.
이쪽으로는 순수하신 분이신지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조항 하나도 없이 순수하게 우리 세력으로 들어온다는 계약서에 싸인했다.
작정하고 장난치려고 하면 진짜 끝을 볼 수 있는 계약서였지만 진짜로 장난을 쳤다가는 우리 교수님께 내 목숨이 사라질 수도 있었으니 계약서 가지고 장난질치는 건 불가능했다.
어쩌면 우리 교수님도 그걸 알고 그냥 싸인 하신 걸 수도 있고.
"이제야 마음이 좀 편하네."
"제자뻘 되는 애들이랑 같은 세력에서 활동하는 건데 안 불편하시겠어요?"
"제자뻘이라고 해봤자 너희랑 10살 차이... 보다는 더 나겠구나, 딸 뻘 도 아니고 그 정도는 문제 없어."
"알겠습니다."
큰 규모의 계약을 따 낸 신입사원처럼(물론 실제로 존재할 일은 없다.) 싱글벙글한 웃음을 지으며 우리 반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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